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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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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1. 잘 죽는 법, 통과의례에 관한 성찰
기사입력: 2017/02/22 [17:3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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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특집 ‘사후세계’ 전재합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사후세계’에 관한 동서고금의 고찰을 다룬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의 자매 월간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20개국 언어, 37개국에서 공동발행하는 국제전문시사지로 국제 이슈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뿐만 아니라 인류보편의 가치인 인권, 민주주의, 평등 박애주의, 민주주의, 환경보전, 반전 평화 등을 주창하는 독립대안언론이다.
본지에서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월호에 실린 ‘사후세계’ 특집을 전재해 영혼과 죽음, 내세와 저승, 부활과 윤회 등 종교적 과제들을 정리해보는 계기를 마련해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http://www.ilemonde.com 한국어판은 시중 서점과 인터넷 서점 등을 통해 구독할 수 있으며 1년 이상 정기구독자에게 온라인 상의 모든 기사와 PDF, 프랑스 기사원문을 무료로 제공한다.

본지에 전재되는 ‘사후세계’ 특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편집자 주)
 
1. 잘 죽는 법, 통과의례에 관한 성찰(장 필립 드 토낙)
2. 영혼의 저울질, 삶의 인과응보(세르주 라피트)
3. 영생을 위한 통행증, ‘사자의 서(書)’(플로랑스 컹탕)
4. 티베트 불교의 내세(로랑 데아예)
5.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세르주 라피트)
6.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세르주 라피트)
7.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이세 타르당마스켈리에)
8. 죽은 자와의 대화는 가능한가?(지오르지아 카스타뇰리) 

▲ <카론은 강 스틱스를 가로질러 영혼을 운반한다>,1835~1890 - 알렉산더 D.리토브첸코     
 
잘 죽는 법, 통과의례에 관한 성찰
 
신자유주의의 갈퀴가 거세게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삶의 아픔과 절망이 똬리를 튼 채 우리를 억누른다. 현세의 삶이 고달플수록, 이승 밖의 세계는 유혹적이다. 정치권은 각박한 현실을 감미로운 마법의 정치로 마취하지만, 영악한 TV와 영화 등 대중매체들은 자신들도 경험하지 못한 사후세계의 흥미진진한 만화경을 풀어헤치며,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 본지가 뜬금없이 사후세계의 삶을 특집으로 기획한 것은, 우리의 삶 앞에서 좀 더 겸손해지자는 취지에서다.
 
플라톤, 에피쿠로스, 몽테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삶과 직결된 죽음의 문제는 인간의 중요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돼왔다. 각 사회는 저마다 장례의식에 의지해 망자가 저승으로 떠나가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삶과 죽음. 떼려야 뗄 수 없는 샴쌍둥이 같은 관계. 아무리 ‘죽음’을 가장 유물론적으로 탐구한 이론조차도 결코 삶과 죽음의 이러한 선택적 친화성(이 용어는 처음에 물리학에서, 다른 어떤 물질보다 어느 하나의 물질과 결합하는 경향을 가진 물질의 특성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됐다-역주)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후 세계를 어떤 식으로 상상하든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긴 항해를 떠나는 배에 승선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순간에 검은색 옷차림의 선원이 홀연히 나타나 여행을 계속할지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예고 없이 배 밖으로 여러분을 던져버릴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여러분의 손에 영원히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 승선권이 쥐어져 있다면? 과연 그러한 경우에도 여러분은 똑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만끽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언제든 배 밖으로 내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정상적인 항해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찌 머릿속이 저 쪽에 가지 않은 채로(죽지 않은 채로) 온전히 이쪽에만 있는 것이(살아 있는 것) 가능하겠는가?
 
