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전체기사포커스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다문화 사회기획특집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이상훈 박사의 ‘바둑으로 배우는 성경공부’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18.09.19 [04:08]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기사제보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가야 초대 왕후 허황옥 그녀의 출생의 비밀을 캔다
평범한 허황옥 설화가 불교 융성기에 인도의 아유타국 설화로 윤색된 과정
기사입력: 2017/01/20 [08:46]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수로왕릉에 있는 허황옥 상    

평범한 허황옥 설화가 불교 융성기에 인도의 아유타국 설화로 윤색된 과정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 사후 그녀의 고향과 관련 다양한 주장들이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그녀의 고향은 시대와 권력자 그리고 지방문화축제를 기획하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면서 가설이 정설이 되고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아유타국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는 김수로 왕을 만났을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증언이 현재로는 전부다. 아유타국과 연관된 불교왕으로 김수로를 묘사하는 자료문헌들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 사이에 김유신일가-수로왕의 후손으로 추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김유신의 시대에 그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이후로 이 일가의 운명은 점점 더 쇠퇴해 갔다는 정치적 동기로 이해되기도 한다.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 가야 시조 수로왕의 영정.

또 다른 주장으로 수로왕릉 묘역에 그려진 쌍어문양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납릉 정문의 쌍어문, 안향각의 쌍어문은 가야시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건축물이 아니라 조선중기 건립된 것으로 그 문양이 가야시대로부터 전래된 문양으로 복원했다는 가설은 존재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가설에 불과한 소설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세종21년(1439) 10월 기묘에 慶尙道觀察使 李宣이 급하게 狀啓를 올려 말한다.
 
“臣이 순행하여 金海에 이르러 邑城 서쪽 길옆을 살펴보았더니, 가락 시조 수로왕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서,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기르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얼핏 생각해도 무례한 짓일 뿐만 아니라 율령에서도 급제한 바입니다.(중략) 바라건대 신라 시조를 기린 법에 따라 그 제도와 禮를 헤아려, 능 옆의 사방 50步(原文에는 ‘少’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따라 수정함, 필자 주) 안의 논은 모두 묵히게 하여 경작을 금하고 소나무를 심어 묘역으로 삼으십시오 表石을 세우도록 명하시고 이를 守護하는 한 두 戶를 골라 정하여 때로 소제케 하여 예를 장려함을 두터이 보이십시오” 禮曹에 내려보냈다. 禮曹에서 말씀 올리기를, “수로왕의 능침에는 表石을 세우거나 守護戶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사방으로 각 30步에 한하여 경작하거나 땔나무 캐는 것을 금하십시오”라고 하므로, 이에 따랐다.
 
'숭선전지'에 따르면, 수로왕릉의 정문과 안향각 등을 세울 때 승려들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이 쌍어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쌍어문은 본래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장으로, 왕릉 정문의 현판에는 그밖에도 불교와 밀접한 그림들이 다수 등장한다. 현판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 그려진 남방식 불탑이 그렇고, 두 마리의 코끼리나 연꽃 봉우리가 그렇다. 더구나 쌍어문이 정말 아요디아국 문장이라면 오히려 수로왕릉이 아니라 허왕후릉쪽에 그려져 있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결국 허왕후의 야유타국 출신이란 주장은 후대 허황옥은 불교의 권위를 빌어 신성화 관념을 모색하다 전승되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변화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유타가 인도라는 의식의 저변에는 駕洛國記에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로써가 아닌 본질적으로 왜곡된 ‘인도’와 동일시되는 의미로 알려졌다. 그것은 신라 중대와 고려 초기 사이에 불경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불경 속에 군데군데 들어 있는 ‘아유타’를 ‘인도’와 동일시하면서 특정 사찰에서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통일 신라 이후 형성된 불국토 관념 아래에서 한국이 인도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유타’가 허황후의 고향으로 설정된 것은 바로 이러한 불교적 역사 인식 아래 이루어진 ‘역사 만들기’의 일환인 것이다.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의 신라-수 제국과 다름없이-에서도 국가 통치자가 세계를 통합할 아주 도덕적이고 독실한 인물인 전륜성왕으로서 비전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다. 같은 시기에 인도는 신라와 신라가 정복했거나 정복하고자 하는 초기 한반도의 다른 모든 영토들과 숙업적으로 연결되는 불교세계의 중심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신라의 지배 귀족세계에 편입된 금관(김해)왕족의 후손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은 전륜성왕 아소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고자 하는 신라 왕조의 입장에 대응하여 ‘아유타국 공주’와 결혼하고 악령들에게 불교를 설파하고 보드가야와 나가라하라의 이름을 따라 지은 가치가 있는 영토를 지배하는 그들이 선조로 추앙하는 수로왕의 설화를 통해 필적하고자 했다.
 
평범하게 시작된 허황옥 설화가 불교 융성기에 인도의 아유타국 설화로 윤색되었다.
 
▲ 김수로왕릉 정문에 있는 쌍어문    

쌍어문양은 조선중기에 그려진 것이다
 
가락국 건국시기에 인도와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허황옥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가락국 건국에 참여했고 수로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다 통일기 이후 불교가 융성해 지면서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 아니면 인도로부터 왔다고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유타국을 인도로 보는 학설도 다양한데, 허왕후가 실제 기원전 3세기경 갠지즈강 중류지대에서 크게 번성하였던 불교왕조인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설, 인도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찬성 보주(普州) 일대로 옮겨와 살던 브라만 집단의 일부가 양자강을 타고 동진하여 황해를 거쳐 가락국으로 이주했는데 허왕후는 그 일원이라는 설, 허왕후는 인도의 아요디아 왕조가 기원 1세기 이전에 지금의 타일 방콕에 건설한 식민국이었던 아유타야에서 왔다는 설 등이다. 이와 별도로 왜국출신이란 주장에 제기되고 있다. 허황후의 출신지는 기존의 가설처럼 인도가 아니라 왜국 출신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왕후사를 세우자 왜가 복속했다는 본기의 기록은 그의 출신지가 왜국이었다고 가정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허왕후가 왜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를 위해 왕후사를 창건했다고 해서 왜가 복속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왕후사 건립은 단순히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대변되는 가야지역의 왜 집단을 무마하기 위한 상징적 조치로 봐야 할 것이다.
 
