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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73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12/08 [06:51]
‘삶’은 어떤 이해도 필요가 없으며, 어떤 복잡한 것도 없다

통찰! 天問天答 73

‘삶’은 어떤 이해도 필요가 없으며, 어떤 복잡한 것도 없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12/08 [06:51]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삶’은 어떤 이해도 필요가 없으며, 어떤 복잡한 것도 없다
 
질문117: ‘삶’은 왜 이렇게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며, 왜 이렇게 복잡합니까?
 
 
‘삶’은 그 어떤 것보다 단순하며, 사실은 그 어떤 이해도 필요 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살아 갈수가 있는 것이며, 누구든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살아지는 것이지만요.
 
하지만 ‘님’ 스스로 태어난 ‘누구’로 자신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살아야 하며, 저렇게 살아야 하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며,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식의 삶에 대한 규정과 정형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삶’은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며, 더불어서 복잡해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태어난 누구이며 무엇이다 는 무지로 인한 삶은, 어떤 일말의 능동성(能動性)도 없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병들어 질 것이며,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때에 이르면 죽어질 것이고요.
이러한 능동성의 부재(不在)로 인해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아지기 때문에 ‘삶’은 어떤 이해도 필요가 없으며, 어떤 복잡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삶의 능동적 주체를 자각하고 있다면 삶의 어떤 지향점이 없기 때문에 더불어서 어떤 이해도 필요가 없으며, 어떤 복잡한 것도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나’는 ‘누구이다’는, 이 그릇된 견해를 바로 잡으세요.
 
 
질문118: 모든 것을 ‘내가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자각하는 것이고, 자각하는 것이 ‘내가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데, 이 ‘자기 앎’으로 불멸성에 대한 입증은 충분하다 하시는데, 어떤 이유입니까?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한다’는 자각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전에 ‘나’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모든 시작을 유발했기 때문에, 그 시작의 최종점인 끝에 의해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로병사(生老病死), 한평생이 결국은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즉 태어남도 내가 하고 내가 할 수 있으려면, ‘나’는 태어나기 이전의 ‘자각’으로 인해 태어남의 최종점인 죽음에 의해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을뿐더러 받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한다’는 자각으로서 불멸성(不滅性)에 대한 이해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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