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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31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6/23 [07:46]
참다운 ‘깨달음’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통찰! 天問天答 31

참다운 ‘깨달음’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6/23 [07:46]
통찰! 天問天答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참다운 ‘깨달음’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질문 44:
과거의 노력이 현재의 원인이 되고, 현재의 노력이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과거와 상관없는 현재, 현재와 상관없는 미래가 펼쳐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런 것인가요?

 
원래 정신체(精神體)로서 우리는 ‘한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든 규정하고 무엇이든 될 수가 있는 위대한 ‘정신(精神)’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어떤 구속과 속박상태에서도 불변(不變)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위대한 자성(自性)으로 인해 삶을 사는데 있어서, 또는 경험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욱더 구속적인 상황, 즉 물질경험을 심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자성을 ‘망각’하고, 스스로 스스로를 규정하여 한계를 가지고 제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무엇이든 발현(發現)시킬 수가 있는 근본 질료(質料)로서의 의식(意識)의 파동(波動)이 느려졌고, 느려진 파동으로 인해 발현되고 물현화(物現化)되는 과정에서 시간의 저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결국 ‘망각’으로 인해 모든 ‘일어남과 이루어짐’을 ‘시간’적으로 받아들이고 ‘시간’적으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과거의 노력을 현재를 이루는 원인(原因)으로 현재를 하나의 결과(結果)로 보고, 그 성취정도를 따져 다가올 결과, 즉 미래를 위해 ‘이러하고 저러하고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사회적 통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러한 통념은 삶의 전반을 좌지우지 하는 것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수행자이든 비수행자이든지 ‘노력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만큼 ‘모든 이’를 꿈꾸게 하는 사회적 통념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심도 깊게 다뤄 보겠습니다.
 
원래는 그렇게 노력할 필요 없이 자기가 수용하고, 생각 하나 바꾸고, 무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다 펼쳐지게 돼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되게 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런 자성(自性)으로서 말이지요.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고 한다면 얼마나 불합리(不合理)합니까?
우리에게 과거가 이번 생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전생(前生)이라는 과거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생이 있으므로 해서 전생의 전생 또한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생(生)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과거가 현재를 결정짓는다면 얼마나 불합리 하겠어요? 이해 가세요?
 
‘과거에 의해서 현재가 결정된다’는 논리가 합당하다면 미래에 대해서도 노력할 필요가 있나요? 알지도 못하는 전생이, 또 그 전생의 전생이 다 결정짓는데요.
이와 같이 무의식적 측면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결정짓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 보세요.
이 삶은 고(苦)가 아니라 축복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무의식적인 측면이고 무의식적인 측면은 어느 것 하나 깊이 들여다보면 모순이 있기 마련입니다.
 
 
질문 45:
그렇다면 ‘깨달음’도 노력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자, 보세요.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보다 큰 깨달음, 보다 신비롭고 특이한 어떤 영적인 경험, 이런 걸 두고 ‘어떤 결과다, 어떤 목표다, 어떤 목적이다’라고 보자고요.
 
참다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역동적(力動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역동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가 있고, 인지할 수 있는 지점은 ‘여기’이며, 인지할 수가 있는 때는 또한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즉, 드러난 모든 것은 ‘진리’의 반영(反影)이며, 반영즉시(反影卽時)에 가장 역동성을 인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깨달음’은 목표나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가장 역동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즉 과정이 곧 목적이자 목표인 것이며, 따라서 ‘지금 여기’는 참다운 ‘깨달음’과 참다운 ‘진리’의 역동성이 반영된 깨달음과 진리의 증언장(證言場)인 것입니다.
물론 드러날 모든 것 또한 ‘진리’의 잠재된 반영태(反影態)지만, 역동적 생명이 아직 가미(加味)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추후에 조금 더 심도 깊게 다뤄 보겠습니다.
 
따라서 참다운 ‘깨달음’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러 한 일련의 모든 행위와 현상 이전(以前)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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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한별 2016/08/06 [12:26]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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