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6장 ‘혼(魂)에 대하여’ - 지성

정영부 | 기사입력 2023/01/26 [18:50]
정신과 생각 그리고 의식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6장 ‘혼(魂)에 대하여’ - 지성

정신과 생각 그리고 의식

정영부 | 입력 : 2023/01/26 [18:50]

  © 매일종교신문


이번 회는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6()에 대하여정신체(지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지성

 

지성(知性, intellect)의 사전적 의미는 지적 능력’,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으로서 감정이나 의지와는 달리 사물을 개념(槪念)에 의하여 사고하거나 또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판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표준이론에서 지성은 정신이 양심의 영향을 받아 발달시키며 오성(悟性)’이성(理性)’을 포함한 정신의 최상위기능으로서 정신 전반을 지배한다.

 

오성(悟性)은 감성(感性)과 대립되는 의미로 직관이 아닌 추리적 사고(推理的思考)에 의한 인식으로 이성의 하위개념이다.(1) 따라서 인간의 인식능력은 감성에서 오성, 이성, 지혜, 직관으로 이어진다.

 

이성(理性)性質이 아니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양심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정신에 속한 기능이다.

 

지성은 정신의 기능이라고 보지만 혼만 있고 영이 없는 사람은 양심부분이 약할 것이니 자연히 영이 없는 사람은 양심도 취약하고 지성도 부족하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지성은 지능과 다르다. 지능(知能)은 장기(臟器), 즉 몸뇌(두뇌)와 혼뇌의 두 성능에 따라 좌우되는 능력이다.

 

지성은 칼처럼 창조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파괴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 또한 무지의 거품을 제거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살해할 수도 있다. 지성은 영성이 있어야 바르게 쓰일 수 있다.(2)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영(영이 없으면 아쉬운 대로 양심)의 성품이 드러남이요, 영의 활동이다. 영성이 없는 지성(智性)은 혼을 망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논문 영혼에 관하여(peri psychēs)에서 삼혼설(three psyches)을 주장하면서 인간에게는 지혼이 있고 그 특징적 기능은 logosnous라고 말한다. 이는 상위정신체와 양심체의 대표적 기능인 지성과 예지를 각각 의미한다.(3)

 

  정신과 생각 그리고 의식

 

정신과 생각 그리고 의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생각(思考)의 사전적 의미는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등의 정신 작용이다. 또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즉 각성과 인식의 합()’이다. 생각과 의식이 모두 인식기능을 품고 있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생각은 헤아리고 판단하는 고차원적 기능이 이니 아무래도 의식보다는 생각이 혼의 고급기능일 것이고 표준이론은 이를 知性 정도로 본다. 표준이론에서 혼의 본격적인 의식기능은 각혼의 각혼의식에서 시작되고 이는 불교의 제6분별식에 해당한다고 보는 만큼 정당한 자리매김이라고 하겠다.(4) 이러한 의식이 발전하면 제6식이 제7식의 아함카라(5)가 되듯 자의식인 에고가 된다.

 

따라서 의식은 각혼의식과 자의식으로도 구분되는데(6) 각혼의식은 하위정신인 감성과 욕망을 가진 각혼의 의식이고 자의식은 상위정신으로 욕구와 감정 그리고 지성을 가진 지혼의 의식이다.

 

표준이론에서는 이를 에고라고 하며 이기심과 자존심을 그 속성으로 본다. 표준이론에서 정신(精神)은 이러한 각혼의식(하위정신체)과 자의식(상위정신체)으로 구성된다.

또한 의식과 생각은 기억을 주요재료로 하여 이루어진다. 기억이 없으면 마음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다. 무념(無念)이 되기 때문이다. 무주공산하는 마음이야 모든 종교에서 탐하는 텅 빈 마음이 되겠으나 실생활을 무주공산으로 살다가는 하늘의 별을 헤아리다 구덩이에 빠진 탈레스(Thales of Miletus)가 된다. 한편 무주공산이라 하여 산()이 없는 것은 아님에도 현대정신의학은 생각과 의식을 기억으로 환원하여 산마저 없애려 든다.

