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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불교⑲식민지시대와 승가재건

이치란 | 기사입력 2017/02/20 [14:47]
유럽열강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던 실론불교

현대세계불교⑲식민지시대와 승가재건

유럽열강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던 실론불교

이치란 | 입력 : 2017/02/20 [14:47]
스리랑카의 불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역사적 굴절 또한 심각했다. 인도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이어 받았지만, 이런 전통을 미얀마와 태국에 그대로 이식해 주고 근대에 이들 나라로부터 다시 역수입하는 등, 승단의 우여곡절은 아슬아슬하였다. 스리랑카 불교에 얼룩을 낸 데에는 유럽열강도 크게 한 몫을 하게 된다. 조용한 불교국가인 실론에 닻을 처음 내린 나라는 포르투갈로서 1505년이었다. 처음 닻을 내린 포르투갈이 파악한 바로는 실론 섬은 7개의 전국(戰國)으로 분할되어 대립하고 있었고, 외침을 막아낼 여력마저 없었다.
 
▲ 스리랑카 동부해안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해안요새(16세기), 나중에 네덜란드가 점령.    

포르투갈은 이 아름다운 섬에 반했고, 아시아의 식민지 개척과 무역을 위한 교두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포르투갈은 1517년 콜롬보 항구 도시에 요새를 구축했고, 1592년에 이르면 섬의 전체 해안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중요 요충지를 요새화하고 통제를 가 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신할라족들은 해안에서 점점 안으로 밀리면서 내륙 깊숙이 고지대에 있는 캔디에 수도를 정하고 방어에 임했다. 종교적으로는 많은 신할라족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당했고, 해안가의 무슬림들은 종교적 박해를 받으면서 내륙 고지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스리랑카 무슬림은 남인도의 타밀족과 중동에서 온 아랍인들이었는데, 대체로 이들은 수니파에 속한다. 타밀어를 사용하는 타밀족은 남인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인도에서부터 이미 무슬림으로 개종한 뒤였고, 신할라 족과는 인종과 언어가 다른 민족이다.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면서 신할라족과 대립하고 있다. 섬의 동북부 지역에 주로 분포해 있으면서 분리 독립운동을 요구하고 한동안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전선을 구축, 내전을 주도했다. 내전은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되었고, 스리랑카 정부군은 26년 만에 이 지역을 완전히 소탕, 제압했다.
 
▲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가 분리를 주장했던 지역.    

아랍 이슬람은 중동국가에서 무역 때문에 실론 섬에 정착한 무슬림들로서 타밀어를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여서 지금은 혼합된 상태이다. 한편 다수를 차지했던 신할라족은 불교가 주류 종교였다. 불교도들은 포르투갈의 점령을 극도로 싫어했고,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서 또 다른 외세인 네덜란드를 끌어 들였다, 네덜란드 선장은 1602년 실론 섬에 상륙했고, 캔디 왕은 도움을 요청했다. 라자싱헤 2세 왕은 네덜란드와 1638년 조약을 맺고, 실론 섬 대부분의 해안을 점령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격퇴하고, 전 해안 지역을 캔디 왕에게 찾아주는 대신, 섬 전체의 무역독점권을 인정하가로 약속했다. 네덜란드는 1656년 콜롬보를 점령하고 4년 후에는 섬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개신교도였던 네덜란드는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했고, 불교 힌두 무슬림들은 그대로 두었지만, 포르투갈보다도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네덜란드는 브리티시가 올 때 까지 150년(1640–1796)간 섬을 지배하게 되면서, 네덜란드와 지역민사이의 혼혈족을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 프랑스 나폴레옹의 결정적 패배를 안겨준 워털루 전쟁(1815년).

영국(Great Britain)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랑스에 점령당한 네덜란드가 실론 섬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1803년부터 1815년까지 유럽의 동맹과 대립한 전쟁이다. 프랑스의 힘이 빠르게 커져 프랑스 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 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프랑스는 반도 전쟁과 러시아 침공에서 비참한 패배를 겪고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어서 프랑스는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제2차 파리 조약(1815년)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이 전쟁은 또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불러왔다. 동시에 프랑스의 점령으로 스페인이 약화되면서 스페인이 지배하던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맺고, 네덜란드가 점령한 실론 섬의 지역을 브리티시에 양도하도록 했다. 실론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803년 브리티시는 캔디 왕국을 공격했고, 몇 차례의 전쟁에 끝에 1815년 브리티시의 직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론의 브리티시 식민지는 133년(1815–1948)간 지속되었다. 실론의 역사, 실론의 불교는 이처럼 유럽의 역사와 전쟁과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제 실론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실론불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를 겪으면서 기독교 선교활동도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전쟁 중에 불교 승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590년대에 이르면, 실론 불교승가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새로 입문하는 승려에게 수계해 줄 비구가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거의 2세기에 걸쳐서 불교승단은 공백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불교승단은 말이 아니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계맥(戒脈)에 의해서 법통이 이어지는데, 이것을 우빠삼빠다(Upasampadā)라고 하는데, 한역(漢譯)에서는 구족계(具足戒)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계율의식을 말한다.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이며, 비구에게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348계가 있다. 불교에서 출가하는 것은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는 뜻이며, 구족계를 받게 되면 정식 승려가 된다. 이 구족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법랍을 가진 비구가 최소한 3〜5명이 있어야 계단(戒壇)이 차려지고 정식으로 수계를 줄 수가 있다. 불교 승가의 맥을 이어가는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조건을 갖춰야 한다. 실론 섬이 외세의 점령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륙의 깊숙이 천도한 캔디왕조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도 왕과 신도는 있었지만, 승단을 구성하는 비구가 없을 정도로 승가가 피폐해져 버리자. 당대 키르티 스리 라자 싱하(Kirti Sri Raja Singha 재위: 1747〜1782) 왕은 승단복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아서 시암(태국)에서 일단의 비구들을 초청해 와서, 비구계단을 재건하고 수계를 받게 하였다. 1753년에는 웰리위타 스리 사라난카라 테로(1698〜1778)에게 실론 승가의 최고위직인 상가라자(승왕=종정)의 지위를 부여하고 승가를 재건하도록 했다.
 
▲ 실론 캔디 왕조에 의해서 임명된 상가라자(승왕:웰리위타 스리 사라난카라 테로).    
▲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캔디 불치사.    
2세기 동안 단절된 실론의 승단을 재건한 실론불교는 새 출발을 하게 되었고, 실론불교는 시암(태국)승가에서 계맥을 계승해 와서 시암파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실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고 있는 국가이다. 키르티 스리 라자 싱하 왕은 실론 승가를 복원한 것만이 아니고 불치사(佛齒寺)를 건립했다. 인도에서 이운(移運)해 온 불치는 실론 왕통계승의 상징이요 국보로서 옥새 이상의 법보(法寶)역할을 했다. 이 불치를 보유해야 왕통(王統)을 인정받았다. 역성혁명기(易姓革命期)에는 누가 이 불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국권의 정통성이 좌우되기도 했다. 실론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성을 계승한 종가였지만, 내부타락이 아닌 외침에 의해서 타율적인 요인으로 승가가 부침했다. 승가재건에 있어서도 적당이란 없었다. 법통성과 정통성을 존중해서 합법적인 계맥의 계승을 통해서 승가를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사미승의 맥은 결코 단절된 적이 없었으며, 교학(敎學)의 학맥 또한 단절된 바 없었기에 현재에도 세계불교학의 종가로서 그 위상과 권위는 절대적이다.
보검(해동 세계불교연구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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