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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이옥용 | 기사입력 2017/01/12 [22:25]
하나님은 왕이자 주인, 인간은 백성이자 종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은 왕이자 주인, 인간은 백성이자 종

이옥용 | 입력 : 2017/01/12 [22:25]
▲ 이스라엘 예루살렘성 배경에 선 필자     © 매일종교신문
종교지도자와의 대담을 정리한 네 번째의 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옮깁니다. 기존의 관점과 많이 다릅니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깁니다(편집자 주).
 
1. 하나님은 왕, 인간은 백성
 
하나님과 인간은 인간들이 생각하듯 애틋한 사랑이 넘쳐나는 그런 부자관계가 아니다. 상하가 엄격한 군신(君臣)관계다. 하나님은 인간의 왕이요(삼상 8:1~9),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이다(출 8:1, 렘 31:1, 32:38).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해야만 가능하다(겔 11:20). 하나님의 말에 일절 토를 달지 않고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출 19:1~6).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을 위해 지었다. 하나님에게 찬송을 부르게 하고(사 43:2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였다(사 42:8).
 
하나님이 곧 법이다(롬 9: 15~16, 왕하 10:30).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인간에게 적용한다. 하나님의 법에는 신권(神權, 하나님의 권리)만 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키라고 하는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 위주(爲主)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도는 아주 무섭다. 인간의 법은 인간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지만,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는 데에 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인간이 조금만 어긋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출 30:20~21).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을 강요하며, 자신의 말을 듣게끔 유혹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위협하고, 세력을 부리고, 죽인다.
 
하나님은 독재자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인간의 왕을 세워달라고 했다(삼상 8:5). 사랑의 왕이라는 하나님의 주관 권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명분은 사무엘이 늙고 그의 아들들이 사무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과 인간의 트러블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독재에 항거하는 일종의 시위 같은 것을 한 것이다. 이에 관한 하나님의 대응은 평소와는 달랐다. 분노와 저주와 징벌 대신 회유를 선택한 것이다. ‘너희는 왕의 종이 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에게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며 인간의 왕을 세울 경우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馭車, 수레를 메운 소나 말을 부리어 모는 일)하게 하리니…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삼상 8:6~20).”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지못해 인간의 왕을 허락한 하나님은 사울을 택해 왕으로 삼았으나 곧 후회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한 후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부리는 악령으로 하여금 사울을 괴롭히게 한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14).”
 
하나님은 끝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삼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2~13).”
 
사울은 어찌 되었는가.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괴롭힘을 당하며 40년간 외롭게 살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전투에서 그의 아들들도 모두 전사했다(삼상 31:1~13).
 
하나님의 법에는 ‘인권이 없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목적은 한 가지다.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민족은 수시로 불순종했다.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만 말고, 인간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행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행복하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순종하지 말라고 채찍질을 해도 순종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주는 존재에게는 자기 목숨도 바치려고 한다. 인간이 순종할 수 없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는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인간 치리방법은 인간적이지 않았다. 몸이 없는 하나님은 몸이 있는 인간의 아픔을 몰랐다. 하나님은 사랑도 모르고, 인간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신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줄 수 있는 신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자 할 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과 행동이 다른 신이다. 이율배반적이었다. 선과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것을 선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자기만을 위하여 살도록 되어 있지 않다. 자기만을 위하는 것은 선이 아니고, 자기만을 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만 기쁨을 얻고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요, 마귀다. 자기만을 위하면 누구나 마귀가 된다. 국가의 지도자가 자기만 좋은 법을 만들면 국민이 기뻐하겠으며, 단체의 책임자가 자기만 기쁘기 위해 단체원들에게 고통을 주면 평화가 오겠는가.
 
인간에게 대접받으려하고, 인간의 위에 올라가 군림하려 하고, 세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하나님은 자기가 바보인줄 모르는 신이다. 세력부리는 짓은 욕심 많은 마귀, 사탄, 악마가 하는 짓이지, 선신이 할 행동이 아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세력을 부리면 짐승이 된다. 짐승은 힘을 믿고 산다. 사랑이 있어야 선신이다.
 