몽테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죽음에 관한 다양한 가르침을 종합할 방법을 탐구했다. 그리하여 <수상록> 제1권 제22장에서 그 큰 틀을 제시했다. 몽테뉴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현대사회는 생의 종말에 의연히 맞섰다. 다른 대목도 그렇지만 제22장에서도 몽테뉴는 인간적이면서 비교조적인 양식 있는 스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대의 삶이 지속적으로 하는 일이란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대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 안에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때에는 이미 죽음 저편에 가 있을 것이므로.” 항해의 비유에 빗대 다시 풀이해보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인생의 여정에 마지막 종착지가 없다 해도 인간은 똑같은 마음으로 항해를 만끽할 수 있을까? 똑같은 여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을까?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이도, 무신론자도 모두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에 승선한 승객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배에서 내려야만 한다. 그러니 행운을 빌 수밖에. 부디 조금이나마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사실 어떤 사회도 이 ‘죽음’이라는 검은 태양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탈종교 현대사회는 다른 시대와 구분되는 고유한 죽음의 의식을 정립하지 못했다. 또한 전통사회의 경우처럼 ‘잘 사는 법’과 직결된 ‘잘 죽는 법’을 제대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가 더 이상 죽음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간주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려왔다. 가령 인류학자 루이 뱅상 토마는 죽음의 ‘부인’에 대해, 그리고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의 ‘금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위의 ‘사실’이야말로 현대인이 노화와 죽음이라는 견디기 힘든 문제를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감내할 만큼 두려움을 초탈한 세속적 존재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기존의 인간에 관한 기록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별한 존재임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단 한 번도 죽음에 굴복해본 적이 없는 올림푸스의 신들과 달리, 유한한 인간은 언젠가는 본인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누가 앞서고 뒤서는지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사실을 아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상상이나 ‘신앙’의 힘을 빌려 이러한 필멸의 숙명을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삶의 배후에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삶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삶의 기간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착안한 여성과 남성이 한 몸을 이루는 남녀추니라는 태초의 존재와도 비슷했다. 모든 인간사회는 저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한 몸으로 내밀히 뒤엉킨 인간의 삶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지 고민했고, 죽음의 순간 찾아올 삶과 죽음의 분리에 대해 성찰했다. 물론 현대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 플라톤이 생각해낸 태초의 짝처럼 서로 한 몸으로 얽혀있다는 생각은 결국 애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잘 사는 법’을 정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리스 철학은 역사적으로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가장 자유롭게 고민한 탐구의 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이란 곧 필멸하는 육체와,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영혼,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Luein)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짝에게서 각각 기대할 수 있는 비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도 우리의 몫이며, 육체와 영혼 중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였다. 플라톤에게 철학자란 분명 육체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영혼을 깨끗이 정화하고, 감각적인 것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 즉 ‘죽음을 준비하는 자’였다. 반면 그와는 정반대로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오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현생의 삶을 즐기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거부했다. 그는 죽음이 모든 감각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인간이 무엇보다 감각의 존재라면, 결국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원(에피쿠로스는 정원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식물을 키우고 흙을 돌보며 철학을 논했다-역주)의 철학자가 정립한 쾌락 사상은 결코 방탕한 삶을 찬미하는 찬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불안감의 부재를 의미했다. 오로지 불안감을 벗어던질 때 비로소 인간은 영혼의 평정심을 찾고 지상에서의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모든 고대 시대의 사상, 중세 말의 ‘아르스 모리엔디’(죽음의 기술), 17세기의 ‘신명초행’(다블뤼 주교가 역술한 신앙생활을 위한 묵상서-역주), 그리고 몽테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이 동등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이들은 평소 올바른 생활 태도로 죽음을 준비하며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죄인으로 생을 마감하며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고대의 사상은 훗날 최후의 심판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 뿌리가 됐고, 죽음을 영생의 문제와 강압적으로 결부시키며 종말의 공포를 불어넣는 이른바 ‘공포의 목회’가 서구에 널리 유행하는 밑바탕이 됐다. 매일 죽음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기독교도는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까지는 아닐지라도, 각종 형태의 공포에 담담하게 맞설 수 있게 됐다.
 