 

  두뇌의 성능은 어떻게 결정되나

 

정신은 생각’, 의식활동을 함으로써 드러난다. 성능 좋은 뇌를 가질수록 생각은 고차원이 된다. 인간의 뇌가 지구 생명체 중에서는 제일 성능이 좋다.

 

인간의 뇌는 진화를 통하여 성능이 좋아졌다. 그러나 몸의 뇌는 혼의 뇌, 즉 혼의 장기인 생기체의 뇌가 통제한다. 사실 뇌의 실체는 혼뇌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혼뇌의 화신(化身)이 몸뇌. 따라서 몸뇌의 진화는 혼뇌의 진화에 기인하고 혼의 진화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은총이다.

 

병들지 않은 보통 사람의 뇌라면 주로 혼뇌에 의해 생각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자기의 뇌가 퍽 쓸 만했다고 생각하고 무슨 물리적인 특성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 나머지 자기 사후에 이를 해부해 보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해부해 보니 평균보다 조금 큰 것 외에 아무 특성이 없었다.

 

그의 몸뇌는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는 편이었나 보다. 그의 스마트함은 대부분 혼과 영의 뇌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는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머리 좋은 자식이 태어나는 이유는 우월한 유전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혼뇌가 좋은 혼이 머리 좋은 부모를 선택한 것에도 있다.

 

  데카르트의 자아수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구(名句)는 생각이 자아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의미다. 생각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精神이니 정신이 있는 것을 보니 아()가 있는 것을 알겠다라는 뜻인데 표준이론에는 자아의 방에 정신체뿐 아니라 양심체와 영이 더 있으니 그의 자아는 정신체만의 자아로 2단계의 자아였거나 아니면 양심체와 영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1) 칸트는 오성이 추리적 사고에 의한 인식능력으로 수학적 자연과학을 성립시키는 장소라고 한다.

2)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김정우 옮김, 12

3) logosnous는 표준이론에서 각각 지혜와 예지다. 그러나 이는 사용하는 사상과 사람에 따라 그 뜻이 달라 여기서는 지성과 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註釋>

 

1) ‘생각에 대한 생각들

 

생각과 의식이 모두 인식기능을 품고 있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생각은 知性 으로, ‘분별식인 의식보다는 상위기능이다. 생각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모아보자.

 

1. 생각은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여 결론을 얻어 목표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는 정신 작용이다. 생각은 지각이나 기억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고 또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활동이다. 또 귀납적 사고, 연역적 사고와 같이 추론의 종류에 의해서 생각을 분류해 볼 수도 있다.

 

2, 생각은 혼의 것인가?

 

1) 불교의 3계중 최고위의 계가 무색계이며 그 최고수준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비상비비상처는 혼의 기반인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곳으로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곳이다.(5.5.2.1. ‘대승(大乘)의 저승중 비상비비상처 참조) 이를 보면 불교에서 생각은 거의 번뇌(煩惱)의 다른 말이다. 번뇌는 혼의 것이다. 번뇌를 그치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 열반이요 열반은 비상비비상천의 다음 단계 즉 도피안이 아닌가.

 

2) 명상에서도 생각을 그치는(초월) 것 또는 생각을 바라보는(통찰) 것이 명상의 최고수준인 삼매라고 한다.

3) 표준이론에서도 생각은 혼의 상위정신체의 상위기능인 지성 정도로 본다.

4)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며 생각을 혼의 정수로 보았다.

5) 생각은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등의 정신의 작용인데 情神은 정신체 즉 혼의 것이니 생각도 혼의 것이다.

 

3. 이런 논의들을 보면 생각이 정말 혼의 전유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 영은 생각을 하지 않는가? 생각은 혼이 혼뇌와 몸뇌를 써서 행하는 혼만의 기능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마치 자의식이 에고이고 에고는 저열한 것으로 구축의 대상이며 죽여야 영이 산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자의식(에고)은 혼영의 일부 속성이다. 지혼이 상위정신체와 개체성을 확보하며 귀한 에고를 얻었다. 그 에고에 짐승 출신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天刑으로 묻은 이기와 자존의 얼룩을 닦아내는 것이 자아의 실현이다. 또 그 과정에서 영이 자아의 방에서 혼을 극복하고 혼을 靈化의 길로 이끄는 것이 자아실현이다. 에고나 혼을 제거하고 구축하는 것이 자아의 실현은 절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각은 번뇌라는 때로 얼룩진 것 뿐이지 생각자체가 번뇌는 아니다. 생각은 존재가 자신을 구현하는 현상이요 양식이지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생각은 영도 한다. 생각이 없는 영이 무슨 존재란 말인가.

