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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중성(二重性)’

이옥용 | 기사입력 2016/12/02 [07:20]
“유일신 하나님이 나오기 전 세상에는 종교전쟁 없었다.”

하나님의 ‘이중성(二重性)’

“유일신 하나님이 나오기 전 세상에는 종교전쟁 없었다.”

이옥용 | 입력 : 2016/12/02 [07:20]
▲ 다윗왕의 가묘에서 유대교 랍비와 필자     © 매일종교신문
종교지도자와의 대담을 정리한 세 번째 글 ‘하나님의 이중성’을 옮깁니다. 기존의 관점과 많이 다릅니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편집자 주)  

“유일신 하나님이 나오기 전 세상에는 종교전쟁 없었다.”
 
“신은 없다”(스티븐 호킹), “신은 죽었다”(니체), “신은 만들어졌다”(니처드 도킨스) 신(神)의 존재를 부인하고, 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어떤 존재인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끊임없이 지속돼온 질문이다. 신은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다. 사람의 오감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종교(기독교)와 과학은 신의 실존문제를 놓고 유사 이래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왔다. ‘과학은 사실을 묻고, 종교는 의미를 묻는다.’는 것을 보아도 종교와 과학의 간극은 넓다.
 
지구상의 사람 절반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설령 신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는 게 신의 실존문제다. 우리가 신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요구해도 신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역사상 대재앙을 당할 때마다 신으로부터 응답은 없었다. 신이 사람의 절규를 듣기나 하는 것일까. 아니면, 들어도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잠잠한 것일까. 신은 왜, 성경에서처럼 인간구원섭리를 진행하지 않는가. 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긍휼히 여길 자만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
 
기독교의 성경은 하나님(신)이 태초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인간과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존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건재함도 생생히 전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성경의 중심인물들과 직접 대화도 나누고 자신을 드러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존재임을 실감할 수 있다. 현실에서도 더러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 그들이다.
 
스스로 창조주라고 말하는 기독교의 신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성경의 하나님의 사고는 이분법적이다. ‘긍휼히 여길 자와 증오할 자’가 명확하다.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곧 법이다(수 8:1~29).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는 자다(사 45-7). 성경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 그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롬 9: 15~16)
 
하나님의 말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지만, 불신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홍수심판 때에는 노아와 그의 식구만 남기고 사람과 생물을 말살했다. 출애굽 직전에는 애급의 모든 가축과 식물과 애급인의 장자만 골라 죽였다. 성경에는 이런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는 죄가 아니다. 모두 선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죄는 마귀(천사장)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고 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독선을 행한 것도 모두 마귀를 처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삼하 12:14). 그러나 자신의 불합리한 행위를 모두 마귀 탓으로 돌리며 마귀도 할 수 없을 행위를 자행하는 모습을 보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도 마귀와 같은 부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사울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부리는 악령을 시켜 사울 왕을 번뇌하게 만들었다(삼상 15:14).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창조했다는 인간들을 가차 없이 살육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악의 화신체로 묘사되는 마귀가 사람을 죽였다는 구절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행태는 사이코패스요, 강박신경증환자 같다. 하나님이 앙심을 품으면 유대민족들이 두려움에 부들부들 떤다(삿 10:15).
 