자신이 높아지려고 해도 높아지지 않는다. 상대방이 높여주어서 높아지는 것이 진리다.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상대방을 멸시하는 신은 인격이 손상되어 망신당하고, 인간을 자신처럼 존중히 대하는 신은 선신으로 대접받는다.
 
자기를 나타내려는 신은 가짜 신이다. 보물은 숨어있다. 잘난 척하는 신은 도리어 가치가 없어진다. 내가 잘했다고 인간에게 알리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 자연히 알게 되면 더 가치 있다. 이것이 인격을 갖춘 선신의 마음자세다. 자기를 자랑하고, 나타내려고 하는 신은 인격자가 못 된다. 인간이 감동하여 우러러보고 고개 숙일 때까지 묵묵히 진실 되게 인간을 위해 사는 신이 선신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인간의 왕 노릇을 하려면 자식을 잘 살게 해 주는 부모 같은 신이 되어야 선이 된다. 자기가 왕이라고 백성인 인간을 고생시키고, 자기만 호강하고 살면 죄를 짓는다. 욕심이 죄를 낳는다. 자기 영광 받으려고, 자기 좋으려고 인간을 괴롭히며 사는 신은 악신이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왕 노릇하려는 신은 인간의 피 빨아먹고 사는 마귀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애정의 욕구는 본능적이다. 사랑은 조물주가 사람에게 선물한 지고지순한 최고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도우며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져야 돈독해지고, 행복해진다. 사랑하는 인간들은 만나면 기쁘고 즐겁고, 헤어지면 그리워진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일러준다. 그러나 그것은 빈말일 뿐이다. 
 
2. 하나님은 주인, 인간은 종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종(主從)관계다.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요(겔 1:7), 인간은 하나님의 종(왕하 19:34)이다. 이는 하나님이 정한 관계다. 하나님은 말끝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다’고 강조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 이 말은 곧 ‘하나님이 너희 인간의 주인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인간의 주인이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의 인간창조목적은 명백하다. 하나님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지었다는 인간은 매사가 하나님과 상치(相馳)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만 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이질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라는 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닐까.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인간을 자신에게 맞게 지었을 텐데, 하나님과 인간은 전혀 맞지가 않다. 물과 기름과 같이 상극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에게 의존해 사는 로봇이 되라고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존(自存)하려고 한다. 인간이 성경이 말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 패륜아이기 때문일까.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주관을 싫어하고 자기들끼리 살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혹과 위협과 무력으로 인간의 자존성을 말살하고, 자신에 대한 의존성을 심어서 인간을 자기 종으로 부리려고 한 것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5).”

하나님은 무조건 자신에게 순종하는 인간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출 3:15).’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믿음을 보인 그들에게 감동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도 하나님의 종이다(렘 30:10). 하나님은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애쓴다. 똑똑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없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난을 주어서 현실적 삶에 미련을 버리고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들려고 한다. 자신과 현실을 부정하게 하고, 하나님과 사후세계에서의 희망을 갖게 하여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존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의존하여 자신에게 순종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며 인간중심의 삶을 살려고 하자, 하나님은 이를 방해한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온 지면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1~8).”
 
인간은 ‘사랑의 神’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권력과 재물과 좋은 것은 독차지하려 하고, 인간을 위협과 힘으로 눌러 자기 종으로 부리려고 한다(삿 2:11~18). 부모의 입장에서 인간과 만물을 사랑으로 품어주려고 하지 않고, 조직폭력배처럼 힘으로 눌러서 복종시키려고 한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힘으로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 사랑하는 신이 선신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분노하고 징벌을 내린다. 공포심을 유발시켜 순종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했다는 인간의 심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신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없고, 인간에 대한 배려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 오직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덤벼든다. 그러니 짐승인들 그의 곁에 가려고 하겠는가. 인간이 기르는 애완동물도 주인의 감정에 따라 반응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물건으로도 취급한다. 인간을 도구라고도 한다(렘 51:20~21). 하나님에게 인간이란 하나님을 받드는 종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룩하게 여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하나님의 메신저들도 하나님을 극찬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이 말은 곧 인간은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절정은 하나님이 출현하는 장면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1~5).”
 
