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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영원한 참스승 상일봉사학교 정용성 교장

김주호 민족종교 대기자 | 기사입력 2014/12/26 [11:24]
비바람 고난 속에 핀 참사랑 교육의 꽃

인터뷰●영원한 참스승 상일봉사학교 정용성 교장

비바람 고난 속에 핀 참사랑 교육의 꽃

김주호 민족종교 대기자 | 입력 : 2014/12/26 [11:24]



서울 광진구 자양동584-5 길가 건물 2층엔 외형 보다 내적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의 전당이 있다. 좁은 교실 안쪽 벽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배움에는 늙고 젊고 가릴 것 없다.’ ‘씨앗은 내가, 열매는 남에게, 물질적 가치 보다 정신적 가치를’이라는 표어가 걸려있다. 주로 60~70대의 연세 드신 분들이 20대 청년 교사로부터 수업을 받는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바로 상일(上一)봉사학교다.
 
기자가 찾은 12월22일은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전 학기 마지막 수업이었다. 방학식에는 문종국 강남교육장, 이윤영 개포고 교장을 비롯한 교육계, 지역 유지 등이 참석, 이들을 격려했다. 학교를 세운 사람은 평생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해온 정용성(丁鏞聲. 82)교장. 그는 물질적 가치 보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며,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인성교육을 하며, 장애자는 물론 배움에 목마른 주부,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교육의 샘터가 되어온 사람이다. 그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사도(師道)를 몸소 실천해온 영원한 스승이다.
 
▲ 서울 광진구 자양동 길가 건물 2층엔 외형은 허술하지만 내적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의 전당이 있다.     ©매일종교신문

“저는 19세에 교단에 서면서부터 어려운 제자와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이로부터 줄곧 외길로 달려온 그의 이 같은 희생 봉사정신은 어린 시절부터다. 전남 영광(靈光)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학자의 가풍에서 자란 그는 엄격하면서도 인애(仁愛)로 베푸는 부친의 삶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한다. 특히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학비 마련을 위해 신문배달 등 궂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나 같은 어려운 환경에서 배움을 원하는 청소년들을 도와야 겠다”고 다짐했다.  

어려운 제자 찾아 사랑으로 교육
 
1954년 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좋은 학교를 마다하고 고향과 가까운 전남 영광 군남초등학교를 택해 이로부터 교육에 헌신봉사의 외길을 걸어왔다. 이어 영광읍 초등학교,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옮기면서도 아이들의 인성교육과 장학금 마련에 헌신하다 1965년 서울의 상계초등학교로 부임했다. 당시 이곳은 철거민 자녀가 대부분이었다. 철거민들 사이에 다툼도 많았다. 주민들의 화합과 계몽을 위해 운동회 개최를 생각해낸 정 교장은 경비마련을 위해 월급을 털어 병아리 4백 마리를 사들여 2년 동안 정성들여 키웠다. 그래서 ‘병아리 선생님’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 양계사업으로 당시 20만원의 이익금이 생겨 이 돈으로 운동회를 열어 온 주민이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부임한 지금의 상일초등학교(전 구천초등학교) 역시 대부분 철거민 자녀들로서 이들에게 중학교 진학과 장학금 마련을 위해서 회양목 30만 그루를 길러 ‘회양목 선생님’ 별명을 얻었고, 또 퇴근 후 야학선생으로 ‘올빼미 선생님’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혼 후 처음으로 어렵사리 마련한 묵정동 집 한 채가 처분되면서 지금껏 무주택자로 있다.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이 불량청소년이 되는 걸 방관할 수 없어 1975년 하일동(지금의 강일동) 화재민촌에 상일복지학교 전신인 하일야학중학교를 개설,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가마니를 깔고 이곳에서 야학을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학생들은 배로 늘어나고 월급을 털어 비닐하우스 1동을 더 세우지만 그린벨트 지역이라는 이유로 2개월에 한 번꼴로 철거를 당하기 일쑤였다. 지었다 헐었다를 반복, 무려 20년간 구청과 씨름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는 1975년부터 1998년 서울 성동교육장으로 정년퇴임 할 때까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상일봉사학교를 운영해 왔다. 물론 개교 이래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일체 받은 적이 없다. 하일동에서의 야학을 시작으로 40년 동안 5000여명의 학생을 지도해 왔다.
 
피와 땀 눈물로 세워진 상일봉사학교
 
▲ 좁은 교실에는 ‘씨앗은 내가, 열매는 남에게, 물질적 가치 보다 정신적 가치를’ 등의 표어가 걸려있다.     © 매일종교신문

지금은 진학을 못한 학생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한 서러움을 안고 살아가시는 어르신들에게도 교육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다. 성인한글반, 대입검정고시반, 고입검정반 등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늦은 나이에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어머니교육반, 주민체육대회, 경로잔치 등 지역주민과 소통하며 함께 나눔의 행사도 가져왔다. 또 도서관운영, 유명인사 초청강연, 예식장운영, 컴퓨터교육반 운영 등 모든 과정을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해 일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지역 주민의 한을 풀어주고자 무료 예식장을 제공하고 주례는 정 교장이 선다.
 
