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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와 생활의 바탕정서-민속신앙의 역사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1/13 [07:45]
단군 신화부터 부족국가·삼국·고려·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신앙의 모습

한국 종교와 생활의 바탕정서-민속신앙의 역사

단군 신화부터 부족국가·삼국·고려·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신앙의 모습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7/01/13 [07:45]
단군 신화부터 부족국가·삼국·고려·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신앙의 모습
 
한국 민속신앙의 역사에 대해 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6)에서는, 제정(祭政)이 일치되었던 부족국가시대의 민간신앙은 국조인 단군과 관련된 신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단군신화에는 신의 종류로서 환웅(桓雄), 동물신, 식물신, 자연신, 지신(地神) 등이 등장하고, 곰이 인간으로 변화하는 방법으로서 삼칠일, 백일의 금기와 주술이 행하여졌으며, 여러 가지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단군 또한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바람·비·구름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곡식의 풍년, 인간의 수명·질병·형벌·선악까지도 주재하였다.
 
단군은 인간의 둘레를 넘어선 군주로 간주되었고, 죽은 뒤 아사달(阿斯達)의 산신이 되었으므로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부여 마한 예(濊) 등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집단의 共同祭儀
 
각 부족국가에서는 연중행사로서 제천의식이 행하여졌다. 부여에서는 정월에 하늘에다 제사를 지내고 며칠을 계속하여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와 춤을 추는 영고(迎鼓)가 있었고, 마한에서는 씨를 뿌리고 난 5월과 추수를 끝내고 난 10월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귀신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먹고 마시고 춤을 춘 천신제가 개최되었다. 또, 예(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고 하여 10월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고 가무를 즐겼으며, 고구려에서도 ‘동맹(東盟)’이라는 국중대회를 10월에 열어서 시조 주몽(朱蒙)의 모신(母神)인 수신(隧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밖에 백제에서도 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행하여졌다.
 
이와 같은 제천의식들은 모두가 그 해의 풍작을 천신에게 기원하는 예축행사(豫祝行事)였거나, 그 해의 풍작을 천신에게 감사하는 추수감사제, 또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집단 전체의 공동제의(共同祭儀)였다. 특히, 여러 신을 섬긴 예는 부족국가시대에 널리 나타나고 있다.
 
▲ 고구려 ‘동맹’의 제천의식을 재현한 아차산 고구려 동맹제  

외래종교 유입된 삼국시대의 민속신앙-천신·상황·일신·월신·천사 등 여러 神 인정
 
삼국시대에는 불교·도교 등 여러 외래종교가 유입되었다. 그러나 제정일치의 형태는 삼국시대 초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신앙의 대상이 된 신들도 매우 다양하여,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도깨비를 비롯하여 우상(偶像), 역귀(疫鬼), 자연신, 동물신, 식물신, 왕신, 장군신 등 많은 신들이 믿어지고 있었다.
 
천신에 대해서는 하늘과 큰 인물을 직접적으로 잇는 독특한 신앙형태를 보이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은 33천왕인 제석천(帝釋天)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태어나 신라를 통일한 뒤 죽어서는 다시 천신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진평왕의 즉위 때 천사가 내려와서 “상황(上皇)의 명을 받아 옥대(玉帶)를 주노라.”고 하였다. 또,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 부부는 해와 달의 정(精)으로서, 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의 천지는 광명을 잃었던 일이 있다.
 
▲ 지난 1999년 호미곶 해맞이공원 조성당시 건립된 연오랑 세오녀상. 신이 되어 일본에 가자 신라의 천지는 광명을 잃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천신·상황·일신·월신·천사 등의 여러 신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백제와 신라에서는 산신을 숭상하여 산신에게 제사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백제에서는 부여 풍(扶餘豊)이 신라의 김법민(金法敏)과 백마(白馬)를 잡아 맹(盟)하기에 앞서 산곡(山谷)의 신에게 제사하였고, 신라의 탈해왕은 죽어서 동악신(東岳神)이 되어 문무왕의 꿈에 나타났다고 하며, 박제상(朴堤上)의 아내는 여산신(女山神)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동쪽의 토함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계룡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父岳) 또는 팔공산을 오악(五岳)이라 하고, 이들 오악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중국의 오악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고구려; 나라 동쪽의 대혈(大穴)에 있는 수혈(隧穴)에 수신이 있다고 하여 10월 국중대회 때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놓았을 뿐 아니라, 집 좌우에 대옥(大屋)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을 받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하늘과 귀신과 영성, 사(社)를 관장하는 토지신, 직(稷)을 관장하는 곡식의 신을 섬기는 신앙이 성립되어 있었다.
 
