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성경의 하나님, 현실의 하나님

이옥용 | 기사입력 2016/09/23 [22:13]
“조물주는 신, 추앙의 대상, 인간의 주인도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 현실의 하나님

“조물주는 신, 추앙의 대상, 인간의 주인도 아니다”

이옥용 | 입력 : 2016/09/23 [22:13]
▲ 요단강물에 손을 담고 있는 필자     © 매일종교신문
 
“조물주는 신, 추앙의 대상, 인간의 주인도 아니다”
 
얼마 전 평소 존경하던 원로종교지도자 한 분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몽매한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말들을 하였습니다. 종교의 현실을 걱정하다가 ‘성경의 하나님과 현실의 하나님은 다르다’며 심중의 말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다. 조물주는 따로 있다. 우리의 신앙은 미신(迷信)이나 다름없다”는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저의 신앙의 탑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충격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대화내용을 정리하여 여기에 옮깁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교가 있다. 인류 대다수가 종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도 수를 기준으로 하면 기독교(33%), 이슬람교(21%), 힌두교(14%), 불교(6%), 유교(6%) 순이다. 불교와 유교는 믿는 신이 없고, 힌두교는 여러 신을 믿는다. 반면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는 하나님(여호와 :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세계 종교인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사 44:6)를 유일창조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유일창조신으로 우뚝 서 있다. 비 종교인도 창조주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에 큰 영향을 주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를 위해 지었다’
 
이스라엘민족의 신에서 인류의 신이 된 하나님은 스스로 ‘나는 인간과 천지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이고(창1:1), 전능자이며(창 17:1), 유일신이다(신 32:39)’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이러한 신념은 확고하다. 구약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다(사 44:6), 인간의 아버지, 인간의 지도자는 하나님 뿐(마 23:9)이고,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으니(신 32:39),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있게 말라(출 20:4),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 20:7)”고 명령한다. “다른 신에게 희생 드리는 자를 멸하라”(출 22:20)는 구절도 있다.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의 배역을 질타한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마귀)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사 40:25),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하나님은 성경에 인간과 만물은 자신을 위해 지었음을 공표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은 창조를 마친 후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기쁨을 나타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목적을 잃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지배욕은 대단하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도 한다(창 22:2).
 
반대자 ‘말살’하는 하나님
 
종교경전이나 전설 속에는 마술이나 환상적인 기적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자답게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말로 만물을 창조하고, 물로 지구를 덮어 모든 생명체를 죽이고, 바다를 갈랐다가 합쳐놓으며, 타락한 도시들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고, 애급민족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며, 고함을 지르게 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등의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성경 속의 하나님은 이처럼 전지전능하다. 그러나 경외심보다는 전율이 일어난다. 인류는 하나님의 이런 기적은 성경 속에서만 행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지구는 멸망하고 만다. 이런 기적들은 비유나 상징이다거나, 혹은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격려말씀이라고 치부(置簿)하더라도 무엇이 진리인지 난감해진다.
 
‘하나님이 조물주일까’ 하는 의구심은 더욱 심화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 자신이 창조했다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 6:6~7)고 분노하며, 40일간의 홍수로 노아와 그 가족과 방주에 들어온 동물만을 살리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멸했다. 하나님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스라엘백성에게 가나안 7족의 노약자와 어린아이는 물론 동물들까지 멸하라는 천인공노할 학살을 지시한 것이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민 31:18),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신 20:16~17),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삼상 15:1-3).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리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멸하였다(수 6:20~21). 하나님을 반대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나님의 도(度) 넘은 인간 지배욕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는 성경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만 통용되는 논리이다. 비신자들은 어느 신화와 다르게 보지 않는다. 성경의 기적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사실이라면, 창조주 스스로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권력남용이자,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설혹 ‘창조자ㆍ전능자ㆍ유일신 하나님이 일으킨 기적이나 살육 등은 인간의 머리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독재자요, 살인자라는 이미지는 지울 수가 없다.
 
성경속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자기 품안에 넣고 유일신ㆍ창조주로 군림하면서 추앙받으며 기쁨을 누리고자 몸부림친다.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광분하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 편협하고, 포악한 독재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대교는 선민의식으로 자신들만이 구원의 대상이며, 다른 민족은 이방인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우상숭배금지와 예수십자가 대속을 강조한다. 이슬람교는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와 개종을 가장 큰 범죄로 여기고 있다. 이들 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 하나님의 판박이다. 다른 종교의 신과 신앙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다.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지만, 그 사랑은 그들의 진영(陣營)에 합당해야하니, 지극히 제한적이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하나님과 구약성경에 반발하여 ‘하나님은 유대민족의 신’이라고 평가절하하고, ‘구약성경의 폐기’를 주장한 바 있다. 그는 “구약성경을 믿는 것은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없다”고 힐난했다.
 
자존하는 인간과 동식물
 
하나님이 ‘무엇이 되라’고 하면 그것이 금방 뚝딱 되어져 나온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요술쟁이 하나님이다. 세상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차가운 물을 끓게 하려면 그만큼 열이 가해져야 한다. 창조주라는 하나님이 이런 순리와 법도를 무시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ㆍ유일신일까. 현실을 보면 그것은 단지 성경의 이야기일 뿐이다. 성경에서 온갖 기적을 일으키며 자신을 믿지 않은 자들을 도륙하던 하나님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1세기 정보화시대에도 하나님이 성경에서처럼 역사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인간은 자존하고, 인간이 세상을 다스린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잘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법이라는 통제장치를 만들어 놓고 이를 준수하지 않는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 인간의 생과 사, 행복과 불행은 모두 인간이 만든다. 동식물 또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자존하고 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경쟁을 벌이는 야생동물들은 잡아먹고,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포식자인 동물은 사냥할 때 뛰어난 감각기관을 사용한다. 예민한 후각, 뛰어난 시각, 적외선 감지기관이나 진화된 부리, 길게 발달한 혀를 이용해 사냥한다. 반면 피식자는 경고색이나 보호색, 의태(擬態), 화학물질 분사, 눈에서 피를 뿜어내는 등의 방어 전략을 쓴다.
 