하나님은 유대민족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다며 저주한 후 재앙을 내리겠다고 독설을 퍼붓는다.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렘 15:3~4).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렘 16:8~13) 유대민족이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 학살당하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유리방황한 고난의 역정은 하나님의 저주에 의한 징벌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마귀노이로제’에 걸린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과연 원수 마귀를 처단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라는 마귀는 가만히 놔두고, 자신을 불신한다며 인간들만 질책하고, 죽이는 것일까. 마귀에 의한 노이로제 때문이 아닐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마귀에게 인간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예레미야를 통해 심중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렘 3:14).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게 심히 반역하였다(렘 5:11).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렘 8:17~18)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라는 마귀를 라이벌로 여기고 질투한다. 모세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밝혔다.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이사야에게 임했을 때에는 자신만을 믿으라고 절규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 다른 신들은 마귀이니, 따르지 말라는 말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섭리를 방해하고, 사람을 악으로 내몬다는 마귀에 관한 것도 잘 나타나 있다. 대체 마귀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 성경에는 두 부류의 천사가 나온다. 선하고 거룩한 빛의 천사들은(딤전 5:21, 막 8:38, 고후 11:14)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만(창 3:24, 민 20:16), ‘범죄 한 천사’들은 지옥의 구렁텅이에 던져져 있다(벧후 2:4). 범죄 한 천사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되었다고 한다. 마귀는 온갖 감언이설로 인류를 악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장본인이다. 성경에는 뱀으로 묘사되며, 인류의 원죄 유발에까지 가담했다. 계시록(12장 9절)에는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겼다”며 뱀 곧, 마귀·사단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의 죄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고 질타한다. “…너(천사)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이사야서 14장 12~14절)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즉, 타락한 천사는 열국을 엎고,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고, 하나님과 비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천사가 마귀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닌가. 성경은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을 유혹해 타락시키고 자기가 하나님 대신 사람과 만물의 주인 행세하며 ‘세상의 임금’과 ‘세상의 신 노릇’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
 
성경의 하나님은 이러한 마귀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다. 심기가 불편하여 신경이 매우 날카롭다. 성격이 다혈질이다. 유대민족과 이방민족만 죽어난다.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자애로운 얼굴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질책하다가 분노가 폭발하면 이성을 잃고 만다. 유대민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며 진멸하겠다고 분노하자, 모세가 만류한다.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급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7~13) 모세의 말이 옳았던지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화를 거둔다. 하지만, 이런 예는 드물다.
 
구약성경에는 사람은 물론 동물들까지 도륙하는 하나님의 광기가 수없이 펼쳐진다(수 6:21).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 애급 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홍해에 수장시키기도 한다(출 14:17).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가 왜 율법을 배척하고 사랑을 부르짖었는지 이해가 된다.
 
자신에게 불신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하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이중성은 하나님의 존재수단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해야 존재가 가능하다. 때문에 유혹과 협박, 회유와 저주, 증오와 사랑, 복과 화, 살인과 후회 등 상반된 두 얼굴을 번갈아 내밀며 유대민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광분한 것이다. 유대민족의 왕이 되고(삼상 8:7), 신이 되어 그들에게 추앙받고(삼하 22:1~32), 군림하기 위해 몸부림쳤다(렘 11:4). 인간 없는 신을 생각해 보라. 신은 인간에게 버림받으면 생존력을 잃고 고사(枯死)하고 만다.
 
하나님의 바람대로 인간의 왕이 되고, 인간의 신이 되게 해 줄 권력은 인간의 지지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목을 매는 이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유대민족의 왕(삼상 12:6~12)으로, 신으로 군림하며(레 22:33), 추앙받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의 은총을 갈구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녀로 부른 기록은 한 군데도 없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이 부리는 종(렘30-10)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렘 31:1)일 뿐이다.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는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내린 나의 모든 재난을 보았느니라 보라 오늘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사는 사람이 없나니 이는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악행으로 말미암음이라.”(렘 44:2~3).
 
성경의 하나님은 유대민족의 신이 되고자 몸부림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며 유대민족의 하나님임을 천명했다. 아브라함에게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했고,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으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 하겠다’며 지극한 애정을 표출했다. 또한 이삭과 야곱에게도 각별한 사랑을 표시했다. 유대정통주의자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확고하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백성인 자신들은 일반백성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유대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유대교인은 예수의 행적을 담은 신약성서를 인정하지 않고 구약성서만을 읽는다.
 
하나님의 이중성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그것도 말뿐이다. 하나님은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사 45-5). 오직 자신뿐이다. 남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자애롭지만, 불신하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적으로 간주, 도륙한다(민 25:5), 심지어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까지도 살육하라고 지시한다(삼상 15:3).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우상숭배와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을 ‘사단’으로 규정, 필멸의 적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의식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익애(?)에 빠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적 우월의식(선민의식)을 가진 것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예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종교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예수의 사고는 이러한 하나님의 이중적사고와 다르지 않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담은 4대 복음서는 예수의 유대교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부분 차지한다. 유대교인에 대한 증오와 비하, 차별성 발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수의 언행은 다분히 이율배반적이다. 이를테면,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을 반대하는 유대교인들에 대해서는 증오하였다.
 
