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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민주화투쟁 故 박형규 목사, 조문 잇따르며 조명 활발

매일종교 뉴스1팀 | 기사입력 2016/08/21 [14:09]
“진정한 보수적 신앙으로 진보적 신학 기장 소속의 사회선교 활동”

평생 민주화투쟁 故 박형규 목사, 조문 잇따르며 조명 활발

“진정한 보수적 신앙으로 진보적 신학 기장 소속의 사회선교 활동”

매일종교 뉴스1팀 | 입력 : 2016/08/21 [14:09]

지난 18일 향년 94세로 소천해 22일 오전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발인예배를 하게 될 박형규(사진) 목사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정계, 교계 지도자들의 조문이 잇따르는 가운데 평생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그의 생애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23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한 박형규 목사는 부산대 철학과를 다니다 6·25 전쟁으로 중퇴한 후 일본 도쿄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59년 서울 공덕교회 부목사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4.19 시위를 우연히 목격하면서 사회에 큰 관심이 없던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행로를 가게 된다.
 
당시 30대였던 박 목사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다가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피를 흘리는 학생들에게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예수'를 본 그는 이때부터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구원을 목적으로 삼게 된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정권과 싸운다는 것은 인생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아짐을 의미한다.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박 목사는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2월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3.1 민주선언, 같은 해의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 시위 사건 등으로 6차례나 옥살이를 한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뼈아픈 시련은 목사로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받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깡패를 동원해 교회 예배를 방해했음에도 그와 신도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박형규 목사는 교회 근처에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서울 중부경찰서 앞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행진을 6년간이나 한다. 그렇게 경찰서 앞에서 노상예배를 열어 '길위의 신학자'라는 별칭을 얻게 된 박목사는 그후에도 역사와 민중 속에서 실천하는 목사로서 험난하지만 뜨거운 인생을 살았다.
 
이어 1978년 2월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새 민주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3.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가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모두 6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박 목사는 노상예배를 드리면서 저항을 이어가는 등 평생 민주화운동과 함께 한 삶을 살았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 '해방을 향한 순례', '파수꾼의 함성', '행동하는 신학 실천하는 신앙인',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등이 있다.
 
박 목사는 사회선교에 적극적이었고 진보적 신학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이지만 사실 어머니로부터 보수적인 신앙을 물려받았다. 전병금 원로목사는 “박 목사는 예장고신보다도 더 보수적인 재건파 출신이지만 당시 진보적인 학교였던 동경신학대학(옛 일본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예장고신도 재건파도 받아주지 않았는데, 강원용 목사를 만나 기장 교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 목사는 “진정한 보수적 신앙으로 한국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며 예수의 제자로서 바른 길을 걸어오신 것”이라면서 “그의 신앙을 본받아 역사를 바라보며 시대의 예언자의 길을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손인웅 원로목사(실천신학대학교대학원 총장)는 “박형규 목사를 한국교회의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서 상징적 인물”이라고 말하며 “기독학생회(KSCF)에서 활동할 때 박목사님이 총무를 맡으면서 계속 지도해주셨고 그 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영주 총무는 “박목사님의 사회선교 역할은 청년이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면서 “우리시대의 예언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을 참 잘 감당했던 분”이고 말했다. 이어 “목사가 시대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건, 고난과 고통을 짊어진다는 건데, 박 목사님은 의 을 보면서 ‘진정한 목사의 삶이 저런 것이구나’를 깨달았다”며, 박 목사를 따라 젊은 목회자들이 사회선교를 뒤따랐다고 추모했다.
 
대한성공회 김근상 주교는 1987년 6.10 항쟁 당시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분이 계시다는 것, 자리에 함께 하시다는 것 자체가 우리로서는 위로고 기쁨이고 격려였다”면서, “옥고의 힘든 순간에도 담담하고 아픔을 웃음으로 극복하는 모습에서 성직자로서 닮고 싶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노동운동 빈민운동에 함께 했던 인명진 목사는 “박 목사야 말로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으로 예수를 따랐던 바보였다” 고 말한다.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거나 챙겨본 적 없이 ‘옳은 일이다’ ‘목사님이 나서야 한다’ 하면 사양하지 않고 나섰다”며 박 목사를 회상했다. 특히 “감옥을 6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민주화에 앞장섰지만, 여러 민주화 인사들과 달리 정치적 자리나 위치를 욕심내지 않고, 예수님이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길 위에있었다”면서 “바보처럼 산 그 삶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손학규 전 의원은 박형규 목사를 만나면서 신앙도 갖고, 세례도 받았다. 박 목사의 주례로 결혼도 했다. 빈민선교에 손 전 의원을 끌어들이고, 수도권 특수지역선교회 총무, NCCK 간사, 기독교사회연구원 원장 등을 맡긴 것 역시 박형규 목사였다. 손 전 의원은 이 스승을 “거침없고 구김없는 자유인”이었다면서 “70년대 민중신학이 발전하는데, 박형규 목사님은 실제 활동가로서 민중신학 실천에 앞장선 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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