마한; 소도(蘇塗)라는 성스러운 곳을 정하여 거기에 대목(大木)을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에게 제사하였는데, 죄인이 달아나서 소도에 들어가면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소도는 신단과 수호신을 모신 성역을 상징한 것이다. 예에서는 산천을 중하게 여기고 호신(虎神)에게 제사하였으며, 사람이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이주하였다. 호랑이의 신을 제사한 것은 곧 산신에게 제사를 하였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산천을 중하게 여긴 것은 제각기 신이 있다고 본 원시신앙에 의한 것이다.
 
예족; 별자리에 밝아서 별자리를 보고 여러 가지 일을 예지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곧 성점법(星占法)의 발달을 의미한다.
 
진한;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날아가게 하기 위하여 큰 새의 날개에 주검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죽은 이의 영혼을 위안하고 승천시키기 위하여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으는 새의 날개에 붙여서 날려 보낸 것으로서, 영혼을 지상에 두는 것을 금기로 삼았던 고대인의 철학과 승천사상을 보여준다.
 
부여;전쟁에 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소를 잡아 발톱을 보고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조라 하였고 붙어 있으면 길조라 하여 전쟁의 승패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들은 소의 발톱이 전쟁의 길흉을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변한; 귀신에게 제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의 아궁이는 반드시 집의 서쪽에 만들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데, 방위신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삼국시대 산악신앙과 함께 강하게 나타난 龍 등 동물신앙
 
산악신앙과 함께 삼국시대에 강하였던 신앙은 용에 대한 신앙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라의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룡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감포 앞바다의 수중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또,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로 나갔을 때 용의 장난으로 인한 갑작스런 운무(雲霧)로 길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동해의 용왕이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나와 문안을 드렸고, 그 중의 한 아들인 처용(處容)을 보내어 왕을 보좌하게 하였다. 순정공(純貞公)은 아내인 수로부인(水路夫人)과 함께 강릉에 갔다가 해룡에게 납치당한 일도 있었다. 백제의 무왕은 그의 어머니와 남지(南池)의 지룡(池龍)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전한다.
 
이들은 모두 물에 사는 용과 인간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민간신앙의 한 유형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 등에는 역신과 동물신, 기타 특별히 이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병의 신인 역신은 처용의 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역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천하의 절색인 처용의 처와 관계를 맺었으나 이를 본 처용은 오히려 태연한 자세를 보였으므로, 역신이 감동하여 처용이 있는 곳에는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부터 민간에서는 역신을 쫓기 위한 처용 부적이 생겼다고 한다.
 
소지왕 때의 사금갑(射琴匣) 고사에는 까마귀·쥐·돼지 등의 신령스러운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원성왕 때의 김현(金現)이 흥륜사(興輪寺)에서 미녀를 만나 정을 통한 뒤에 알고 보니 호랑(虎娘)이었다는 것, 진성여왕 때의 활의 명수였던 거타지(居陀知)가 해룡의 청으로 고도(孤島)에 남아 있다가 괴신을 활로 쏘았는데 늙은 여우의 정(精)이었다는 것, 선덕여왕이 병들었을 때 밀교 승려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읽은 뒤 손에 쥐고 있던 석장(錫杖)을 날려 보내니 늙은 여우를 잡아 마당에다 쓰러뜨렸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가 동물신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여우의 신인 호신(狐神)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선신이라기보다는 악한 신으로 간주되었다. 이 밖에 잡신으로는 진지왕과 도화녀(桃花女)가 생전에 나누지 못한 정을 죽어서 이루어 낳은 비형(鼻荊), 선덕왕 때 어린 김양도(金良圖)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뒤 횡포를 부렸던 대귀(大鬼)·소귀(小鬼)에 얽힌 설화 등은 도깨비신앙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보고 있다.
 
