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실크로드기행⑭실크로드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이치란 | 기사입력 2016/05/24 [08:44]
주류종교·국교 위상에서 박해·쇠퇴로 인한 소수종교·소멸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기행⑭실크로드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주류종교·국교 위상에서 박해·쇠퇴로 인한 소수종교·소멸에 이르기까지

이치란 | 입력 : 2016/05/24 [08:44]
▲ 육로와 해상의 실크로드 지도.     © 매일종교신문
 
주류종교·국교 위상에서 박해·쇠퇴로 인한 소수종교·소멸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선상에서는 무역만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문화전달로서의 종교 또한 이 실크로드를 타고 퍼져 나갔다. 해상 교통이 발달되지 못했던 시대에 육상 실크로드는 종교전달의 통로로서 수많은 종교인들이 넘나들었다. 지금의 이란을 중심으로 일었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가 힌두쿠시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서역을 거쳐서 중국으로 동점(東漸)한 과정, 로마(동로마)에서 전해진 기독교(경교),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이슬람교 등이 어떻게 실크로드를 타고 이동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우리에게 배화교(拜火敎)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18세기에서부터 존재했다고 하는데, 기원후 7세기 이슬람의 등장으로 몰락할 때 까지 이란 전역에서 존재했던 국교 성격의 종교였지만, 지금은 이란에서는 극히 소수의 종교로 전락했고, 대부분은 인도의 뭄바이와 인도 대도시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아베스타어로 자라투스트라란 사람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어(經典語)는 아베스타어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전말은 불투명하지만, 그는 예언자적 성자였음은 확실해 보인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란 남부지역에서 출생했다고는 하지만, 고대 박트리아 지역인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의 어딘가에서 출생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당기간 적어도 천년이상 페르시아 지역에서 주류 종교로서 존재했음을 이 방면의 연구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마즈다교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600년경에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를 통해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고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졌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조신은 아후라 마즈다(Ahura Masda)이다.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神) 아후라 마즈다 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 종교는 악한 생각보다는 선한 생각과 선한 언어와 선한 행위로써 삶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행복을 보장한다고 설교한다. 삶에 대한 이 능동적인 참여는 조로아스터의 자유 의지의 개념에 중심적인 요소이며, 또 조로아스터교는 모든 형태의 수도원 생활을 거부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 마즈다는 궁극적으로 사악 한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즉 아리만(Ahriman)에 승리하게 될 것이며, 승리의 순간, 우주의 혁신을 경험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에게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 소설로서 친근하다. 이 소설은 영원 회귀, 신의 죽음, 위버멘쉬(초인)의 ‘예언’ 등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기원후 3세기 프레스코화법으로 그려진 종교복장을 한 모습으로 현재의 시리아지방에서 발견).     © 매일종교신문

실크로드 시대에 조로아스터교는 서쪽의 그리스 방향으로도 퍼져나갔지만, 동쪽으로도 전파되어 서역은 물론 타림분지의 신장성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신장성 자치주 타림분지에서 발견된 2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로아스터교도의 무덤으로 화덕이 보인다.     © 매일종교신문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은 중기 페르시아어인 아베스타어로 씌어 진《아베스타》이다. 이베스타는 칭찬이란 뜻을 갖고 있는 페르시아어이다. 이 책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동방성서> 시리즈로 일찍이 영역되어 영어권에 알려진 이후,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란 본토에서는 극히 소수 종교로 전락했지만, 이슬람 이전의 이란의 국교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고, 현재도 소수이긴 하지만 이란과 인도에서 강한 결집력을 갖고 명맥을 이오 오고 있다. 한 때는 실크로드 선상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종교의 하나로 존속했지만, 이란 본토에서의 이슬람의 등장,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로 조로아스터교는 미미한 소수종교가 되어버렸다.
 