올바른 삶을 살아야 사후에 영혼이 진정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견해는 비단 일신교의 종말론만이 아니라 동양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인도사상에서 화장은 모든 것을 헌신해온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마지막 남은 육신마저 아낌없이 바치는 ‘최후의 봉헌(Antyeshthi)’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 최후의 봉헌은 환생의 피날레다. 말하자면 수차례의 통과의례, 즉 겹겹의 윤회를 통해 한 인간이 보다 고결한 존재로 거듭나고, 종국에는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의 중요성
 
죽음은 관계의 절연을 의미한다. 가령 망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와 이별하고, 영혼은 자신을 둘러싼 육신의 껍데기(플라톤은 ‘영혼의 무덤’이라고 했다)로부터 벗어난다. 뿐만 아니라 땅에 매장된 육체의 경우에는 죽음에 의해 살과 뼈가 분리된다. 그리하여 살은 먼지로 돌아가고 뼈는 일종의 영속적인 삶을 시작한다.
 
이처럼 내밀하게 통합된 것을 분리해야 한다는 원칙이 바로 죽음의 의식을 이루는 중요한 뼈대다. 이런 원칙에 의거해 비로소 모든 존재는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고히 한다. 사실상 어떤 전통에서든지, 죽은 자가 이승 저편으로 떠나지 못한 채 산 자들 곁에 계속 머무는 것만큼 애통한 일은 없다. 따라서 전통사회든 현대사회든 이처럼 삶에 속하는 것과 부패 및 죽음에 속하는 것을 구분하는 데 집요하게 매달렸고, 대단히 공을 들여 통과의례의 절차를 단계별로 규범화했다.
 
가령 공동체는 임종하는 자 곁에서 도움과 온정을 베풀기 위해 결속한다. 그들은 고인이 이승 저편으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킨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살아남은 자들끼리도 긴밀히 결속한다. 산 자들끼리 단단한 방어벽을 세우고, 저 거대한 어둠의 심연이 고인과의 이별로 상심에 빠진 그들 중 누군가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아낸다. 임종하는 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불가침의 권리인 ‘사랑의 책무’는 말하자면 비단 죽음으로 인해 고립된 고인이 세상을 잘 떠나가도록 도와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신자들은 물론, 무신론자(죽음을 앞둔 자에게 행하는 연명치료와 각종 지원 등을 떠올려보라)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조종을 쳐 알리기도 했지만, 일단 어떤 식으로든 임종이 공식화되면, 산 자들은 망자의 영혼이 육신을 쉬이 빠져나가 이승을 완전히 떠나도록 곁에서 돕는다. 육신에 기거하던 주인이 떠날 수 있도록 시신을 흔들고, 창문과 문을 모두 활짝 열어두며, 집 밖에서 망자를 불러내거나, 지붕 위의 기와를 한 짝 떼어내거나, 영혼이 들어가지 못하게 모든 용기의 뚜껑을 닫아놓는다.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관례를 통해, 망자가 산 자들 곁에 머무르며 그들을 위협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빨리 이승을 떠나도록 유도했다. 가령 마을 사람들이 전부 장례식 전날 상갓집에 모여 밤샘을 하던 관습도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무턱대고 망자가 이승을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사람들은 주검으로 변한 망자의 육신을 직접 돌보며 (매장이나 화장을 통해) 영혼이 이승 저편을 찾아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켰다. 장례식 도중 살아있는 자들은 조문을 읽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일정한 의례를 거쳐(종교적인 의례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망자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나 문화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망자의 존재에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온전한 연속성을 부여했다.
 
그 다음에는 고인의 가족과 친지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언제나 시간의 촌각을 다투는 현대사회는 이런 애도의 과정을 생략해버릴 때가 많다. 현대사회의 경우에도 물론 고인을 염려하는 마음은 그대로이지만, 모든 장례의식의 주인공들이 함께 장례의 과정을 훌륭히 치러내기 위한 어떤 체계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규범은 부실하다. 어쩌면 현대 죽음의 의례가 지닌 이런 터무니없는 취약성 때문에, 고인이 된 윗세대를 깨끗이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런 어려움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망자들 때문에 이토록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닌지, 장례식 때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것과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 때로는 심리치료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 필자 장 필립 드 토낙은 저술가 겸 편집자로 프레데릭 르누아르와 함께 2004년 <죽음과 불멸>에 관한 지식과 신앙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을 펴냈다. 2010년 10월 로베르 라퐁 출판사에서 출간된 <빵에 관한 보편적 사전(Dictionnaire universel du pain)>을 편찬하는 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번역: 허보미·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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