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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51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9/22 [09:05]
수용과 포용은 딜레마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順理

통찰! 天問天答 51

수용과 포용은 딜레마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順理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9/22 [09:05]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수용과 포용은 딜레마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順理
 
질문 71: 모든 상황에 대해서 수용을 한다고 하는 것은 ‘내맡김’을 의미하나요?

 
드러난 모든 것은, 드러나기 이전에 먼저 진리의 수용(受容)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드러나고 작용되어지는 모든 사물과 사건들은, 결국 옳다 그르다 이전에, 선과 악조차도,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진리의 허용과 수용이 있었습니다.
 
즉, 진리가 허용하지 않고 수용하지 않으면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작용되어 지겠습니까?
 
모든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물질적 꿈을 꾸고 있으며, 꿈속에서 ‘지금의 나’에 깊이 심취하여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망각하여 자기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내맡김’은 ‘지금의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맡김’의 목적은 없습니다. ‘내맡김’의 결과 또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적과 결과는 ‘지금의 나’가 가진 추측이자 상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상황에 대해서 ‘수용하는 척’할 수는 있어도, ‘지금의 나’로서의 수용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나의 수용과 허용으로 인해 모든 것이 드러났으며, ‘지금의 나’ 또한 그러하니 말입니다.
 
즉, 드러난 모든 것 자체로 이미 나의 ‘허용과 수용’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허용과 수용’은 불멸이지만, ‘내맡김’은 의식적인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72: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용과 포용만큼 쉬운 일이 없습니다. 물론 수용하는 척하는 것이 힘들고, 포용하는 척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압니다.
 
자, 보세요.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기준이 있고 잣대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준과 잣대에 부합(符合)하는 상황은 수용하는 척하는 것이며, 기준과 잣대에 어긋나는 상황은 수용하는 척, 애를 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살아오면서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많은 상황과 사건의 연속이었으며, 그 연속되는 사건들 속에서 항상 수용과 포용의 문제를 안고 수용하는 척하며, 때로는 수용하는 척,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힘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용과 포용은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딜레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상황은 ‘나’의 수용과 포용이 먼저 있고서야 드러나고 나타났다는 분명한 사실을 자각해보세요.
 
수용과 포용은 딜레마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순리(順理)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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