▲ 이란 중부 지방의 야즈드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배화교사원.     © 매일종교신문

인도의 재벌 타타 그룹의 소유주는 이란 출신으로 조로아스터 교도라고 한다. 나는 뭄바이를 비롯해서 캘커타의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방문했지만, 예배에는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페르시아인(이란) 출신으로 조로아스터 교도가 아니면 예배나 어떤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의 연구는 자유라고 했으며, 3세기에서 7세기의 사이의 사산조 시대의 페르시아 공용어였던 팔레비어로 쓴 것을 팔레비 《젠드아베스타》 라고도 부른다.
 
필자가 왜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느냐 하면, 조로아스터의 주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신성(神性)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신성은 대승불교의 아미타불과 연관성이 있다는 가설 때문이다.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접점으로 대승불교에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한다.
 
▲ 캘커타의 조로아스터교사원     © 매일종교신문

또한 중국에 처음 불교를 전한 승려들이 페르시아 출신 승려들인 점도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주로 파르티아 제국은 기원전 247년에서 기원후 224년 정도 까지 오늘날의 이란 북동부에 해당하는 고대의 지역에서 발흥한 제국이다. 파르티아 제국의 전성기 때에는 이란의 전 지역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뒤덮었을 뿐 아니라, 아울러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이라크, 조지아, 터키 동부, 시리아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 만 해안 지역, 바레인,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방까지 세력권에 넣었을 정도로 막강했다. 이 무렵 조로아스터교가 있었지만, 불교도 받아들였는데, 상당수의 파르티아 승려들이 중국에 진출해서 역경을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안세고(安世高An Shigao148-180CE)이다.
 
▲ 기원 후 200년경의 안식국(Parthian Empire: BC 238-226CE)과 중국의 후한(後漢: 25~220CE).     © 매일종교신문

안세고는 후한(後漢)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역경승(譯經僧)들 중 한 사람으로서 파르티아 제국 (Parthian Empire: 238BC-226CE)의 왕자였으나,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하며, 그는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구사론)》와 선경(禪經)에 정통하였다. 안세고는 148년에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부 40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의 불경 번역은 중국 역경사(譯經史)에서 최초기에 해당한다. 후한시대에 번역된 불교 경전들은 대체로 딱딱하며 세련되지 못하고 난해한데,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들도 그러하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안 알려진 부분이 그레코(그리스)-불교와 파르티아불교이다. 이들 불교는 대승불교 흥기에 직간접의 연관이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부분적으로 그 가능성만을 열어 놓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의 신학 등과의 얽힘에서 어떤 사상적 동기가 부여되지 않았나 하는 관점이다.
 
▲ 조로아스터(배화교) 사원의 성직자가 필자와 포즈를 취해주었다.     © 매일종교신문

마니교는 페르시아 사산왕조(226-651CE)시대에 마니(Mani)에 의해서 이란 지역에서 생긴 종교이다.
 
▲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     © 매일종교신문
 
마니(마네스 216–276CE)는 페르시아의 예언자로 조로아스터교·기독교·불교의 요소가 결합된 고대 후기(2-8CE)의 나스티시즘(영지주의)의 종교로 한 때 크게 융성하였지만 지금은 사멸되어 존재하지 않는 종교이다. 마니의 어머니는 파르티아 제국의 저명한 귀족 가문출신이었다고 한다. 마니는 7권의 저작을 남겼지만 단편만이 존재할 뿐이며, 6권은 시리아의 아람어로 쓰여 졌는데, 7권은 페르시아어로 썼다고 한다. 마니는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바흐람 1세(재위 273-276CE)에 의해 마니교가 박해를 받을 때 감옥에 수감되었고, 276년에 사망했으며, 마니교도들은 마니가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사망하였다고 믿고 묘사하였다고 한다.
 
