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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무라이 ‘다카야마 우콘’ 시성식 거행

매일종교 뉴스2팀 | 기사입력 2017/02/21 [21:24]
400여년 전 영주의 직위 버리고 가톨릭 신앙

日 사무라이 ‘다카야마 우콘’ 시성식 거행

400여년 전 영주의 직위 버리고 가톨릭 신앙

매일종교 뉴스2팀 | 입력 : 2017/02/21 [21:24]

일본 1627년 26명 순교자 첫 시복식 이래 42명의 성인과 394명의 복자
 
400여년 전 일본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시대 초기에 영주의 직위를 버리면서까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다 외국으로 추방돼 숨진 다카야마 우콘 무사(사무라이)의 시복식이 지난 7일 오사카에서 집전됐다.
 
‘오사카 조(城) 홀’에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거행된 유스토 다카야마 우콘의 시복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신해 성인 후보의 심사 전 과정을 관할하는 로마 교황청 시성성의 장관인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에 의해 집전됐다.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된 이날 시복식에는 일본과 필리핀, 한국 등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모인 2명의 추기경과 30명의 주교, 300명의 사제들과 더불어 신자 1만여명이 참석했다. 1천명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필리핀 성찬 송가 ‘살라맛 사 이요’(주께 감사드립니다)를 축송했다.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타카야마 우콘을 복자로 선언하는 교황 교서를 대독하면서 그를 세속적인 성공과 물질적 안락보다 신앙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초기 일본 가톨릭 교회의 신앙적 기둥으로 추앙받는 다카야마 복자는 센고쿠(전국) 시대 말인 1553년 일본 중부 나라현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처음 전하기 시작하던 때다. 1563년 그의 아버지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직후인 10세 되던 해에 ‘유스토’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가신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등 돈독한 신앙을 실천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 집권 동안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교회를 파괴하겠다는 수차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자신의 영지를 지켰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70년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고 명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영주(다이묘) 자리와 소유 재산, 군대를 모두 버리고 평범한 무사(사무라이)로서 궁핍한 도피 생활을 선택했다. 하지만 도요토미의 후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4년에 결국 기독교 신앙을 전면 금지하면서 이듬해에 당시 스페인 통치 하에 있던 필리핀으로 추방됐다. 그는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지 44일만에 현지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다카야마 무사의 시복 절차는 그가 사망한 지 불과 15년 뒤인 1630년에 마닐라 대주교에 의해 신청됐으나 일본의 기독교 금지 정책으로 인해 관련 자료 수집 등의 절차를 진행하지 못해 무산됐다. 그 후 1963년에 절차가 재개됐고 1994년에 성인 심사의 첫 단계인 ‘하느님의 종’ 호칭이 부여됐다. 그리고 다카야마 무사 사후 400년만인 2016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최종 승인됐다.
 
가톨릭 교회는 앞으로 전 세계 신도들로부터 다카야마 복자의 시성식을 충족시킬 ‘기적’을 접수받아 성인품에 올릴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현재 일본 가톨릭 교회는 1627년 26명의 순교자에 대한 첫 시복식이 거행된 이래로 모두 42명의 성인과 394명의 복자가 있으며 이번 다카야마 복자의 시복식은 다섯 번째로서 교회 역사상 복자 1인을 위해 단독으로 거행된 최초의 시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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