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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⑫비단길의 역사와 주요 루트

이치란 | 기사입력 2016/05/05 [11:41]
그리스 철학 사상과 인도불교, 중국과 페르시아 사상 등 혼합문명이 형성되기까지

실크로드기행⑫비단길의 역사와 주요 루트

그리스 철학 사상과 인도불교, 중국과 페르시아 사상 등 혼합문명이 형성되기까지

이치란 | 입력 : 2016/05/05 [11:41]
▲ 기원전 490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입구에서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그리스 철학과 인도불교, 중국과 페르시아 사상 등 혼합문명이 형성
   
실크로드는 영어식 표기이다. 실크루트(silk route)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绸之路)라고 하며, 한글로는 비단길이 되겠다. 실크로드선상에서 운반되는 물건이 비단만이 아니었지만, 비단은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고, 운반이 편리한 가벼운 짐이면서 값이 나가는 상품(上品)이었기에 주목을 받았다. 실크로드의 전 노선을 한마디로 비단길이란 이름으로 대변되게 된 것은 독일의 탐험가요 지리학자이며 과학자였던 리히트호펜(Ferdinand Freiherr von Richthofen1833–1905)이 그의 저서에서 비단길(Seidenstraße)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이다. 비단길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877년부터이다. 어떤 학자들은 실크로드란 용어 보다는 실크루트를 선호하기도 한다.
 
▲ 비단길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     © 매일종교신문

독일의 본대학과 베를린 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리히트호펜은 1868년부터 1872년 사이에 중국 등지를 7차례나 탐험하고 독일어와 영어로 실크로드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지리와 지질을 연구했는데, 그가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유명한 지리학자들 가운데에는 스웨덴의 스벤 안데르스 헤딘(Sven Anders Hedin1865–1952)이 있다.
 
스벤 헤딘은 주로 중앙아시아를 탐험했는데, 타림 분지 동부에서 고대 왕국 누란(樓蘭)의 유적을 발굴해 전 세계의 지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면서 그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를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였다. 다양한 주제의 과학 논문과 여행기 전기 선언문 소설 등의 65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헤딘은 1908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일본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을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스벤 헤딘의 저술 실크로드.     © 매일종교신문

헤딘은 그의 책에서 고종과 순종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며, 순종에 대한 서술은 오류투성이라고 한다. 그는 페르시아를 필두로 중국 티베트 몽골리아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연구업적을 남김으로써 실크로드 연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하겠다. 실크로드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리히트호펜의 제자들 가운데는 스벤 헤딘 외에도 지리학자 기상학자등을 다수 배출했다. 실크로드학 연구에 있어서 리히트호펜을 위시한 그의 제자들을 제쳐두고 실크로드의 연구는 어려울 것이다.
 
실크로드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물건과 문화교류에서 시작되었다. 물건의 교환은 무역으로 발전하고 화물의 운반을 위해서 길들인 동물이 운반수단으로 등장한다. 사람이 운반하던 화물은 동물에 의해서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게 되고 또한 문화교류는 무역을 더욱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동서 간에 이뤄진 이 같은 무역과 문화교류는 처음엔 초원로(草原路)에서 이뤄진다. 초원은 기름진 목초지 물과 마차의 이동을 쉽게 해준다. 이 같은 조건은 상인들에게 먼 거리를 여행하게 해주었는데, 특히 경작지를 침범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태평양의 해안가들에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깊숙이까지 이르게 했다.
 
▲ 알타이 산맥의 일리 강에서의 한 스키타이가 말을 몰고 있다. 기원전 3세기.     © 매일종교신문

초원로에서 활동을 했던 주요 주역은 스키타이들이었다. 이런 역사적 근거는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480-420BCE)의《역사》란 책에 의해서이다. 역사학의 아버지로 칭하는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90년에서 480년까지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나의탐구’에서 라틴어로 차용되어 역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어느 정도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으며 잘 조직되면서도 생생한 줄거리에 따라 사료를 배치한 최초의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스키타이는 스쿠드라 소그디아 사카라고도 하는데,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는데, 스키타이는 유럽에도 이주하였다. 이들은 결국 체코,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한다.
 