신라 때부터 한 영역을 차지한 장승신앙
 
그리고 민간신앙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장승 또한 신라 때부터 있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에는 ‘장생’이 있었고, 운문산선원의 ‘장생표탑(長生標塔)’ 공문에는 청도 경내에 장승 11개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 장승의 수가 매우 많았으며, 장승이 사찰과 관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장승 신앙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에는 장승 11개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청도의 장승 모습.     © 매일종교신문

또, ≪삼국유사≫에는 돌백사(堗白寺)와 백암사(伯巖寺)에 주첩(柱貼)이 있다고 하였는데, 장승과 주첩은 동일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사찰 입구나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장승의 전신으로 보고 있다. 이들 장승은 경계의 표시, 거리표, 악을 막는 귀표(鬼標) 등으로 사용되었다. 사찰 입구에 세우는 것은 경내의 표시이면서 부정을 막는 이중역할을 담당하였고, 장승에 다음 읍촌까지의 거리를 표시하는 것은 거리표 역할을 하였다. 촌락의 입구에 세워 축귀대왕(逐鬼大王)이라고 쓰는 것은 악귀의 부정을 막는 민간신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장승이나 주첩은 신역(神域)의 표시와 축귀의 의미를 가지고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목주(木柱)·석주(石柱)·입석(立石) 등을 사용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부터 기록된 기우제 의식- 오늘날도 전승
 
또, 삼국시대에는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산천과 하늘에 제사지내는 기우제 의식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563년(평원왕 5) 큰 가뭄이 있어서 왕이 식사량을 줄이고 근신하면서 산천에 기도하였다. 백제에서는 227년(구수왕 14) 3월 큰 가뭄이 있었고 4월에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큰 피해가 있었으므로 동명묘(東明廟)에 기우제를 지냈다. 신라에서는 753년(경덕왕 12) 큰 가뭄이 있자 내전에서 ≪금광명경 金光明經≫을 강하여 단비를 기도하였다.
 
이 밖에도 삼국시대에는 기우제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의 기우제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진평왕 때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형상주술(形象呪術)을 썼으며, 용신의 뜻을 받들어 비를 기원하는 것도 대표적인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민간신앙은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이 전승되고 있다.
 
불교와 혼합되어 생활 속 민간신앙 널리 적용된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생활면에서 민간신앙이 널리 적용되었던 시대이다. 병이 생기면 약물치료보다는 귀신에게 제사를 하는 데 주력할 정도였으며, 크게는 국가의 행사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무격(巫覡)을 불러들여 의지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기우제·기은제(祈恩祭), 재앙을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는 일에서부터 서낭과 산신에게 비는 의식에까지 무격이 참여하였고, 때로는 무속에 의한 피폐가 크다고 하여 금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민간의 신에 대한 신앙도 불교와 혼합하여 매우 다양하게 신봉되었다.
 
▲ 불교의식과 민간신앙이 결합한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으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불교의식과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깊이 뿌리를 내린 대표적인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다. 연등은 원래 불교의 행사였으나 민간에 널리 전해짐에 따라 이전의 천신제와 혼합을 이루어 토착화하기에 이르렀다.
 
연등회는 고려 초부터 왕궁은 물론 향읍(鄕邑)에까지 널리 전하여졌는데 정월 15일 또는 2월에 행하여졌다. 팔관회는 10월 망일(望日)에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나라 동쪽의 혈(穴)에 있는 세신(歲神)을 모셔다가 제사를 지냈다.
 
삼국시대 산신사상 어어받은 고려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의 산신사상을 이어받아 산신을 숭상하고 제사를 지냈다. 고려의 4대산으로는 덕적산(德積山)·백악산·송악산·목멱산(木覓山)이 있었으며, 이들 4대산의 산신에게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는 무녀가 의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송악산신은 거란족의 침공이 있을 때 소나무로 변신하여 수만 명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떠들어서 적을 물리쳤다는 고사도 전한다. 그리고 산신이 정인(定印)의 꿈에 나타나서 이름을 고치게 한 일도 있다.
 
