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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41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6/08/15 [22:43]
‘대 자유’는 ‘관점의 자유’ 아닌 ‘관점으로 부터의 자유’

통찰! 天問天答 41

‘대 자유’는 ‘관점의 자유’ 아닌 ‘관점으로 부터의 자유’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6/08/15 [22:43]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이정표(里程標)3
‘대 자유’는 ‘관점의 자유’ 아닌 ‘관점으로 부터의 자유’

 
‘대 자유’라는 것은 ‘관점으로 부터의 자유’인거지 ‘관점의 자유’가 아닙니다.
 
단언컨대 그 어떤 수행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식하고, 수행자들이 인식하는 이 세상은 꿈과 같고, 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통해서는 절대 깨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일련의 행위가 꿈속의 꿈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우리의 ‘육체와 생각’보다도 더 가까이 있습니다. 진실과 자기 자신 사이에 어떤 일말의 간격도 없기 때문에 진실에 이르기 위한 어떠한 길도 어떠한 방향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못된 길도 없고, 그릇된 방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실수를 범한다 할지라도 배움이 일어나게 되면 되풀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는 것은 배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 있고요.
수행자들이 공부에 있어 흔히 하는 오류가, 경전이나 성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길을 찾고 방향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전이나 성현들의 가르침은 길과 방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길이며 방향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현들의 가르침과 자신은 늘 평행선(平行線)을 달리는 형국입니다.
 
규정 되어진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규정하는 내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규정되어진 어떠한, 설사 그것이 신 하느님 절대자라 할지라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특정한 ‘무엇’으로 규정될 수가 없는 이유는, 무엇이든 규정을 하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 부터도 속박될 수 없고 영향받을 수 없고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또한 얻어야 할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나’입니다. 무조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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