▲ 기원전 100년경의 스키타이와 파르티아 영역.     © 매일종교신문

스키타이족은 기원전8-9세기경부터 제국을 건설하였고 서쪽으로 도나우 강, 동쪽으로 돈 강, 북쪽으로 드네프르 강과 부그 강의 상당한 지역까지 뻗쳐 있었으며 기원전 7세기경부터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드네프르 강에 이르기까지 퍼져 살았다. 이 기마 전사들은 훌륭한 궁술을 가지고 있었고, 바지를 입음으로써 기동력을 높였다. 용병으로 싸우기도 하였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 족에 대해서 점령지 주민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민족이라고 평가했는데, 스키타이족이 잔인했던 이유는 반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5세기경에 흑해 지역을 방문한 헤로도토스는 이들에 관한 자세한 자료를 주고 있다. 역사가들은 스키타이족들을 타타르족이라고도 부른다. 스키타이의 부족은 대가족의 형태를 취했는데 현대용어로 호드(Hord=유목민의 무리)라고 하며. 호드는 한 조상에서 태어났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구성원 수가 늘어난 다음에는 무리의 족장을 무르사라고 했으며, 구성원 모두는 충성했다. 평화 시에는 무르사는 재판관이 되며, 전시에는 사령관의 역할을 맡았다. 호드들은 국가단위로 뭉치게 되었고, 무르사가운데서 최고 지도자를 ‘칸’이라고 불렀다. 이런 전통은 몽골족에게도 이어졌고, 현재도 내몽골 같은 데에 가면 기(旗)로 남아 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가 무역으로 접촉한 것은 기원전 2세기로서 야르칸드와 호탄에서 생산된 연옥(軟玉)이었다. 야르칸드는 중국 신장성 위구르 자치구 카스(카슈가르) 지구에 있는 사처 현이다.
 
▲ 호탄 문화박물관 로비에 전시되고 있는 M자형 연옥.     © 매일종교신문

호탄(허텐)은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허텐 지구의 수도이다. 고대에는 중국인들에게는 우전국(于窴)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 불교를 전해 준 고대 왕국이다. 호탄은 중국에서 하서회랑을 지나서 둔황을 경과, 곤륜산을 따라서 서진하면 곤륜산 아래의 오아시스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야르칸드는 호탄에서 서북진하면 파미르 고원 입구에 있는 고대 왕국이다. 이들 지역은 기원전부터 다 불교가 왕성했던 오아시스 나라들이었다. 타림분지 남쪽 곤륜산 밑에 있었다가 사막 속에 파묻혀버린 고대 타운 누란이란 곳에서 1980년에 발굴된 ‘누란미라’는 산소측정에 의하면 이 미라는 인도유럽어족으로 기원전 1600여 년 전인 지금부터 3600여 년 전에 타림분지에 살았다고 하는데, 매장 당시 40대의 여인이라고 한다.
 
▲ 영국의 탐험가로 헝가리 태생의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경일행이 타림분지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1910년.     © 매일종교신문

스키타이는 초원이 주 무대였지만, 서쪽의 헝가리 초원과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동쪽으로는 중국 감숙성 회랑에 이르고 중동에서는 북부 인도와 펀자브까지 연계되고 있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는 중동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시대에 3000km의 왕도가 이란의 슈시에서 터키 에게해의 스미르나까지 있었다고 했다. 이 왕도는 아케메네스 제국(500-330BC)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호되었다고 한다.
 
▲ 다리우스 대왕(522-486BC) 때의 아케메네스(페르시아) 제국의 최대 판도.     © 매일종교신문

기원전 그리스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실크로드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기원전 329년 그는 타지키스탄의 페르가나 입구인 동쪽 끝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는데, 고개를 넘으면 중국의 신장성이다. 실크로드 천산북로였던 대원(大宛)은 大 이오니아(그리스)인들 이란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파미르와 힌두쿠시 사이와 북부 인도에도 알렉산드리아도시를 건설했다.
 
