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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⑯아브라함의 뿌리 (1)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3/01/17 [07:23]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⑯아브라함의 뿌리 (1)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3/01/17 [07:23]

여러분들은 어떤 미지의 낯선 곳으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한다거나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브람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큰 도성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그의 여정 가운데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미래는 오롯이 미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믿음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기서 가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레크”(lekh)가다”, “걷다”, “진행하다라는 뜻을 지닌 할라크2인칭 남성 단수 명령형인데, “너는 가라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단어 레카”(lekha)너를 위하여”, “스스로”, “네 자신이와 같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크 레카”(lekh lekha)너는 스스로 가라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글개역성경에는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되어 있고, 개역개정판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너의 고향으로부터, 그리고 너의 친족으로부터,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라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라고 지시받은 대상은 그의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는 아브람이 현재 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이며, 근거이자 기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삶의 토대요 기반이 되는 고향, 친족,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땅을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자세히 감찰하시고 탐지하신 땅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말씀의 원어의 의미는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큰 민족으로 만드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대상은 ”, 바로 아브람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가 크게 만들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또한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은 너는 반드시 복이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원문과 비교해보면 상당한 의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복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복이 될 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브람과 그의 삶을 이 되게 하시는 일에 대해 강권적인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이를 그대로 성취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은 명령으로 시작하여 약속으로 계속되며, ‘축복으로 끝납니다. 이 세 가지 중대한 면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하나님의 현시(顯示)의 특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할 때만 하나님의 약속들은 그에게 성취되고 그는 하나님의 축복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축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바라크”(barakh)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21~3절 말씀을 보시면 이 바라크가 총 5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바라크”(,축복)과 대조를 이루는 말이 저주라고 할 수 있는데, 12장 이전에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총 다섯 번 등장합니다.

 

이전에 창세기 1~11장에 등장한 저주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자유의 상실, 땅과의 분리, 사회로부터의 소외, 신분상의 치욕스러운 탈락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국 에덴에서부터 바벨탑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연속된 타락과정에 이 저주가 함께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창세기 12장에서 저주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5회나 반복해서 서술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의 파괴된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벌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2장에 들어서서 이라는 개념을 통해 벌어진 이 관계가 다시 회복될 것인데, 그것은 1차적으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그 모본을 보여주실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이 되어서 세상은 그 안에서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에 121~3절에서 아브람이 나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전 1~11장에 나타난 목적 없는 인간의 방황을 일거에 해소하고, 이제 아브람을 통해 다시 에덴의 본래 상황으로 돌아가기 위한 대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아브람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의 길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임한 시험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 요구된 희생도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조국과 친족과 고향에 붙들어 매는 강한 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 관하여 묻지 않았습니다. 곧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건강에 적합한지, 그리고 그 지방은 유쾌한 환경을 제공하며 재물을 쌓을 기회를 줄 것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아브람은 순종해야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하나님께서 그로 있기를 원하시는 곳이었습니다.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신앙을 위해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람이 이와 같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그에게 있어 신앙의 중대한 위기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애굽은 나일 강으로 인해 웬만한 가뭄에도 기근을 모르는 곡창지대였으므로, 아브람이 다른 사람들처럼 애굽으로 피한 것은 현명한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 또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적 도움이나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가나안을 벗어나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명백한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이 때 사래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요? 4절에 보시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고, 아브람과 사래는 나이차가 열 살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65세는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말이 안된다라고 얘기합니다. 세상에 누가 65세 할머니를 보니 너무 이쁘고 아름다워서 아브람을 해할까? 의아스럽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래는 127세에 죽었는데, 그때 수명이 현재보다 더 길었기 때문에, 65세라 하더라도 지금으로 치면 30~40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직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날로 치면 꽃중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우리는 16절에서 아브람이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바로가 사래를 취하고, 그 결과 아브람은 생명을 보존하고, 또한 왕에게 선물을 받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랑이 될 사람이 신부될 사람의 가족에게 결혼의 대가로 예물을 주는 관례가 흔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거짓말이 올무가 되어 속수무책의 상태에 빠진 아브람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진실되지 못한 언행과 어려움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해서 취한 결과로 아브람은 어찌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 체류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약점과 불완전함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라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그의 생애 속에서 그처럼 자주 존귀하게 예증되었던 고상한 신앙과 용기의 결핍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아내인 사래를 취한 바로에게 그 대가로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17절을 보시면 재앙의 종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바로가 사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 고통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12:18,19)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여기서 어찌하여라는 말을 3번이나 사용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을 향한 바로의 책망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로의 질책 앞에 아브람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람이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은 바로의 책망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아브람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합니까? 아브람은 하나님께 받아야 할 책망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바로에게 받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잘못을 범한 원인은 결국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불신한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일을 바로 잡아 주시고, 아브람을 깨우쳐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그들 자신이 획책했던 상황으로부터 구출한 것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때로는 부르심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할지라도 하나님은 종종 그들의 대적자들이 그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여호와는 심지어 그 자녀들이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그들에게 여전히 신실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도 때때로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게 될 때에 실족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실족하고 넘어지더라도 그 실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비로운 섭리로써 우리를 이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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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사람 2023/01/18 [17:55] 수정 | 삭제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복을 부어 주시는 분이지 축복하는 분이 아닙니다. 목사라면 이 정도의 기본은 아셔야 할 것 같애서 주제넘게 한 마디 합니다. 축복이라는 단어, 우리나라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무지하게 사용하다보니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달라고 하는데 정말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복을 빌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자체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목회자부터 고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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