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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 종교기행● 신촌 봉원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1/02 [22:05]
태고종 총본산···공기맑고 아늑함 여전해

도심속 종교기행● 신촌 봉원사

태고종 총본산···공기맑고 아늑함 여전해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1/02 [22:05]

▲ 봉원사는 본래 신라 진성여왕 3년인 889년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 터에 반야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     © 매일종교신문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 봉원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강남권이 개발되기 전만해도 천년고찰 봉원사는 서울 도심을 통틀어 최대 사찰로 꼽혔다. 60·70년대에 서울에서 ‘신촌 새절’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경치가 좋고 아늑해 초·중학생들의 소풍 명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래 한뿌리였던 태고종과 조계종이 갈라서면서 봉원사는 오랜기간 분규사찰로 분류돼 발전이 저해돼 왔다. 분규사찰이란, 실제 주석은 태고종 스님들이 하고, 토지소유는 조계종으로 돼 있어 재산권 문제로 분규를 겪고 있는 사찰을 말한다. 전국에는 승주 선암사, 홍은3동 백련사 등 7곳 가량 되지만, 소유권 문제로 건물에 못 하나 제대로 못박는 실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정부 주도로 통합종단이 만들어 질 때 조계종은 오래된 사찰 2000여 개를 소유했지만, 태고종은 200여 개를 확보하는데 그쳐 재산이 별로 없다. 붓다를 같은 스승으로 모시는 장자격인 조계종이 재산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서 왜 분규사찰 토지를 태고종에 양보해 주지 않을까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재산관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태고종에서 이 점을 못내 섭섭해 했는데, 근래에 일이 잘 풀렸다. 조계종측에서 봉원사 토지(10만 여평) 5분의 1가량만 떼어준다면, ‘10·27법난’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도 건립하는 등 의미있게 사용하고 분규를 매듭짓겠다는 의사를 전한 전해왔고 태고종측에서도 명분이 있는만큼 합의에 이르렀다.
 
60·70년대 서울의 소풍명소
분규사찰 멍에 벗고 ‘飛上’
 

안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봉원사는 여전히 공기가 맑고 아늑하며 넉넉해 보였다. 봉원사는 본래 신라 진성여왕 3년인 889년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 터에 반야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뒤 1748년(영조 24년) 찬즙·증암 두 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 중건하면서 봉원사라 개칭했다. 이 사찰에도 조선시대 탱화며, 영조의 친필 현판 등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많았으나, 6·25때 대웅전이 불타면서 모두 소실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볼거리는 많다. 서울시문화재 68호 대웅전이며,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아소정(我笑亭)을 옮겨와 지은 염불당, 명부전 등이 눈여겨 볼만하다. 웅장한 대웅전은 안산과 멋진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그 앞의 염불당에는 ‘奉元寺’라고 쓴 현판이 붙어있고, 유리문을 열면 추사 김정희의 친필 2점과 추사의 스승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 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이 우람하게 걸려있다. 부엌에는 당대 최고 단청장 이만봉(인간문화재 제48호) 스님이 그린 ‘장군도’가 신비스럽게 안치돼 있다. 국내 최대 목조건축물이라는 삼천불전도 장관이다. 210평 크기의 너른 법당에 들어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그 위쪽에 위치한 명부전에는 ‘冥府殿’이라고 쓴 편액과 4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편액은 600년전의 유학자 정도전의 친필이고, 주련은 매국노 이완용의 친필이니, 역사와 예술이 공존하는 아슬아슬한 공간이다.
 
봉원사 뒤 안산 중턱에는 관음바위가 있다. 봉원사 아래 사하촌에서 올려다 보면 동쪽으로 커다란 바위군이 눈에 띄는 데, 관세음보살이 비스듬히 누운 채 합장하는 모습이다. 관음바위에는 봉원사 이전 비화가 전해진다. 봉원사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20여 분 거리다. 사찰 뒤편으로 안산으로 오르는 솔향 그윽한 등로가 나 있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명품 숲길이다.
 
북소리 징소리에 영산재 본고장 실감
 
▲ 영산재는 49제의 한 형태로,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의식절차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매일종교신문

지금 한창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는 봉원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된 영산재(靈山齋)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영산재는 49제의 한 형태로,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붓다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다함께 붓다의 참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이 불교의식에는 음악(범패)·무용(작법)·미술(장엄) 등 예술적 요소가 내포돼 있다. 영산재 진행중에 범음(梵音)·범패(梵唄)와 화청(和唱) 등이 음악적 효과를 내고, 이러한 음악에 맞춰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 춤사위가 등장하는데, 무용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는 또 삼현육각(三鉉六角), 호적, 취타 등 각종 악기도 동원된다. 범패와 화청은 한국 민속음악인 가곡과 회심곡에 영향을 미쳤고, 춤사위는 민속무용인 승무, 바라춤을 태동시켰다. 영산재가 한국전통예술에 끼친 공로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인간문화재 寶庫···후학도 즐비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미래창창
 

봉원사는 영산재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69년 옥천범음회(영산재보존회 전신)를 출범시킨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월하(1875~1950)라는 근세기 범음범패의 출중한 노장이 주석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범패가 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면서 옥천범음회는 김운공, 박송암, 장벽응 스님 등 3명을 무형문화재 보유자(범패)로 배출했다. 1987년에는 영산재가 무형문화재 제50호로 단체지정됐고, 보유자로 정지광(장엄)·이일응(작법) 스님이 선정됐다. 이어 2005년에는 김구해 스님이 보유자(범패)로 뽑혔다.
 
그동안 운공·송암·벽응·지광·일응스님이 입적했으나, 어느새 훌쩍 커버린 후학들이 오롯이 맥을 잇고 있다. 현재 영산재보존회는 총재인 김구해 스님을 비롯해 마일운·이기봉·오송강 스님 등 준보유자(전수교육조교) 3명, 전수교육보조자 3명, 이수자 45명, 전수생 53명, 준회원 136명 등 총 241명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영산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든 공로자들이다. 영산재는 13단계로 진행하며, 전체를 시연할 경우 꼬박 하루가 걸린다. 국내외 초청공연에는 보통 영산재 주요 의식을 1시간30분 가량으로 압축해 보여준다고 한다.
 
봉원사 경내에는 영산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옥천범음대학과 영산재보존회가 있다. 이 대학은 2년전 학점은행제로 지정돼 학생들이 더욱 몰리고 있다. 강의실은 종무소 건물과 대방뒤 가건물 등에 분산돼 있으며, 경내에는 사시사철 범음범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매년 6월6일(현충일) 봉원사를 찾으면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재 전체 장면을 관람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이후 초청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봉원사는 매년 7~8월에 연꽃축제를 연다. 전시 규모가 클뿐더러, 산사음악회, 노래자랑, 마당놀이 등이 곁들여 종합축제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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