마니교에서는 선하고 영적인 빛의 세계와 악하고 물질적인 어둠의 세계 간의 투쟁에 대해 설명하는 정교한 우주론을 가르쳤다. 이 우주론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에서는 선과 악 또는 영성과 물질성의 투쟁이 계속하여 발생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선 또는 영성이 그 대립물인 악 또는 물질성을 극복하게 되며 이에 따라 빛(영 또는 영혼의 에센스)이 물질의 세계로부터 점차적으로 사라질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그 자신이 발출되어 나왔던 본래의 원천인 빛의 세계(world of light)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철학적 교리를 갖고 있다.
 
▲ 마니교의 사제들이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타림 분지의 고창에서 발견된 사본의 한 페이지     © 매일종교신문

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융성하는데, 그 절정기에는 가장 널리 퍼진 세계 종교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니교는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마니교 교회와 경전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마니교가 비교적 빨리 사라졌지만 중국 남부에서는 14세기 이후에야 최종적으로 사라질 정도로 한동안 존속했다. 이 무렵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교)인 동방의 교회(Church of the East)가 중국에서 쇠퇴하여 사라진 것과 동시대의 일이다.
 
본래 마니에 의해 시리아 아람어로 저술된 여섯 권의 마니교 경전은 마니교의 전파를 용이하도록 여러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마니교가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마니교의 경전들은 중세 페르시아어·파르티아어·소그드어·토카리아어로 번역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위구르어와 중국어(한문)로 까지 번역되었다. 서쪽으로 전파되면서는 그리스어·콥트어·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마니교의 전파와 흥기는 다른 종교들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졌는데 그 결과 마니교는 기독교· 조로아스터교·이슬람교·불교 문화권에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소재한 초암으로 명교라고 불린 마니교 사원.     © 매일종교신문

마니교는 중국에서 명교(明敎)라고 했는데, 명교(마니교)는 당나라 때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주류 종교로 자리 잡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당 무종의 회창훼불 때 불교와 함께 덤으로 탄압받은 이후 공개적으로는 금지되었다.
 
▲ 마니교의 전파 경로 (기원후 300~500).     © 매일종교신문

명교가 된 마니교는 중국의 문화적 맥락에 빠르게 적응하며 중국화되었고,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살아남아서 민간종교에 다소 영향을 미쳤고 명교 세력은 현대 중국에도 남아 있으며, 복건성의 초암이 그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초암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명교 사원이기도 하다. 마니교는 동쪽과 서쪽 두 방향으로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는데, 마니교가 로마에 전파된 것은 280년에 이루어졌다. 마니교는 290년에는 이집트 지역에서도 번성하였다. 기독교 교황 멜키아데(임기 311~314)가 교황좌에 있던 시기인 312년의 로마에도 마니교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29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박해가 일어나 바흐람 2세(재위 276~293)에 의해 사도 시신(Sisin)이 살해되었고 또한 많은 마니교도들이 학살당하였다. 303년에 기독교를 크게 탄압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는 그 이전의 296년에 마니교를 탄압하는 칙령도 발표, ‘마니교의 지도자들과 주동자들을 최고의 형벌에 처하여 그들의 혐오스러운 경전들과 함께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라는 이 칙령의 결과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마니교 순교자가 발생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387년)고 한다.     © 매일종교신문

《고백록》의 저자 성(聖)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387년에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387년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니교를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한 382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고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언한 391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마니교는 위구르 제국(742~840)의 국교였다. 마니교는 발생 후 10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아프리카,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발칸 반도에서 산발적이고 간헐적으로 유지되었고, 발생지인 페르시아에서는 한때는 크게 융성했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 북부, 중국 서부와 티베트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마니교가 7세기 말에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6세기 후반에 이미 마니교가 중국에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위구르 제국의 칸인 보쿠 테킨(Boku Tekin: 759~780)은 763년에 마니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840년에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약 100년간 마니교는 위구르 제국의 국교로 존재하였다. 동쪽으로, 마니교는 교역로를 따라서 전파되어 당나라(618~907)의 수도인 장안까지 전파되었다. 중국의 송나라와 원나라에서 마니교 전통의 일부가 계속 이어져서 홍건당(홍건의 난 1348년)에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