예수의 인류사랑은 실로 측량하기 어렵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했고,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심 같이 너희도 만인을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또한 ‘비판하지 말고, 형제와 화목하고, 죄 진 자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사랑은 하나님처럼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자신을 불신하는 유대교인에 대해서는 증오와 차별로 일관했다.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는 이리로, 불법을 행하는 자로 표현하면서 “세리와 창기가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요,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고,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라고 지탄했다. 또한 “독사의 자식들로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으며, 땅 위에 흘린 의로운 피가 다 그들에게 돌아간다.”고 저주했다. 예수는 유대교인들을 마귀의 자식으로 규정하였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냐”(요 8:44), “나는 내 아버지께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느니라”(요 8:38)
 
반면, 제자사랑은 지대했다. ‘너희는 택함을 받았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 많은 의인과 선지자가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 저희는 영벌(永罰)에 들어가나 너희는 영생(永生)에 들어간다. 너희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며 격려했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고 했던가. 예수 제자들 역시 사랑에 대해 이중성을 갖게 되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예외일 수 없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처럼 태생적으로 극단적인 사랑과 증오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양날의 칼처럼 한편에서는 사랑을 실천하고, 한편에서는 반대자들을 저주하고 숨통을 끊으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의 기독교는 하나님과 2000년 전 유대교와 예수의 전철을 밟고 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와 ‘오직 기독교’만을 외치며,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독불장군이 되고자 한다.
 
하나님의 판박이 두 종교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전쟁이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재산이 파괴되며,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다. 사랑과 자비를 부르짖는 종교가 세계 도처에서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다. 십자군전쟁, 이슬람교의 정복전쟁,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 폭력적인 이슬람 지하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사태,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이종교 간의 학살에 이르기까지 종교가 개입한 분쟁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9.11사태와 아프간전과 이라크전 모두 기독교를 표방하는 서방세계와 중동 이슬람세계의 갈등관계에서 촉발된 사건들이다. 종교 간의 분쟁은 타협점이 없다. 각기 자기종교의 교주와 교리에 절대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는 유일신이라는 하나님을 믿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종교다. 유대교의 신 야훼(여호와)는 기독교의 신 하나님이고, 이슬람교의 신 알라도 하나님이다. 그리고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이삭의 후손이고, 이슬람교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의 자손들로 두 종교 모두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나 두 종교는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곧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성경에는 예수가 80번이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고, 하나님도 예수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며, 선지자일 뿐(꾸란 19:29-30)이라며,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 감히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고 비난하며,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도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슬람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는 불신자’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자는 불신자’라고 한다.
 
기독교는 마호메트에 대한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를 통해 최종적인 계시가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마호메트에게 최종적인 계시가 임했다고 믿고 있다. 종말신앙도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가 재림한 후 최후심판관이 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알라가 최후의 심판관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유일신이라는 하나님이 나오기 전 세상에는 종교전쟁이 없었다. 그러나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득세하면서부터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종교가 결부된 전쟁은 극단적이고, 맹목적이며, 잔인하다. 신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영광을 보장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계의 여러 종교 중 유일신이라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세계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두 종교는 세계 곳곳에서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각기 여러 종파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종교적 주도권을 잡고, 하나님을 독차지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그렇고, 하나님의 하수인 예수가 그렇게 하다가 갔으니, 그 제자들인들 어찌하겠는가. 그 나무를 보면 그 열매를 아는 것이다. (매일종교신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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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덴동산 2023/01/28 [22:59] 수정 | 삭제
  • 기독교에 대한 편협한 관점의 기사를 보니 화가 납니다. 존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이중성의 참 뜻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올바른 글을 올리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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