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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25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5/30 [07:24]
신의 의식으로 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

통찰! 天問天答 25

신의 의식으로 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5/30 [07:24]
통찰! 天問天答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25번 째 천문천답 ‘법회록 5’에서는 신의 의식으로 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논합니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법회록(法會錄) 5
 
무의식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신의 의식으로 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
- 그 무의식을 의식화 시키는 것은 오직 ‘자각’밖에 없다.

 
‘태어남’의 망각 속으로 깊이 들어가,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화 시키면서, 인간정신을 신(神)의 의식으로 까지 성장시키며 성숙을 이어가고 있는 주님들이 있어요.
 
이 우주에는 포괄적 일곱 지성(知性)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그렇게 신의 의식, 자리로 까지 나아간 주(主)님들이 있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든 지성이 비존재(非存在)를 넘어 ‘하나’의 태생지로부터, 같은 한 자리로부터 나왔지만 그렇게 나아간 분들이 있어요.
 
물론 제가 이야기 하는 주님들은 종교관에서 이야기 하는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망각’을 거쳐서 무한히 많은 인간정신으로 화(化)한 우리들 중의 한 분들로서 ‘자각’하므로 주권(主權)을 찾아 가는, 찾은 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포괄적 일곱 지성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공유(共有)해서 자신에게 적용시켜 체화가 되면 그 주님들이 나아간 길을 ‘선택’하여 갈 수가 있어요. 그러지 않고는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윤회’(輪廻)라는 무의식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오늘밤에 주무시면서 ‘나는 오늘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위대한 성자가 되는 꿈을 꿔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서 성자가 되어 보는 꿈을 꾸겠어요?
그냥 그런 노력과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꿈을 꿀 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꿈’을 꾸잖아요. 한 분 예외 없이 무의식적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선택’의 주권(主權)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먹기’라고 하는,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말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정신의 위대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가장 두드러진 측면이 ‘마음먹은 대로’ 이며 그러함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루어질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불확정적인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 대한 ‘망각’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누구이다, 무엇이다’라는 자기규정으로 인해 스스로 ‘태생적 한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추후 보충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의 의식으로 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이 이렇듯 무의식적으로 ‘잠’을 자고 있으며, 잠 속에서 반드시 깨어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망각’ ‘태생적 한계’, 즉 무의식을 의식화 시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자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이를 도외시 하고 ‘수행이다 방편이다’를 좇으며 유위(有爲)한 모든 것을 이어 간다면 이는 마치 ‘방안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마당에서 찾는 격’이며, ‘기왓장을 갈고 앉아 거울을 만들어 보겠다는 격’인 것입니다.
 
질문: 진경(眞鏡)님의 그 ‘불퇴전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너무 거창하게 말씀 마세요. 저에게는 불퇴전의 확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일말의 믿음도 없습니다. 단지 그냥 그것이 너무나 당연할 뿐입니다.
 
유심히 따져 보면 바람이 불 때, 태풍이 불 때 나뭇잎이 날리고 창문이 덜컹거리고 먼지가 일지만, 이런 것들은 바람이 일으키는 ‘작용’에 불과합니다.
어느 누구도 단 한 번도 바람의 실체를 본적이 없지만 이러한 ‘작용’을 유발하는 바람의 실재함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잖아요. ‘불퇴전의 확신’같은 거창한 무엇이 없어도 말이지요. 그와 같이 ‘진리’는 제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더불어서 저는 저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으며 어떤 일말의 신뢰조차도 없어요.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도 어떤 일말의 신뢰조차도 없습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신뢰한다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저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유는 저는 저를 불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단지 불신하지만 않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유 또한 다른 사람을 불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단지 불신하지만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큰 이유는 ‘나로부터 다른 이’ ‘다른 이로부터 나’는 ‘무엇이다, 누구이다’의 범주이기 때문에, ‘항상적 자각’ 속에서 일체인 ‘나’는 어떤 분리도 어떤 이원(二元)도 아니기 때문에, 부정적인 믿음과 부정적인 신뢰가 필요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자각’할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삶에 그 어느 것보다 깊은 감사함이 일어난다면, 단지 ‘존재함’만으로도 지복(至福)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신이자 진리’와의 조우가 일어날 것이며, 합일로 인해 신과 진리가 가진 모든 것(전지전능, 무소부재)을 승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신과 진리는 자신으로서 너무나 ‘당연함’이 될 것이며 이해도 믿음도 그 어떤 신뢰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들에게 있어 가장 안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창조주와 창조물의 분리의식이 심층(深層) 깊이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관에 의한 영향일 수도 있지만 최종적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함 때문입니다.
 