 

4. 생각은 사상(思想), 사유(思惟)라고도 한다.

1) 사상은 그때그때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한 일관되고 통일된 내용이다. 따라서 단순한 직관의 입장에 그치지 않고 직관에 논리적 반성을 곁들여 이룩된 생각의 결과로서 원리적 통일을 지니는 판단 체계가 사상이다. 따라서 사상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정한 견해의 뜻이 된다. 그러한 견해로써 사상을 발표하고, 또한 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을 두고 사상가라고 부른다.

2) 또한 사상철학을 비교하면 사상은 철학을 포함하여 정치, 경제, 윤리, 문학, 역사, 종교, 과학, 예술 사상 등과 같이, 아주 폭넓은 뜻으로 쓰인다. 표준이론도 일종의 사상이다.

3) 생각이라는 것은 경험을 하면서 유동적으로 바뀔 수는 있으나 한번 정해진 사고의 틀로서 사상은 바뀌기 힘들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자신의 사고틀을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다.

 

5. 신경과학자 제랄드 에델만과 고차의식으로서의 생각

제랄드 에델만(Gerald Maurice Edelman 1929~2014)은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항체의 화학적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197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초기 연구분야는 면역학이었으나 면역학에서 얻은 명성을 후에 신경과학과 인지, 의식 분야에 적절히 활용한 인물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각에서 자아(self)의식이 촉발되며 생각은 언어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의식은 포유류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1차의식과 인간에 와서 가능해진 언어로 촉발된 고차의식으로 구분된다.

 

1) 1차의식

1차의식이란 언어가 생성되기 전에 형성되는 것으로, 개 또는 고양이 정도의 포유동물이 가지는 의식이다. 이는 표준이론의 하위정신체인 이드 수준의 의식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차의식은 장면들이 시간과 더불어 연속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현재로서 간단한 장면의 생성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기억과 학습은 두뇌의 시냅스(synapse) 상태의 통계적 변화로 나타난다.(미주 의식의 발생과정과 그 정체참조) 그러나 에델만의 1차의식이 기억된 현재로서 간단한 장면의 생성이라면 불설의 제1식인 안식(眼識) 정도이고 달리 보면 표준이론에서 불설을 좇아 식물의 의식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현식(現識)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논리진행을 위하여 1차의식은 각혼의식 즉 이드 수준의 의식으로 치자.

2) 고차의식과 생각

동물들의 1차의식 작동 상태에 언어가 더 추가되어 생성된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대뇌 부위에는 운동언어 영역인 브로카 영역(Broca's area)’과 감각언어 영역인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이 있어 언어를 생성하는데 언어 중추에서 브로카 영역은 출력을 담당하고 베르니케 영역은 입력을 담당한다. 이들이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과 연결되어서 생성되는 것이 바로 고차의식이다.

 

이러한 주장이 늘 그렇듯이 고담준론(高談峻論)을 가장하는데 그 실체는 準論이다. 담장을 둘러치고 들어앉은 론에 못 미치는 잡론이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은 시의적절하면 곧 자연과학교로 변질된다. 에델만도 그 분야의 교주(敎主). 쓸 데 없지만 표준이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고차의식은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고차의식이 생성되면서 현재가 연속적으로 흘러가 미래와 과거가 생기게 된다. 인간은 매 순간 외부 자극을 처리하여 생존에 중요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한다. 저장된 기억을 불러내어 새로운 입력에 대응할 때 과거라는 의식이 생긴다. 그리고 과거의 정보가 쌓여 이루어진 상태가 현재이다.

현재의 자극 입력을 뇌가 처리한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대조한다는 것이고, 이는 바로 다음 순간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고차의식으로 가며 언어를 매개로 기억이 생성되는데 하나의 장면이 담긴 스냅사진들을 연결하여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그 결과, 과거, 현재, 미래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자의식이 생기게 되며 드디어 생각(지성)을 할 수 있게 된다.”

