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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⑤ 구약성경의 윤리적 문제 - 잔혹성

김병윤 | 기사입력 2022/02/01 [07:58]
구약성경에 나오는 역사서는 신학적인 창작물

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⑤ 구약성경의 윤리적 문제 - 잔혹성

구약성경에 나오는 역사서는 신학적인 창작물

김병윤 | 입력 : 2022/02/01 [07:58]

열왕기하 2:23-25에 선지자 엘리사가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려대자 암곰 두 마리를 수풀에서 불러내 42명의 아이들을 찢어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KJV판에는 순진무구하고 나이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인데, 애들을 죽이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는지, NIV판에는 아이들을 소수의 젊은이들(some youths)이라는 단어로 교체하였습니다. 마을에 사는 불량배 청년들이 놀려 혼내 주었다는 식으로 대상을 의도적으로 바꿔 엘리사의 잔혹한 행위를 희석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사는 열왕기에 자주 나오고 신약성경에도 비중 있는 선지자로 등장하는데,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이 역대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역대기 저자가 엘리사의 선지자로서의 품행에 불만을 가졌거나, 엘리사가 행했다고 열거되는 기적의 신빙성을 아주 낮게 보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을 모두 빼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역사서는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역사서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창작물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패역한 아들과 관련하여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명기 21:18-21)라는 처벌 규정이 있습니다. 만약 전지전능한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자기 마음먹은 대로 자식들의 생명이나 인격권을 처리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구약성경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비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식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친 장면이 나옵니다. 반면에 사사기 11장에는 입다가 여호와에게 암몬족과 싸워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면 처음으로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바치겠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자신을 반갑게 영접한 딸을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고 장작 위에 올려놓고 멱을 딴 후 불태워 죽입니다. 그런데 번제에 바치는 동물은 수컷만 되고 수컷이라도 같은 어미가 난 암컷 뒤에 태어난 동물은 제물로 바칠 수가 없다는데1) 어떻게 처녀를 번제에 바쳤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남아 선호 사상과 남녀 차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2:20-21에는 딸의 순결과 관련하여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라는 규정도 있습니다. 옛날에 처녀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과학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확실한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처녀성 여부 하나로 여성을 죽이라고, 그것도 잔인하게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못했는데, 유다왕 아하스(기원전 735~715 재위)는 자기 아들을 번제에 바쳐 불에 태워 죽였다(열왕기하 16:3).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풍습이 독자적이고 고립된 이교도의 관행이 아니라 주민과 토지의 풍요와 안녕을 하늘의 신들에게 비는 복합적인 종교의식의 일부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2) (여호와)가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율례와 능히 지키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번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을 멸망하게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에스겔 20:25-26)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내용은 기원전 590년대에도 유대인들이 이교도들과 같은 방식으로 장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규정한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은 여호와가 지정한 이런 관습이 잘못이었음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5:11-31에 남편이 처의 비행에 대한 물증이 없지만 의심이 가는 경우, 제사장은 거룩한 물을 애간장을 녹일 정도의 쓴 물로 만들고 여기에 성막 바닥의 먼지를 넣고 저주의 글을 빨아 섞어 비난받는 여성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넓적다리가 마르고 배가 부으면 저주를 퍼붓고,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결백한 것으로 판정했습니다. 일종의 신명재판(神明裁判)인데 이럴 경우 내장이 안 녹고 견디는 여성이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여호와가 불순종에 따르는 징벌을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레위기 26:27-29)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에는 불순종에 따른 저주가 언급됩니다. 53-55절에는 남자가 자궁의 소산인 아들과 딸의 살을 먹되 이를 자기 처나 다른 자식들에게 나눠주지 않게 하고라는 대목이 있고, 57절에는 여자가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라는 주문이 있습니다. 이사야 9:20에는 배가 고파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영문으로는 각자 자기 자손(아이)의 살코기를 먹을 것(Each will feed on the flesh of his own offspring)’]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같은 구약성경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이슬람교의 쿠란 1731절에 궁핍의 두려움으로 너희 자손을 살해하지 말라. 알라가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나니 너희에게도 마찬가지라 그럼으로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라고 하면서, 여호와의 주문과는 달리 훨씬 부드러운 말로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는 것과 대비됩니다.

 

에스겔 5:10네 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그 아버지를 잡아먹으리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지명 그발강 근처 델아빕(Tel-Abib near the Kebar River, 3:15), 디블라[6:14, Diblah(NIV), Diblath(KJV)]나 바마(20:29, Bamah)라는 지명은 구약성경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은 오직 에스겔에만 나오고 성경 다른 곳 어디에도 에스겔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후에 이 책을 작성하여 끼워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겔 1:5-10에서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이라는 표현이 다니엘의 큰 짐승 넷(four great beasts, 7:3-7),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NIV) 또는 four beasts(KJV), 4:6-7)]과 비슷합니다. 종말론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구성도 서로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마에 표시를 하라는 주문이 에스겔 9:4에 나오는데, 이런 표현은 요한계시록의 이마나 손에 표()한다는 내용과 같습니다. 누가 누구 것을 도용한 것인지 확증할 수 없습니다. 단 에스겔의 표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에는 우상숭배한 사람들에게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에스겔 15:1415:20에 노아, 다니엘(Daniel), 욥 세 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다니엘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난하주에는 다니엘을 다넬(Danel)이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해석해 놓았습니다. 다니엘 이름이 나온 것을 보면 이 책의 저자는 틀림없이 다니엘 이후의 사람일 것입니다.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동물들은 사자, 황소, 독수리, 사람으로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저자의 작품을 베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다니엘의 동물들은 사자, , 표범에 열 개의 뿔이 달린 동물이니 차이가 나지만 네 마리의 동물을 설정한 것은 동일합니다.

 

전쟁 방식과 관련하여 사무엘하 2:12-17, 다윗과 이스보셋 양 진영에서 따로 선발된 12명의 젊은이, 모두 24명이 두 줄로 서서 각기 상대방 머리를 잡고 칼로 옆구리를 찔러 일제히 죽는 장면이 나온다. 요압과 아브넬이 그런 게임을 통해서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그 결투는 룰렛 게임처럼 일정한 법칙을 갖는 게임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전쟁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일부러 부추겨서 전쟁하게 만드는 흥분제 같은 것인가? 요압과 아브넬이 서로 협의 하에 이런 게임을 했다는 데서(2:14), 그리고 그 일 후에 전쟁이 심히 맹렬”(2:17)했다는 점에서, 그런 혐의가 상당히 사실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3)  

출처:

1) The Woman’s Bible, Elizabeth C. Stanton, Prometheus Books, 1999: 78

2)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닐 애셔 실버먼, 오성환 옮김, 까치, 2002: 283

3) 일상적 폭력 폭력적 종교, 이종록, 쿰란출판사, 2017: 191 

 

필자 김병윤195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퍼듀대학교 MBA 과정을 졸업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전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마케팅업무를 담당했으며,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제화 및 외국어 교육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가천대학교, 신구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분교 및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시간강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레스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삼성신화 아직 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정아에게 보내는 서른 장의 편지, ()과 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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