죽으면 천당을 갈 것이라는 종교인에게 왜 가려고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그곳에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주 하느님은 하늘에 있고, 피조물은 땅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거예요.
 
한번 보세요.
이 허공을 ‘진리’라고 본다면 과연 어떤 사물과 사건들이 이 허공을 벗어나 존재할 수가 있으며, 벌어질 수가 있겠어요? 마치 이 허공이 모든 사물과 사건이 일어날 수가 있는 배경 역할을 하듯이 ‘진리’의 그 무소부재 함은 허공조차 비교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 창조주와 창조물은 실재적으로 한 번도 따로 떨어진 적이 없는 거예요.
더욱이 창조주는 창조물에 가장 깊이 관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모든 것이 창조주의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생각’을 만들면 그 ‘생각’이 나를 벗어날 수가 없듯이요.
 
자 보세요.
제가 3차원적인 관점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부분을 설명해 볼 테니 이미지화(visualization)시켜 보세요.
 
무한을 지향하며 팽창하는 우주는 분명히 안과 밖이 있어요. 왜냐하면 팽창한다는 그 자체가 유한(有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과 밖의 그 경계지점은 팽창하는 우주의 관점에서 우주의 ‘끝’이잖아요.
이게 3차원적 이미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안과 밖이 있는 유한한 우주이지만 ‘끝’이 없는 거예요. 이해 가세요?
 
안과 밖의 그 경계지점을 공간의 ‘끝’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 끝은 무언가 공간적인 무엇이 있어야 하며, 사건이 유발될 수가 있는 시간적 공간적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 있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간조차도 없어요. 공간조차 ‘있음’으로 볼 때, 이 고요와 정적은 ‘있음’도 아니요, 또한 ‘없음’도 아닙니다. 오직 고요와 정적!
 
이 영역으로부터 불안정한 시간적 공간적 에너지 흐름이 일어나고, 전체 테두리를 끌어당기면서 마치 실을 풀어내어주는 것처럼 팽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정한 에너지 흐름은 이내 곧 안정을 찾으며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시간적 공간적 차원으로 형성되며 그렇게 쉬지 않고 팽창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3차원적 관점으로는 유한적인 우주는 ‘끝’이 있어야 하지만, ‘끝’이 없음으로 해서 유한적인 우주조차도 무한을 지향하며 무한히 팽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고요와 정적의 영역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 영역으로부터 인간정신, 즉 ‘자각’이 떨어져 나왔으며, 그 이유는 창조된 우주에 대한 ‘경험’이었으며, 보다 심화된 경험을 위해 떨어져 나올 때의 충격파를 이용하여 스스로 신의 의식인 ‘자각’을 ‘망각’으로, 즉 경험의 기억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하나의 영혼으로 화신(化身)하게 되었고, ‘망각’으로 인한 무지(無知)로 인해 자기 자신을 하나의 ‘피조물’, 즉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급기야 만들어진 것은 ‘결과’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결과’를 유발하는 어떤 ‘원인’에 대해서 ‘창조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망각’으로 인해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가 규정되었고,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론 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식하에서 시간조차도 과거로 인한 현재이며, 현재로 인한 미래로, 즉 과거는 원인이며, 과거로 인한 현재는 결과이며, 현재로 인한 미래는 다가올 결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 과거 현재 미래, 창조주와 피조물은 실재적 측면의 ‘무엇’이 아니라, 결국은 ‘자각의 부재’ 즉 ‘망각’으로 인한 ‘무지’에 따른 ‘분리의식’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측면으로요.
 
따라서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닌 이 고요와 정적의 영역은 에너지가 흐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사건적 측면의 원인과 결과가 없으며, 당연히 과거 현재 미래로 대변되는 시간도 없으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영역이 없다면, 다시 말해 그 영역이 있음으로 해서 이 유한적 우주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무한을 지향하며, 무한을 향해 팽창해 나아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 영역에 의해 ‘끝’이 없으며, 즉 유한의 경계가 사라졌고, 그 경계가 사라짐으로 해서 유한적 우주가 무한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영역’은 무한에 대한 잠재력(潛在力)이자 가능성(可能性)이며 유한에 대한 초월성(超越性)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각’은 ‘끝’이 없으며, 그로인해 모든 경계가 사라질 것이며, 무한(無限)에 대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내포하여, 상대적이고 이원(二元)적인 유한적 모든 것을 초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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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한별 2016/06/04 [09:49]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_()_
  • 어느새 2016/06/04 [08:21] 수정 | 삭제
  • 어느새 25회나 되었네요~
    옆을 돌아다 보지 않는.. 오로지 근본만 이야기하는
    담선공부가 제대로 빛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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