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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49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9/14 [12:12]
자각의 심화와 집착의 단절

통찰! 天問天答 49

자각의 심화와 집착의 단절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9/14 [12:12]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자각의 심화와 집착의 단절
 
질문 67:자기 자신이 진리이자 근본(根本)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각’을 심화 시킨다면 모든 앎, 즉 총체적 앎을 만들어 내는 그 자리까지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모든 지성(知性)의 어버이이자 자신이며, 모든 이의 자신이며,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진리’일 수밖에 없고, ‘근본’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만들면 앎이 되어 버리고, 그 앎대로 그 이치대로 드러나고 펼쳐지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자리는 어떤 앎도, 어떤 이치도 어떤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들이 무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무얼 안다고 말하고, 앎에 집착하고, 앎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나, 단지 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의 최종점은, 어떠한 앎도 어떠한 이치도 어떠한 무엇도 없는 ‘아무것도 아님’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먹기이다’라는 사실을 누구든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알 수가 있는 이유는 ‘누구든지’의 내면에 ‘진리’에 이르는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가장 보편적(普遍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이르는 문(門)은 무한(無限)하나 최종점은 ‘하나 임’의 진리입니다. 

자, 이제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 입각해서,

나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물질에 귀속되어 물질의 꿈을 꾸지 않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단지 꿈일 뿐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어떤 여한도 어떤 아쉬움도 갖지 않겠다,

어떠한 대가를 치를지라도 나는 반드시 깨어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겁니다. 

누가 자기를 대신하여 꿈을 꾸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꿈을 꾸게 해주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계속 무의식적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 집착의 꿈을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쉬워요. 아~ 나는 더 이상 물질적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겠다, 더 이상 어떤 것에도 미련을 갖지 않고 집착하지 않겠다, 내 마음먹기에 달렸잖아요! 

오늘 이 하루 만에도 자연재해든지 교통사고든지 생로병사든지 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수동적으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죽임을 당했을 때, 자기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斷切)되어 지잖아요. 

즉, 죽고 나서는 어떤 집착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죽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자기 스스로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의식적인 죽음’을 받아들여 보세요.
  
 
질문 68:집착하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까?
 
비단 수행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 즉 ‘나는 누구이다’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잠을 잘 때 꿈을 꾸고, 그 꿈속에는 ‘나는 누구이다’가 주인공으로서 있습니다.
 
그런데 꿈이 깨어져 버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의 ‘나는 누구이다’는 반드시 사라져 버립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말이지요.
 
그와 같이 ‘지금의 나’가 자기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자기는 지금 무의식 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자기 자신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와 관련된, 연관 지어진 그 모든 것에 집착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꿈은 반드시 깨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꿈이 깨어지면 그에 따라 모든 것이 흔적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집착’은 어떤 명분이라 할지라도 비정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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