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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24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5/23 [06:19]
"위대한 성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내 자신에 대해 심도 깊은 ‘주의’를"

통찰! 天問天答 24

"위대한 성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내 자신에 대해 심도 깊은 ‘주의’를"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5/23 [06:19]
통찰! 天問天答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24번 째 천문천답 시리즈부터는 그동안의 문답을 다시 법회록 형식으로 매주 월요일 정리합니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법회록(法會錄) 4

위대한 성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내 자신에 대해 심도 깊은 ‘주의’를 기울이다
천국(天國)과 천당(天堂)은 사후(死後)의 ‘언제 어디’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진리’를 자유롭게 하면 자유로워진 ‘진리’가 모든 것을, 모든 이를 자유롭게 한다
 
보세요.
위대한 성자들은 이 세상이 꿈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 세상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긍정적으로 바라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은 꿈이 아니야, 엄연한 현실이야 라고 말은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항상 고난과 고통과 불행을 부정하고 저항하고, 더 나아가서는 삶의 엄연한 일부로서의 ‘죽음’을 두려움으로 무장하여 저항하고 수용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무의식적 삶’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모순덩어리 같습니다.
끝없이 부정하면서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삶을 살면서도 삶 속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우리가 하는 공부는 말 그대로 신과, 진리와, 이 삶과, 이 현실과 나 자신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제가 누차 말씀 드렸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인류에게 해당되는, 반드시 해당 되어야만 하는 이야기잖아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마음을 가졌고, 누구든지 지적(知的) 지성(知性)을 발현할 수 있는 정신체(精神體)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와 명분(名分)이 있겠지만, 저는 그러한 모든 타당함을 배제한 채, ‘오직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누구일까?’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한 가장 가까운 의제(議題)를 배제한 채,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러한 의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제 삶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서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제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으며, 제 자신에 대해서 심도 깊은 주의(注意)를 기울였으며, 이러함이 제 삶의 전부가 되었어요.
 
항상 ‘그러함’을 명확히 해버렸기 때문에 신과 진리와 이 삶과 이 현실과 내 자신과의 거부 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이해가 저를 불퇴전(不退轉)의 자각중심으로 “항상적 자각”으로 옮겨 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어요.
 
대다수의 수행자이든 신비가이든 종교가들은 신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지만, 과연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로 부정(否定)할 수가 있을까요?
스스로 자신에게 솔직히 묻고, 자신에게 솔직해 진다면, 아무도 신에 대해서 알 수가 없으며 막연할 것이며, 불명확한 단순한 믿음과 불명확한 단순한 불신에 스스로 놀랄지도 모릅니다.
 
신이다 진리다 삶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사람들은 많이 하지만, 얼마나 추상적(抽象的)이며 불명확 한지, 지금 어떤 종교관과 수행관을 통해서 아무리 큰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확신(確信)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신이다 진리다 삶이다 현실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위대한 성자들의 가르침을 소중히 받아들여 내 자신에 대해서 심도 깊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 시켰으며, 내 마음 ‘들여다보는 것’을 천직(天職)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함’으로 인해 제 자신에 대한 이해(理解)가 깊어졌고, 깊어짐에 따라서 ‘현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으며, ‘삶’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진리’에 대해서, ‘신(神)’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나’ 자신과 이 ‘현실’과 이 ‘삶’과 이 ‘진리’와 이 ‘신’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고, 나누어진 적이 없고, 항상 “지금 여기”에서 교차를 하더라는 겁니다.
이러함은 교차를 넘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야기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며 예수님이 이야기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며, 몇 안 되는 선승(禪僧)들이 이야기한 ‘한마음’이며, 어떠한 언어로써도 표현할 수가 없는 오직 ㅡ일체(一體)ㅡ더라는 겁니다. 일체!!
 