식물은 휘발성 물질을 포함해 2만 가지가 넘는 다양한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화학 공장이다. 카페인·니코틴·캡사이신 등은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물질이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자신을 먹는 동물에게서 도망칠 수 없지만, 이런 물질들을 사용해서 생존을 위해 초식동물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조물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마음과 같은 존재다. 마음은 욕망을 애타게 추구할 뿐이다. 신에게 몸이 있는 인간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은 신의 예속물이 아니다. 신은 인간의 고통을 모른다. 신과 통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좋지 않다. 대부분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거나 사기꾼이 되거나 폐인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교주(敎主)들이다.
 
신과 교류하는 사람도 눈으로 신을 보지 못한다. 그 정체 또한 알 길이 없다. 단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절대적인 믿음을 보일 뿐이다. 신은 ‘말[言]’로 인간을 주관한다. 성경에서처럼 말로 다 한다. 인간의 환심을 사려는 수단이다. 신은 자신이 인간과 세상의 주인 되는 것이 목적이다. 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의존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신은 인간에게 지시만 할 뿐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다. 아니, 책임질 수도 없다. 인간이 반박하면 압박하거나 회유하다가 배척하면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의존성이 문제다.
 
신에 의해 예언을 하고, 기적을 행하고, 이상한 행위를 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반칙행위로써 그에 대한 반작용이 따른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결과 또한 나쁘다. 신이 인간을 위해주는 척 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 줄 능력이 없다. 바람 같고, 연기 같은 형체뿐인 신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선은 자기를 주장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진짜는 가만히 있어도 진짜인데, 내가 진짜라고 주장하며 나타날 리가 만무하다. 인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조물주이겠는가. 조물주는 신도 아니고, 추앙의 대상도 아니며, 인간의 주인도 아니다. 그저 조물주일 뿐이다. 인간의 생과 사는 자연의 순리대로 되는 것이지, 조물주가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조물주의 기운에 의해 존재하지만, 그 기운이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있게 한 지성과 영성을 지닌 기운이 곧 조물주이다.
 
조물주는 기운(빛-생명에너지)으로, 때론 법칙(진리)으로 작용한다. 즉, 조물주는 ‘인격신’이면서 ‘자연신’이다. 조물주는 무형의 존재가 아니다. 조물주의 ‘마음 부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기운이며, ‘몸 부분’은 자연이다. ‘조물주의 창조행위’를 인간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에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물주의 인격과 기운은 온 우주 속에 깃들어 있고, 천지만물을 운행케 한다. 조물주의 기운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서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이 된다. 모든 존재물은 조물주의 기운에 의해 존재하고, 기운이 쇠하면 멸한다. 자연물은 순환한다. 조물주는 마음의 기운으로 자연을 만들었고,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서 자연물을 운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일까.
 
조물주와 교류한 것으로 보이는 도가(道家)의 창시자 노자는 우주의 근원이자 시원을 ‘도(道)’라고 표현했다. 자연은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됐고,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인지 엉킨 것이 천지보다 먼저 나왔으며,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고, 자(字)를 붙여 도(道)라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대(大)라 하겠다. 소리도 없고 보이지 않으나 우뚝이 언제까지나 있으며, 끝없이 어디에나 작용한다.”(도덕경 25장)고 전했다. 도는 무형의 실체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천지의 운행이나 만물의 생성화육(生成化育)을 주재한다. 대자연을 움직이는 힘과 법칙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라 진단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과 도가 조물주와 별개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자존성(自存性) 훼손이 죄
 
노자가 자연을 스스로 존재한다고 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연은 조물주의 기운에 의해 존재한다. 인간이 마음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듯, 자연도 성질과 외형으로 존재한다. 우주는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과 무생물은 기운에 의해 존재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광물이나 동식물 속에는 기운이 깃들어 있다. 우주 공간에도 기운이 꽉 차 있으며, 생명력이 충만하다. 태양에너지는 지구상의 기상현상은 물론, 해류나 지표의 변화, 생물의 성장과 분포상태 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달의 중력은 지구에 조류를 만들어 생물의 서식환경을 만들어 낸다. 우주만물만상을 존재케 하는 원동력인 기운이 분명 존재함에도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자연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에는 자연히 생긴 것이란 없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조물주는 만유에 살아 있다. 조물주는 말이 없고, 나타나지도 않으며, 인간이나 생물들의 행위에 간섭하지도 않는다. 배후에서 묵묵히 기운으로 인간과 만물을 나고 자라게 하고, 자연법칙으로 천지를 운행할 뿐이다.
 
성숙한 인간은 해야 할 것과 안 해야 할 것을 안다. 자연의 순환을 막는 것이 안 해야 할 것이다. 자연적인 삶이 인간의 삶의 법칙이다. 자기의식이 없으면, 신과 종교에 의존하여 조물주가 준 ‘인간의 자존성(自存性)’을 잃어버리기 쉽다. 죄는 자연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자연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신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자기 분수와 위치를 알고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얻어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정석(定石)이다. 나의 의식이 편향적 사고(偏向的 思考)를 넘어 우주적 의식(宇宙的 意識)을 갖게 되면 神과 宗敎問題는 자연적으로 해결 될 것이다. (매일종교신문 회장)
  • 도배방지 이미지

이옥용 '和平書信' (5분) 유트브 영상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