▲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 도시들.     © 매일종교신문

알렉산더 대왕(356–323 BC)은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였다.
 
▲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 전투를 하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     © 매일종교신문

그리스인들은 이후 300년간 중앙아시아에 남아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토 가운데 헬레니즘을 계승한 왕국인 셀레우코스 제국(312-63BC)을 세웠고, 제국의 최대 영토는 아나톨리아 중부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투르크메니스탄, 파미르, 인더스 계곡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 왕국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었다.
 
다음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그레코-박트리아 왕국(250-125BC)을 세웠고, 나중에는 지금의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인도-그리스왕국(180BC-10CE)을 세웠다. 이 기간 그리스 왕국들은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타운과 교류했으며, 중국과는 기원전 200년경 처음 접촉했다고 한다. 박트리아 왕국의 에우티데모스 1세((230-200BC 재위 223-200BC)는 현재의 신장성인 카슈가르까지 진출했었다고 한다. 이런 접촉으로 그리스의 헬레니즘문명(323-146BC)과 고대 그리스철학이 동양철학(페르시아와 중국)과 혼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로 인하여 그레코-불교란 통합(혼합)주의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그레코-불교의 탄생을 알아야 대승불교 탄생의 배경을 알게 되는데, 우리에게 이 부분이 전혀 연구되어 있지가 않다. 그레코-불교란 결국 그리스 철학 사상과 인도불교가 만나서 혼합한 것을 말하고 고대 페르시아 사상까지도 섞여진 혼합문명인 것이다. 결국 이런 배경을 가진 그레코-불교를 계승한 쿠샨제국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혼합주의에 대해서 개념을 정리하고 그레코-불교를 알아보자.

▲ 셀레우코스 제국(312-63BC)의 영토.     © 매일종교신문
▲ 그리스-박트리아 왕국(256-125BC).     © 매일종교신문
▲ 인도-그리스 왕국(180BC–10AD).     © 매일종교신문
혼합주의(싱크리티즘 syncretism 混合主義)는 본질적으로 상이하거나 혹은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러 믿음을 조화롭게 공존시키고 다양한 학파의 사상들을 융합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신학과 종교적 신화의 영역에서 근본이 전혀 다른 몇 개의 전통을 하나로 합하고 유추하여 조화시키려는 시도로 흔히 나타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각 도시와 지방의 신과 신화, 신학들을 혼합하여 새로운 강력한 신앙을 만들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시작된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시대에 각지의 다른 종교들이 서로 결합되었다.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융성하였던 나스티시즘(영지주의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은 고대의 대표적인 혼합주의 종교 운동 중 하나이다. 3세기에 페르시아의 마니는 기독교·조로아스터교·불교의 요소를 혼합하여 나스티시즘의 일파인 마니교를 창시하였다.
 
16세기에는 무굴 제국의 구루 나나크(시크교 창시자 1469-1538인도)가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요소를 혼합하여 시크교를 창시하였다. 종교 분쟁의 역사가 곧 인류 역사 자체였다는 반성 위에서 세계 종교 통합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19세기에 일어난 바하이 신앙(페르시아인 바하올라1817-1892)가 창시한 종교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혼합주의적 경향은 문학, 음악, 그리고 문화의 표현양식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과 원정 루트 지도.     © 매일종교신문

그리스-불교는 기원전 4세기와 기원후 5세기 현대 아프가니스탄, 인도, 파키스탄의 영토에 해당하는 박트리아와 인도 아 대륙 사이에서 발전한 그리스주의 문화와 불교의 문화적 혼합주의를 의미한다. 그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서 인도에 그리스인 진출로 시작되고, 인도-그리스 왕국의 설립에 의해 추가로 실시하고 그리스화한 쿠샨 제국의 번영 동안 연장된 상호 작용의 긴 일련의 문화적 결과였다. 그리스-불교는 불교, 특히 대승 불교의 예술과 어쩌면 영적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불교는 후에 궁극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 시베리아, 베트남으로 확산, 기원후 1세기 중앙 및 동북아시아에서 채택되었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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