그러니 ‘하늘(天)’이 가지는 의미는 ‘땅’과 상반적이고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누어진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한마음’을 가리키며, ‘하나’를 가리키며, 오직 ‘일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天國)과 천당(天堂)은 사후(死後)의 ‘언제 어디’가 아니라, 불국정토(佛國淨土) 또한 입적(入寂) 후의 ‘언제 어디’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단순히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넘어서서 시간의 중심과 공간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물질 무게의 균형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면적 크기의 균형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ㅡ일체ㅡ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추후 보충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매생(每生)마다 자신에 대한 이해를 늘 등한시했기 때문에, 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에 연연해 하며 미래를 꿈꿔 왔고, ‘삶’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삶속의 많은 부분들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신과 진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믿음과 불신 사이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순종(順從)과 복종(服從)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관에 의해서든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의한 학습(學習)을 통해서, 신과 진리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추상적 믿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이들은 추상적 불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추상적 믿음은 결국 복종으로 이어졌고, 그 복종 이면에는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신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다 라는, 다시 말해 복종은 그렇게 진리와 신에게 조차 ㅡ조건ㅡ화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복종은 늘 수동적이고 피동적 정신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순종은 그 어떤 바램도 없기 때문에 기복(祈福)적이지 않고, 능동적일 수가 있어요.
이 부분은 추후 보충 설명 드리겠습니다.  
 
질문: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씀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서 시자(侍子)였던 아난다(아난존자)는 세존께서 입적(入寂)할 때까지도 자신의 공부를 인정치 않고 떠나시자, 마음이 상하여 잠시 도량을 떠나 있던 차에, 수십 년간의 세존의 설법을 결집(結集)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으나, 세존께 금란가사(金襴袈裟)를 물려받은 마하가섭에 의해서 결집 참여를 불허 받자 급기야는 스승에 대한 서운함과 깨달음에 대해 회의(懷疑)가 극에 달했어요.
사형(師兄)인 가섭존자와 담판을 짓는 자리에서 ‘문밖의 찰간대를 꺾어라’라는 말 한마디에 발심(發心)하여 며칠 후에 사형으로부터 인가(見性認可)를 받습니다.
 
사찰의 지붕 한가운데에 찰간대(刹竿臺)가 세워져 있다면 선승(禪僧)이 있음을, 선승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즉, 찰간대가 가리키는 바는 선(禪)을 가리키며, 깨달음을 가리키며 선승, 즉 조사(祖師)를 가리키며 부처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섭이 내린 화두(話頭), 즉 ‘문밖의 찰간대를 꺾어라’가 의미하는 바는 깨달음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 스승은 이러 해야 하고 저러 해야 하고, 부처는 이렇다 저렇다 등등
 
깨달음에 대해서, 스승에 대해서, 조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견해(見解)가 허망하고 부질없으며, 참다운 스승과 참다운 깨달음은 그러한 견해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영향 받지 않음을 가리키며, 그러한 견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가진 편견(偏見)이자 한 생각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예수님이 고단한 하루의 날을 보내고 쉬고 있던 차에 잠이 살짝 들었는데, 옆방에서 제자들의 열띤 논쟁으로 인해 방문이 없던 터라 늦은 밤이었지만 깊이 잠들지 못하고,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논쟁의 주제는 ‘진리’였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열띤 논쟁이 깊어질수록 자신들이 가진 ‘진리’에 대한 견해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어요.
논쟁에 참여한 제자 누구하나 조금도 지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보니 귀엽기까지 했지만, 정작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신들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논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견해와 조금씩 혼합이 되면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이러니 하였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어요.
밤이 깊어 제자들이 지쳐 갈 무렵 스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논쟁 속으로 들어가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먼저 ‘진리’를 자유롭게 하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을 듣고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진리’에 대해서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견해와 편견으로 ‘진리’를 규정하고 정의 내리려고 했다는 것을 역시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정의 내려질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는 ‘진리’라면 어찌 그것이 ‘진리’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견해와 편견이라는 틀 속에 갇힌 ‘진리’가 어찌 우리들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겠어요?
 
수행자로서 깨달음에 대해서, 스승에 대해서, 일말의 견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제가 감히 말씀 드리건대 그것은 오류(誤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먼저 ‘진리’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그렇게 자유로워진 ‘진리’가 모든 것을, 모든 이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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