민간에서 신령하게 생각한 동물과 식물들
 
고려시대에 민간에서 신령하게 생각한 동물로는 사슴·거북·까치 등이 있다. 사슴을 구해주고 그 보은으로 자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서 재상을 지냈다는 이야기, 바다에서 거북을 잡았다가 놓아 주어 그 보은을 받은 서신일(徐神逸)의 일화 등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까치집을 길조로 보고 거미를 흉조로 해석한 예도 있다. 울타리 옆에서 까치가 우는 것과 거미가 아침 밥상에 내려오는 것은 길조이고, 거미가 저녁에 내려오는 것은 근심될 일이 생기거나 불길한 징조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민간에서도 그대로 믿어지고 있는 속신이다.
 
신령하게 생각한 식물로는 거목·쑥·복숭아나무 등이 있다. 마을에 있는 거목은 마을을 지키고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있는 곳이라고 하여 거목을 신수(神樹)로 받들었고, 그 신수를 함부로 벌채하면 신벌을 받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단옷날 한낮에 쑥잎을 뜯어 두었다가 약용으로 쓰면 모든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속신도 고려 때부터 비롯되었고, 복숭아나무의 가지나 잎, 도부(桃符)로써 귀신을 쫓는 속신도 고려시대에 이미 행하여지고 있었다.
 
또한, 벽사(辟邪)를 기도하고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에 팥죽을 먹는 것과 세말에 잡귀를 쫓고 신성한 신년을 맞이하기 위한 구나의식(驅儺儀式)도 고려 때부터 이미 있었다.
 
고려왕실과 관련된 민간신앙으로는 용신제가 있었다. 왕씨(王氏)들은 해룡신의 후손이라 하여 겨드랑이 밑에 용의 비늘이 있다고 전하여졌던 만큼 용신에 대한 믿음은 각별하였다. 급수문(急水門) 위의 합굴룡사(蛤窟龍祠)에는 신상을 봉안하여 두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는 주사(舟師)들이 작은 배로 영신(迎神)하여 제사를 지냈고, 군산도에 있는 오룡묘는 사우(祠宇)의 정면에 다섯 신상을 그렸으며 선원들은 금기를 엄격하게 지키면서 성심껏 제사를 지냈다.
 
또, 성종은 991년 윤2월 길지를 택하여 사직단을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사직신으로는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셨으며, 봄에는 기원하고 가을에는 보은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문종 때는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두었는데 이것이 서낭당에 관한 최초의 사실로 보고 있다. 그 뒤 전주성황에게 제사를 올린 것과 한발이 계속되었을 때 기우제를 계양성황께 올렸다는 등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장승 또한 많이 세웠으며, 국장생(國長生)이라고 하여 국명에 의해서 세운 바가 있다. 고려의 장승 또한 마을과 사찰의 입구에 세워졌고 액과 잡귀를 막는 수호신, 경계의 표시 등으로 이용되었으며, 서낭·소도 등과 함께 마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억압 속 무속신앙 번창한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억압된 것과는 달리 무속신앙은 계속 번창되었으나, 금무(禁巫)라는 국가정책에 따라서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다소 제한되었다. 특히, 무격을 전담하는 관청으로서 성수청(星宿廳)·활인서(活人署) 등이 있었다. 또, 기우·기은·기자·산천제·성황제 등은 사제무가 맡아서 하였으며, 성수청과 활인서에 국무(國巫)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복무(占卜巫)가 크게 성행하였다.
 
또한,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고려시대 못지않게 성행하였다. 건국 초 태조는 원단(圓壇)을 한강 서쪽에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하였으며, 마니산에 단을 설치하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영성단과 노인성단(老人星壇)을 서울 남쪽에 두었다. 태백성은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기 전에 빌었더니 감응이 있었다고 하여 등극한 뒤 함흥 남쪽에 제성단을 만들어 매년 단오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산신제는 백악산·송악산·감악산·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밖에도 천신(川神)·삼해신(三海神)·칠독신(七瀆神)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다. 산신과 연관되어 암석신의 신령을 믿는 암석숭배도 토착화되었다. 대표적인 기자암(祈子巖)으로는 경주 금오산의 산아당암(産兒堂巖)과 상사암(想思巖), 서울 자하문 밖의 기자암과 인왕산 선바위 등을 들 수 있다.
 