허왕후 설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여러시기를 거치면서 중국문화,불교문화,풍수,무속적 요소가 습합되면서 독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일연의 「가락국기」에 기록되기전 원형의 모습을 추론할수 없게 다양한 문화와 만나 변형을 거듭한 끝에 일연에 의해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글로 정착된 것이다. 변화를 거듭한 이면에는 전제한것과 같이 문화적인 요인과 함께 근본적인 덮씨우기는 김유신,문무왕으로 대표되는 가야계 인물들의 조상숭배 사상이 일정 영역으로 삽입된 것이다.
 
許黃玉의 出自 부분은 불교적으로 많이 미화되어져 있다. 許黃玉이 인도에서 왔다는 것도 불교적 윤색으로 믿을 수가 없다. ‘一成三 自三成七’의 기술과 ‘七聖住地’의 기술은 佛敎式表現과 風水思想이 혼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때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평범했던 가락국 허왕후 설화가 신비의 왕국으로 여겨지게 된 배경에는 가락국 수로왕릉 정문 현판 좌우에서 발견되는 쌍어문이 인도 아요디아국 전승의 신어가 그려져 있다는 이종기, 『가락국 탐사』(일조각 1977)보고서가 발표되면서 신화가 현실이 되었으며 이후 許王后陵碑의 ‘普州太后’라는 문구를 통해 인도,중국 등에서 동일 지명을 찾던 김병모는「許黃玉은 四川省」을 거쳐 金海로 들어왔다.(월간조산 2004년 4월호) 하게 된다.
 
이와같은 허왕후 실체에 대한 접근은 四州省(사주성) 安岳縣(안악현)의 옛 이름이며 後漢 光武帝(광무제) 건무 23년(서기47년) 南郡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착민들이 봉기하여 漢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의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힘겹게 진압하였다. 반란군을 일으킨 토착인구 7000명을 江夏(강하 현 武昌지방)로 이주시켰다. 서기 47년이면 許黃玉의 가락국 도착 사건보다 꼭 1년 전 이다. 이후 2차 반란이 일어났고 그 중심에 許聖이 있다. 정부군에 패한 이들은 江夏로 이주되었으며 당시 15세 소녀가 양자강을 타고 황해로 나와 가락국에 도착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인도의 어느 지역이 아니라 중국이며 許라는 성은 세습되는 직업신앙인(巫師)이다.
 
인적 물적 교류가 없던 인도의 공주의 방문을 미리 예견한 왕비를 만나 첫 대화가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이 결혼을 미룬 이유와 오는 날에 임박해 도착할 장소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날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아니라 같은 지역 출신으로 모두 도래인으로 볼 수 있다.
 
아유타국이 인도,태국 등 먼 외방이 아니라 동일언어권이다. 그것은 만났을 때 언어적 장벽이 없다는 이유를 들수 있다. 또 허황후가 올 것을 알았다는 것은 우연적 결혼이 아니라 오랜 기간준비된 정략혼의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 또 하나 첨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허황옥’이 스스로 도래했다고 밝힌 ‘아유타국(阿踰陀國)은 과연 어디인가의 문제다. <가락국기>를 살펴보면 허황옥은 처음 가락국 해안에 도착했을 때 맞으러 나온 유천간 등과 대화했고, 수로왕과의 첫날밤에 그와 독대하여 장황하게 자기 소개를 했던 것으로 보아 아유타국은 가락국과 동일 언어권에 있었던 나라다.
 
그리고 허황옥의 부모가 딸 하황옥의 배필로 수로왕을 미리 점지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수로왕의 명성을 전해 들은 지역적 근린성을 예감할 수 있다. 그리고 수로왕의 경우 허황옥이 올 것을 미리 보고 유천간 귀신간 등을 파견하여 기다리게 했던 것은,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사가 미리 심부름꾼들이 오간 예정된 혼사였음을 아울러 말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유타국은 석탈해의 경우 ‘용성국(완하국)과 비슷한 근린 국가의 한 탁칭일 수 있다.
 
허왕후가 가야에 도착하면서 김수로왕에게 밝힌 아유타국 공주라는 신분은 조선 중기 정조16년(1792) 김수로왕릉 주변에 들어서는 건축물에 처음 등장하는 쌍어문 문양이 조각되면서 설화적 요소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가야시대부터 지금까지 유지된 건축물이 아닌 200-300년 전 건축물을 1천년 이상 이어온 것이란 관대한 학문 풍토가 결국 설화적 요소가 배제된채 역사속으로 편입된었다. 조선 인조25년 ‘가락국 수로왕비(駕洛國 首露王妃) 普州 太后 許氏陵(보주 태후 허씨능)’비명은 중국에 등장하는 유사지명에 거주하는 허씨 일족으로 확대해석되었다.
 
쌍어문, 허왕후 비문에서 발견되는 문양, 글귀가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영속성 유무를 재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중기 건축양식과 노동에 동원된 사람(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중목
우)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70번지 (83길 21)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