이 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입학식이 없고, 교사 월급이 없는 3무(無)학교다. 학교운영비는 서울시내 100여 학교와 광진구청, 시 교육청 및 각 기관, 개인 독지가 등의 후원금으로 마련된다. 교과 담당 교사들도 전·현직 교사, 대학교수, 재능기부교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훌륭한 수업을 진행 하고 있다. 특히 멀리 떨어져 직접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장애자들을 배려해 주요 수업내용을 인터넷 사이버로 전하고 있는데 30만~32만 명이 이용하고 있단다.
 
이렇듯 모든 것이 무료이다 보니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돈이 생기면 교육봉사에 써버리는 정 교장이다.
 
“저는 연금혜택이 없습니다. 정년 때 상일봉사학교 빚 갚느라 미리 타 썼기 때문이죠. 학생들이 10원 한 장 안내는 무료학교인지라 선생님들 교통비조차 주지 못할 형편일 땐 정말 가슴 아파요. 집 사람도 ‘제발 우리 집에서 좀 살아 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 할 땐 미안한 맘 그지없지요.”
 
학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부인 김희옥(金喜玉)씨가 화장품 행상을 하던 어느 날 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술 후유증이 원인이 되어 척추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다. 정 교장 자신도 2002년 4월 학교 창고 마련을 위해 목수 일을 돕다가 회전용 전기톱에 왼손가락 세 개가 절단 되는 고통도 겪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 주고 지원해 준 아내를 늘 고맙게 여긴다. 아울러 아내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한다.
 
그는 80을 넘은 나이에 그만 두고 편히 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대통령표창, 한국교육자대상, 서울시민대상, 아산봉사상대상을 받으면서 더욱 교육봉사에 대한 열정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오늘의 상일봉사학교가 있기까지는 정 교장과 그를 도와 함께 일하는 교육봉사자들이 합심하여 흘린 피와 땀, 눈물을 밑거름으로 이룩한 열매라 하겠다.
 
고택 수리해 인성교육장으로
 
▲ 상일(上一)봉사학교는 60~70대가 20대 청년 교사로부터 수업을 받는데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 매일종교신문

정 교장은 고향인 전남 영광에 230년 된 고택을 보존 수리하여 상일봉사학교 인성교육장으 이용하고 있다. 숙박시설 등 모두 무료이다. 수리 자재는 서울에서 15년 동안 15톤 트럭으로 폐자재를 운반해 썼다.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 농촌체험, 주변 유적지인 백제 불교 첫 도래지 탐험 등 문화체험도 하며 인성을 고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 이미 1300여명이 다녀갔다.
 
“요즘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의 아이들이 더 문제가 많아요. 학교에서 정학이나 퇴학 당한 아이들이 상일에 와서 인성교육을 받고 다시 복학한 경우도 300여명 돼요. 모 고교에서 성적이 10등 이내에든 학생이 제적당해 부모와 함께 여기 와서 인성교육을 받아 갔어요. 부모가 모두 박사고 대학교수 집안이더라고요.”
상일봉사학교는 기존의 학교 공부시키고자 학생을 모집하는 곳이 아니다. 주로 정신교육, 인성교육 위주의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자는 데 목적이 있다. 그의 신조 역시 “물질적 가치 보다 정신적 가치가 우선”이다.
 
정 교장은 과거 평교사 시절 거지어머니의 아들과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2천여 명을 가르친 교사로서 옷이나 금반지 해준 학부모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딱 한사람 박동희(가명)와 그의 모친(실제로 거지)만은 기억합니다. 박군은 금요일만 되면 어머니가 자기 집에 선생님을 꼭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거예요. 토요일에 점심대접 하신다며. 하도 여러 번 간청하길 레 집이 어디냐 하니, 30리(12㎞)를 걸어가야 하는 곳이래요.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저녁이라면 몰라도 점심은 좀 어렵겠다 싶었지만 따라 나섰지요. 들판 길을 한참 지나 따라가 보니 토굴 같은 초라한 집인데 행색이 영락없는 거지어머니고, 낡은 냄비에 보리밥이었고, 된장은 곰팡이 냄새에 도저히 먹을 수 없었지만 전념 병에 걸리더라도 먹어야지 하며 먹었어요. 다시 돌아올 땐 들판에서 내가 시야에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어 줬어요. 가슴이 뭉클했지요. 선생님을 모시려는 그 갸륵한 마음과 정성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 ‘이 아이는 틀림없이 성공 한다’고 확신했죠. 나중에 육사에 들어가 훌륭한 장교가 되어 대령으로 제대 했어요.”
 
외형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 보다 사랑과 존경과 믿음으로 맺어지는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요즘은 사도가 무너져 가는 세태라고 한다. 정용성 교장은 교육의 3부재(不在)를 지적하며 걱정한다. 참다운 스승이 없고, 참다운 제자가 없고, 참다운 학부모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봉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용성 교장처럼 처음 다짐한 교육봉사의 뜻을 초지일관 평생을 지키며 헌신해온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오직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 그것도 몰아치는 비바람 고난 속에서도 버림받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을 참사랑으로 돌보며 가르쳐온 사람, 자신과 가정의 어려움 보다 제자 한사람을 더 보살펴온 사람 정용성 교장. 만약 노벨교육상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 후보에 올라야하지 않을까. 그는 진정 한국의 페스탈로찌가 아닐까. 정 교장이야 말로 이 시대 참스승의 사표요, 어두운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고 있다. (김주호 민족종교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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