유혹하여 이용한 후 버리고, 저주와 살인을 밥 먹듯 하는 하나님이 자신은 거룩한 존재로 표현한 반면, 인간은 타락하여 추하고 속되며,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존재라고 무시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종처럼 대하거나 물건 취급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20:7)’고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은 거룩하고, 인간은 거룩하지 않다는 뜻이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레 22:32)’이라는 말은 내 말 잘 듣고 그대로 행하면, 위대하고 성스런 사람 되게 해 주겠다는 뜻이다.
 
주인이 살려고 만들어 놓은 집에 객이 들어와 살면 어떻게 되겠는가. 곧 망가진다. 주인은 자기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에 아끼고 가꾸지만, 객은 자기 것이 아니므로 아무렇게나 사용한다. 조물주가 자존하라고 지은 인간을 창조주로 둔갑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이용하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삼하 24:1). 자존성을 버리고 의존성으로 살아야하니까 마음이 혼란하고, 몸에도 이상이 생긴다. 인간의 마음은 자연성이므로 자존하며 살아야 조물주가 목적한 사람이 되고, 행복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자기 좋을 대로 부리고 있다. 이런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사랑 없는 ‘사랑의 하나님’
 
육체가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왕 노릇하려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고, 자신을 존엄히 여기듯이 존엄이 여겨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하나님이 사기꾼, 조직폭력배처럼 유혹하고, 위협하고, 힘으로 누르고, 죽이면서 복종하기를 바라고 있다(삼하 24:25).
 
사랑이라는 하나님이 아니러니 하게도 사랑이 없다. 사랑은 내 몸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선과 사랑은 주려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고만 한다. 그리고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쓰레기 버리듯 버린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 외려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 치는 것이다. 인간을 속이는 것이니까 사기 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은 주지 않고,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마귀가 된다.
부모의 입장에 서야 사랑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한다. 참된 신은 인간을 자기 자식 사랑하듯 사랑하는 신이고, 만물의 신은 만물을 자기 자식 사랑하듯 사랑하는 신이다.
 
사람은 만물 중에서 사람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물을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도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사람과 만물을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만물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 사랑의 신이 되어야 사람과 만물 중의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랑이 최고라야 최고가 된다. 인간과 만물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신이 되어야 창조주이고, 유일신이고,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하나님이 하나님 위주로 인간과 만물을 괴롭게 하면서 하나님만 좋도록 살려고 인간과 만물을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선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을 기쁘게 해주어야 인간과 만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을 위해 주며 사는가.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높은 자리와 권력을 좋아하고, 인간을 자기 밑에 두고 종 부리듯이 부리려는 마음이 곧 욕심이다. 신이 욕심을 써먹으면 인간들이 선신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자리로 떨어진다. 그래서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한다. 인간의 왕이 되어 영광 받으려는 하나님은 권력과 영광이 삶의 푯대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겠다는 그 욕심이 꼭 마귀를 닮았다.
 
하나님은 거만하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겸손한 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높이고 인간의 왕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마귀가 된다. 신이 어찌하여 신의 길에서 벗어나 인간의 왕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가. 자만ㆍ거만ㆍ교만은 자기 인격에 손상을 주고, 인생을 망치게 한다. 악의 시초다. 경계하고 경계해야할 것들이다. 자기 마음을 다스려서 겸손하고, 낮아지지 않으면 인간에게 원망을 듣게 된다.
 
사랑과 선과 생명이 꽉 차있는 신은 자연히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신은 인간의 왕보다 인간의 하인이 되고자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진짜는 가만히 있어도 진짜고, 가짜는 아무리 진짜라고 선전하며, 진짜처럼 행동해도 가짜다. (매일종교신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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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유천하 2017/02/20 [11:13] 수정 | 삭제
  •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그리고 얼마나 세상일이 복잡하실가요 ? 진정 위로해 드리는 우리가 된다면, 그러한자라면, 성자의 경지에 도달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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