3) 고차의식에 대한 이러한 에델만의 이론은 언어신(言語神)찬가 또는 언어창조론이다. 그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선 ‘1차의식은 정지된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세워 의식이 기억에 기인하는 것으로 근거없이 못 박은 다음, ‘1차의식에 그가 모시는 言語神을 섞으면 고차의식 즉 인간의 의식(생각)이 마술처럼 제조된다는 것이다. 즉 정지된 장면은 언어 덕에 연속된 장면의 기억으로 진화하고 연속(連續)은 시간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며 거기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식하는 주체로서 의식이 탄생한다.

 

그의 이론은 도형적(圖形的), 음악적, 미술적, 표정, 몸짓, 꿈 등 언어 없이 행해지거나 언어 이전의 생각이 많다는 명확한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이에 주목하는 순간 그의 이론은 준론(準論)이 되기 때문이다. 에델만은 불립문자(不立文字)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언표불능(言表不能)의 생각 또한 허구 많다는 사실까지는 애초에 몰랐던 것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자신도 이해 못한 언어自動書記적 계시(啓示)인데 희한하게도 의식의 정체가 기억이라는 유물론적 시각의 과학(科學)에 중요한 논리적 기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 유물론적 뇌과학자들은 이렇게 한다.

 

記憶還生

 

기억이 쌓인 것이 나이니

어제에 오늘의 기억을 더한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가 아니다

 

오늘의 기억이 내일 또 바뀐다면

내일의 나는 더 이상 오늘의 나가 아니다

 

치매에 걸리면 강시가 되고 좀비가 되며

기억상실에 걸리면 나는 아예 죽은 것이다

 

환생한 나는 나를 기억 못 한다

그렇다면 기억이 나인 마당에

그는 내가 아님이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니 환생이 있다 한들 이미 환생은 없다

게다가 이는 부처님 말씀 아니던가

하하하

 

7. 유물론적 뇌과학자들이 보기에, 기억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기억은 뇌에 물리적으로 기록된 2진수 또는 16진수로 쓰여진 데이터이며 언젠가는 뇌에서 그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두뇌 변연계의 해마가 고장 나서 기억을 잃는 것은 臟器의 일부분이 고장 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사람이 기억을 잃으면 사망(死亡)이고 기억을 로봇에 심으면 완벽한 환생(幻生)이다. 치매환자나 기억상실증 환자는 이미 사망한 것이고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은 매일매일 죽어 가는 것과 같다. 사실 우리의 기억은 매일 매 순간 새로워지고 잃어버리며 변화하니, 불변하는 자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소위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는 아상(我想)은 색()에서 자극을 받아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 임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불설과 같은 주장으로 종교적 배경까지 갖추었으니 이제 진실로 통한다. 노자 또한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 하여 나를 나라고 이름 짓는 순간 그 이름은 더 이상 나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였다.(사실 이말은 그보다 더 고상한 뜻이지만 견강부회하자면 그렇다)

 

8. 그런데 과연 기억이 의식일까?(미주 치매에 대하여참조) 우선 도형, 음악, 미술, 표정, 몸짓, , 이심전심 같은 언어 아닌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아니 그런 것도 넓게는 언어라는 강변을 용납하더라도, 그래서 언어가 연속된 기억으로서 의식을 만들어 낸다는 에델만의 억지를 수용하더라도 과연 두뇌의 기억이 의식일까?

 

1) 우선 동물 이전의 생명체에도 의식이 있다. 식물이 사람을 알아본다거나 음악을 좋아하다는 사실, 광물인 물의 육각수 이론, 광양자 등 소립자에서 볼 수 있는 비국소성의 원리, 유령 DNA 효과 등은 그 기작(機作)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거기에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되어 있다. 따라서 기억이 의식이라면 식물과 물과 광자와 DNA에 기억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할 것이다.

