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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59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10/20 [08:54]
총체적 이해가 無形的 상태로 반영될 때 ‘초탈’을 한다

통찰! 天問天答 59

총체적 이해가 無形的 상태로 반영될 때 ‘초탈’을 한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10/20 [08:54]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총체적 이해가 無形的 상태로 반영될 때 ‘초탈’을 한다
 
질문87: 진리를 인격화(人格化) 시킬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 질문에 대해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먼저 진리를 표현상으로
‘그 분’으로 인격화 시켜서 말이지요.
 
‘그 분’을 떠올리면 정말로 가슴이 웅웅웅 울려요. 그런데 ‘그 분’을 떠올린다고 말은 하지만, 어떤 특정한 형상(形像)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이미지화 되지를 않아요.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만나려고 하지도 않지만, 절대적 ‘그 분’은 정말이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70억 전 인류가 동시에 절대적(絶對的) ‘그 분’에 대해서 상상을 하고, 그 모든 상상을 다 합쳐도 상상 되어 지지가 않아요.
그런데 ‘지금의 나’ 하나가 상상한다고 해서 상상 되어 지겠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밝음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상태를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관점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형태(형상)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를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경지와 능력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모든 차원과 시간과 공간을 다 합친 총합의 +α 이며,
그러니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합쳐도, ‘그 분’의 위대함과 전지전능(全知全能)함을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겁니다.
 
+α가 없다면 진정으로 무한(無限)이라 할 수가 없어요. 어떤 수행자가, 어떤 철학자가, 어떤 성인이, 어떤 성자가 무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그 무한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물론 무한을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는 규정을 해서 자기 머릿속에 가둘 수는 있지만, 가둬진 것은 무한에 대한 규정이지, 실질적인 무한은 이 머릿속에 가둬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을 다 합친 총합의 +α.
 
한번 떠올려 보세요. 제가 늘 주창하지만 ‘이러함’이, 즉 무한(無限)이 인간 정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자 백 그라운드 라는 겁니다. 이것은 ‘그 분’조차도 부인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그 분’조차도 인간정신의 총합이 자신임을(그 분) 부인하고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홀로 존재해도, 무엇이 없어도 진짜 지복감이 넘쳐야지요. 인간정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밝음을 다 합친 총합의 +α, 바로 여기로부터, ‘그 분’으로부터 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을 다른 이름으로, 가장 적절한 이름으로 표현을 한다면 ‘사랑’밖에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모든 인류는 모든 지성은 ‘그 분’으로부터 발산 되었기에, ‘그 분’의 자식이라 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서로 형제라 할 수가 있으며 ‘그 분’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물려받았어요.
그래서 ‘예수만이 독생자’라는 믿음에는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개인 각자가
사랑의 자식으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임을 깨우치기 위해서 존재하고, ‘존재함’이 가지는 모든 경험이 결국은 ‘사랑’을 깨우치기 위함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집착을 한다는 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지금의 나’가 자기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가진 예수는 원수를 만나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냥 존재하라, 오직 사랑으로 존재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소위 말하는 현실(現實)이라고 하는 것, 상황이라고 하는 것, 사건이라고 하는 것에는
환경도 있을 것이고, 조건도 있을 것이고, 모든 게 있을 것 아니겠어요?
이러한 작용을 구성 하는 근본적 질료가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용어로 에테르라 부르잖아요.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상황이든지 인식할 수가 있다면, 그 상황은 공유된 현실의 공동창조자라는 겁니다. 물론 무의식적인 측면이지만요.
 
그런데 이러한 무의식적인 측면을 넘어, 의식적인 측면에서 이 에테르를 지휘할 수가 있어요. 이 이야기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용어로 에테르라 하지만 에테르는 바로 인간 정신에서 비롯되어진 의식(意識)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상황이든지 사건이든지, 인식되어진 그 상황은 인식되어지기 이전에 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각’ 하고 있기 때문에, 지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자렛 예수는 이러한 인간정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를 만났을 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오직 ‘사랑’으로 그냥 존재하라고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은 결국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사랑’임을 자각한 자의 의지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시(巨視)든 미시(微視)든 물리학의 최종점은, 결국 인간의식이자, 의식 넘어 인간정신(情神)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어요. 쪼개고 쪼개서 찾고자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 정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드러난 모든 상황이, 작용이 나의 의식으로 이루어 졌으며, 어떤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의식의 부자유(不自由)일수 밖에 없으며, 결국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것에 집착을 한다는 것은 결국 부자유(不自由)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식의 부자유는 자유에 상반 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가 어떤 상황, 어떤 상태, 어떤 것 등으로 규정되어 제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속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불가(佛家)의 경전 중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는 구절이 있어요. 여기서 이(理)와 사(事)는 정신과 사물을 가리키고 있어요.
따라서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와 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반(相反)된 것이 아니라, 사(事)는 즉 사물은 단지 정신의 부자유일 뿐이지, 결국은 사물 또한 정신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와 사는 정신으로서 일체(一體)이기 때문에 이 구절이 가리키는 바는 일체지(一切智)에 대한 바른 이해라 볼 수가 있어요. 이와 사가 상반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은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한번 짚어 보세요. 누구든지 바로 ‘그 분’의 자식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분’의 피(血)를 물려받은 거예요. 누구든지.
그러니 하나의 관점에 매달려 고집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하나의 상태에 매달려
고집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하나의 경지와 능력을 지향하여 추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자각’만 하면 나는
‘그 분’처럼 모든 것의 총합의 +α인데. 얼마나 가슴 뛰는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를 가슴으로 한번 느껴 보세요.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그 관심이 심화(深化)될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 할 것이며, 자각할 때 비로소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로워 질것이며, ‘지금의 나’로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로부터, 그리고 ‘지금의 나’로서 꾸었고, 꾸고 있고 꾸고자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超越)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총체적 이해가 무형적(無形的)상태로 반영될 때 ‘초탈’을 한다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탈의 참다운 이해 수준은 바로 전지전능 무소부재인 것입니다. 이 부분도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나누기 위해서 온 존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왔으며, 내가 ‘사랑’이면 모든 이가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주고받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항상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문제가 생겨나잖아요.
그러니 자기사랑의 최종점은 결국 자신에 대한 이해를 거쳐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것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경험적 행위가 이러한 이해를 위한 파생적 ‘무엇’이기는 하지만요.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이해를 가지면 자기육신을 재생산하고, 세포를 재활성화 시킬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 육체의 세포 하나조차도 결국은 정신에서 비롯되어진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 사랑, 즉 스스로 무엇에도 의지함이 없는 사랑체(愛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이해가 극에 달하면 이 육체조차 어떤 형태를 가지지를 않아요. 다시 말해 무소부재 되어버려요. 수행자들이 가진 초탈의 의미를 넘어서서 설명을 하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따라서 ‘생로병사’라는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무형적 상태로의 무소부재의 ‘초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로 차려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러한 가장 당면한 일차적 의문에 대해서 ‘자각’하는 것이 이 삶의 유일한 의미이자 유일한 목적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와 목적은 꿈을 꾸고 있는 동안만 유효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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