동물신으로는 산군(山君)이라 하여 산신으로 숭상하였던 호랑이를 비롯하여, 재산신으로 숭상되었던 두꺼비, 제주도 차귀당(遮歸堂)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신(蛇神), 수신으로 받들어졌던 용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또, 수목 하나하나에도 신령이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오래된 거목의 수정(樹精)은 신수라고 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마을 안에 있는 거괴수(巨槐樹)는 당신목(堂神木)으로 숭상하였으며, 서낭당·산신당·장승 근처에 있는 수목들은 신목으로 인정되어 벌채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가택 안에 좌정한 많은 가택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집안의 신들 중에서 가장 높아서 대들보 위에 있는 성주신은 집안의 평안·무병·장수·행운·다남 등을 관장하는 매우 중요한 신으로 섬겨져서 상달인 10월에 성주굿이 열렸다.
 
▲ 대들보 위에 있는 성주신은 집안의 평안·무병·장수·행운·다남 등을 관장하는 중요한 신으로 섬겨져서 상달인 10월에 성주굿이 열렸다. 사진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의 ‘성주굿’ 공연모습.    

이 밖에도 지신이라고 불리는 토주신(土主神), 재산신인 사창신(司倉神), 곡식을 관장하는 제석신(帝釋神), 부뚜막신인 조왕신(竈王神), 문간의 출입을 단속하는 수문신(守門神), 변소의 신인 측신(厠神), 천연두의 방지를 위하여 모신 역신(疫神) 등이 신봉되었다.
 
이들 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방법과 의식, 민속 등이 전래되고 있다. 또, 수호신으로는 고려 때와 같이 서낭·장승·소도 등을 모셨는데 이 중 서낭의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전국의 명산을 비롯하여 마을 입구, 고갯마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서낭당이 있었다. 이 밖에 부근신(付根神)·대감신(大監神)·풍신(風神)·태자귀(太子鬼)·미명귀(未命鬼)·야광귀(夜光鬼)·도깨비 등에 대한 다양한 속신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근신은 부군신(府君神)이라고도 하는데, 중종 때는 전국의 사내(司內)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대감신은 무격신으로서 전내대감(殿內大監)·토주대감 등 10여 종으로 분류되며, 풍신은 영동할머니로서 2월 1일 천계에서 지상에 하강하였다가 20일에 승천한다고 전한다. 태자귀는 명두라고도 하는데 어린아이의 죽은 영혼을 신으로 삼으며, 점이 잘 맞는다고 하여 부녀자들이 많이 신앙하였다. 미명귀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세상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사람에게 붙은 경우로서 악행을 많이 하는 악귀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을 때는 위령제를 지내주어 미명귀가 되는 것을 예방하였다. 특히, 민간의 전설에는 이 미명귀에 얽힌 것들이 많다. 야광귀는 천계에 살다가 설날 밤에 인가로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 간다고 하여 설날 밤에는 뜰에 있는 신발을 모두 방 안에 감추어 두고 잔다. 이 야광귀에게 신을 잃은 사람은 연중 불길하고 흉사가 있다고 하며, 이 귀신을 막기 위하여 뜰에 장간(長竿)을 세우고 체를 달아매어 두었다고 한다.
 
개화기 이후 위축된 민간신앙-민족의 정서와 향수로 원형 복구와 계승 이뤄져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하였던 민간신앙은 개화기 서구문물의 유입과 함께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무당의 의술적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고, 1910년 이후 일본은 고유신앙을 일소하기 위하여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미신타파를 주장하였고, 무당이나 점복사에 대하여 엄한 강압을 가하였으며, 마을의 동제를 중단시키거나 신사를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3·1운동 이후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 일제는 산신제·기우제·별신제 등의 제사와 석전(石戰)·차전(車戰) 등의 민속놀이까지 위생과 치안을 이유로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 36년을 거쳐 8·15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그 뒤 서구의 교육방법과 생활방법에 크게 영향을 받아 민간신앙은 현대생활 속에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굿이나 마을신앙, 우리 것을 찾겠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서 민간신앙의 원형이 다시 복구되고 계승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은 민족의 향수와 같은 것으로서 완전히 축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토정비결을 보고 산신제를 지내며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고 점을 치며 귀신을 두려워하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는 등 민속명절을 지키고 따르는 것도 민족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민간신앙의 향수라고 볼 수도 있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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