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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58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10/17 [07:24]
“거짓된 자기見解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

통찰! 天問天答 58

“거짓된 자기見解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10/17 [07:24]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거짓된 자기見解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
 
 
질문 86: 진경(眞鏡)님께서는 윤회(輪回)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이 되셨습니까?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道具化)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道具)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大氣)에 섞이듯이 근본생명에 합일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 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精神)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根幹)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不滅性)으로서, 모든 환생(幻生)의 영역 너머에서 어떠한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精神)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寫實)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本體)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意識)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輪回)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 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自律意志)를 가지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見解)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見解)만을 바로 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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