 

2) 기억이 의식이라면 전원이 연결된 컴퓨터의 기억장치에도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메모리는 운영체제(O/S)와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의 처리 대상(對象)이지 주체(主體)가 아니다. 그러니 만일 컴퓨터에 의식이 있다면 오히려 메모리의 처리작업을 하는 O/S나 앱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O/S나 앱에 의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미친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거기에서는 기억타령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생명체에 와서는 다시 기억타령을 한다. 명백하고 쉬운 진실을 자신도 모르는 수사(修辭)로 가리는 기술 그것이 과학인가? 한편 그들이 즐겨 부르는 또 다른 노래가 ‘AI타령이다. 그러나 AI수준의 앱도 앱일 뿐이니 그것에도 의식은 없다. 그들은 이제 세월은 길다하며 시간의 신을 호출하겠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똥이 약이 되거나 고름이 살 되는 일은 없다.(미주269 ’명상과 컴퓨터참조)

 

3) 제랄드 에델만의 언어와 생각이론은 소설적이고 자의적이다. 기어코 과학으로 의식을 의식하여야겠다면 펜로즈의 의식에 대한 조화객관 환원이론에 의한 의식생성이론이나 봄(Bohm)양자 형이상학(quantum metaphysics)’(미주117 ‘로저 펜로즈와 하메로프의 의식에 대한 조화객관 환원이론참조)을 연구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9. 표준이론에서 의식은 동물의 혼인 각혼단계에서 발생하는 감성과 욕망의 이드하위정신체에서 처음 발생하는데 이를 각혼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동물도 의식을 갖는데 이것이 1차의식이라면 1차의식이다. 또한 동물 미만 단계의 생명체나 기의 한 형태로서의 물질이 갖는 의식은 원인의식으로 의식이라기보다는 아직 생명력이다.

 

또한 고차의식인 생각은 욕구와 감정과 지성인 자의식 즉 상위정신체의 활동이다. 그런데 동물도 고급동물은 마음이론(Theory of Mind)에 의한 자타를 구분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등 기초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 고차의식이 사람의 전유물이 아님이 증명되고 있다.(6.3.3.4. ‘감정참조)

 

ps) 변수 중 어느 것이 종속이고 어느 것이 독립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서로 영향을 주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언어와 생각 간의 관계도 그렇다.(에델만이 헷갈린 이유를 알겠다.) 언어가 생각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이 언어를 만든다.

 

그러나 주종의 관계는 있을 것이다. 언어와 생각 중에 누가 주이고 누가 종인가? 언어로서 단어는 인간의 지능활동의 소산으로 형성된다. 이는 단어의 수가 인간의 문명발달과 비례적인 함수관계에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언어는 지식을 넘어 지혜가 커질수록 단어나 의미소가 더욱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더욱 고차원이 되면 언어에 신의 섭리가 스며든다. 어느 한 사람이 또는 여러 사람이 공감하여 무언으로 약속한 개념들이 언어 속에 체화(體化)되는 과정에 진리가 스민다. 언어를 연구하면 신의 뜻과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다. 언어는 생각에서 얻은 지혜의 寶庫. 이처럼 논의를 진행해 보면 언어와 생각은 서로 영향을 주지만 생각이 독립변수요 언어는 종속변수임이 드러난다.

 

같은 논리가 생각과 나 사이에도 적용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인가 생각이 나를 하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면 생각이 나를 하는 것이고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고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나 에델만이나 주종(主從)을 가리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를 思惟로부터 연역된 존재 또는 생각하는 존재로 보아 최소한 그 주체(主體)의 당위성은 확인하였으니 애교나 있다.

 

4) 불교에서 의식(意識)의근(意根)에 기대어 대상을 인식, 추리, 추상(追想)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의식은 육식(六識)의 마지막 으로 하위정신체에 속한다. 따라서 제6식은 감성과 욕망에 기반한 하위정신체의 각혼의식(分別識)이다. 각혼의식의 아래에는 식물의 의식인 생혼의식(現識)이 있고 더 아래에는 원인의식이 있다. 각혼의식의 위에는 감정과 지성에 기반한 자의식으로서 에고가 있다. 불교 유식학은 이를 제7식인 말나식이라고 하고 삼키아에서는 아함카라(자의식)라고 부른다.

 

5) 제랄드 에델만은 이를 각각 1차의식, 고차의식이라고 한다. 에델만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결과 형성되는 의식의 속성에 대해서는 동감이다.(미주143 ‘‘생각에 대한 생각들참조)

 

  • 도배방지 이미지

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