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㉟ 소아씨 백년 권세 몰락, 신라계 팽창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기사입력 2016/06/17 [22:09]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㉟ 소아씨 백년 권세 몰락, 신라계 팽창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입력 : 2016/06/17 [22:09]
왕 참칭 극에 달한 蘇我氏 가문의 권력 남용
분개한 中臣氏 왕실과 접근, 제거 기회 노려

 
황극여왕 때에 신라, 고구려, 백제와 일본 내에 큰 정치적 정세변화가 있게 된다. 즉, 1백여 년간의 소아씨 세력의 몰락이 이 황극조에서 벌어진다.
 
소아씨의 몰락은 소아마자(蘇我馬子)의 손자인 소아 창산전 마려(蘇我 倉山田 麻呂: 소가노 구라야마다 노마로)가 그의 딸을 왕자의 비(妃)로 들여보내면서 움 터기 시작했다.
 
황극 3년에 이르러 소아씨 가문의 권세는 극에 달했다. 소아하이(蘇我 蝦夷: 소가노 에미시) 대신의 아들 소아 입록(蘇我 入鹿: 소가노 이루까)은 자기 아버지와 자기네 집 두 채를 짓는데 아버지 대신의 집 대문은 궁문(宮門)이라 하고, 자기 집 대문을 곡문궁(谷門宮)이라 칭하게 했다. 또 자기의 남자 아이들을 왕자라 부르게 하고, 저택 주변에는 못을 파고, 성을 쌓고, 문 가까운 곳에 무기고를 설치했다. 문 마다 성수주(盛水舟) 한척씩을 두고, 화재에 대비하여 수 십 개의 갈구리를 비치했으며 항상 역사(力士)와 수비병을 두어 경비를 엄하게 했다. 대단수산(大丹穗 山; 오호니호 야마)에다 우삭사(杅削寺)를 짓고, 다시 집을 묘방산(畝傍山)의 동쪽에 지었다. 창고를 만들어 화살을 저장하고 항상 5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출입했다. 이들을 건인(健人)이라했다.
이처럼 소아씨의 권세는 왕을 잠칭 하는 행세로까지 나아 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소아씨의 지나친 권세에 반기를 든 중신씨(中臣氏: 나까또 미우지)가 소아씨 세력을 제거하는 정세변화가 일어난다.
 
소아입록과 그 일파의 무분별한 권세 남용에 분개한 그는 왕실과 가까이 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는 대륙의 정세에도 변화가 생긴다.
 
황극 4년 4월 당나라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또한 이에 신라가 상대적으로 힘을 얻어 이해 2월 이일본(裡日本) 포괘수문(捕掛水門: 오늘날의 무학<舞鶴>지방)을 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일본에 대한 백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게 됐다.
 
이에 힘을 얻은 왜 왕조내의 중신씨 등 반백제 세력이 궐기하여 소아씨 세력을 제거하고 만다.
 
신라계 팽창, 가문내 배신 소아씨 백년 권세 몰락
 
이는 소아씨 가문 중 창산전 마려(倉山田 麻呂:구라야마다 노마로)의 배반으로 백년 소아씨 가문의 권세는 무너지는 것이다. 소아씨 가운데 유독 창산전 마려만이 딸을 왕비로 보낸 관계로 소아하이와 소아입록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된다.
 
즉, 중신 겸자연(中臣 鎌子連: 나까 또미노 가마꼬)을 비롯한 신라계와 장차 왕권을 확립하려는 왕자가 합세하여 소아씨의 극에 달한 권력을 이용하려는 동시에 이를 약화시키려는 함정을 파 놓는다. 이것이 곧 정략결혼이다. 창산전 마려는 이들의 함정에 빠져 딸을 왕비로 보낸다. 딸을 왕비로 보낸 것은 정략에 이용당한 셈이다.
 
황극 4년 6월 전승국인 신라가 왜왕에게 국서를 보낸다. 전승국으로서 왜 왕조에게 무엇인가 요구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이 미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중대형왕자(中大兄王子: 나까노오네에 오우지)가 이 국서 전달식장에서 소아입록(蘇我 入鹿: 소가누 이루까)을 타살하자는 계획을 말하자 이에 창산전 마려가 찬동하고 가담한다.
 
소아입록은 의심이 많아 밤낮으로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중신 겸자연(中臣 鎌子連)이 이를 먼저 알고 국서를 읽는 장소에 허리에 찬 칼을 풀고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 다음 일시에 12개의 통문(通門)을 굳게 닫아 소아입록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다.
 
창산전 마려가 국서를 읽자 이때 활과 긴 창과 칼로써 입록의 머리와 어깨와 다리를 쳐서 죽였다. 이때가 서기 645년 6월12일이었다. 다음날 13일엔 소아 입록의 부친 소아하이(蘇我蝦夷) 마저 주살 당한다. 이때 사서문헌인 『천황기(天皇記)』, 『국기(國記)』, 『진보(珍寶)』를 모조리 불사른다. 선사 혜척(船史 惠尺)이 재빨리 불타는 『국기』를 끄집어내어 중대형 왕자(中大兄 王子)에게 바쳤다.
 
하마터면 멸실 당 할 뻔 한이 『국기』가 간신히 보존케 됐는데 이것은 이로부터 20년 후 천지왕의 백제계 중심 사서 편찬에 기본 자료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1백 년 간의 소아씨 가의 세도정치는 몰락하고 말았다.
 
창산전 마려와 소아입록은 다 같은 백제목씨계 소아씨 후손으로 4촌간이며, 백제계 왕실과 특별히 가깝고, 왕자의 도움을 받았던 중신 겸자(中臣 鎌子)는 알고 보면 대화(大和: 야마도)지방 출신으로 신라계이다.
 
2백 년 전 신라 계 윤공왕이 같은 신라계 애희(愛姬) 의통랑(衣通娘)을 위해 등원부(藤原部: 후지와라베)를 설치한 그 등원부의 후손이므로 분명한 신라계이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