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단군사상으로 후천결실 시대 열다 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 1

편집국 | 기사입력 2013/06/20 [15:08]
'연오랑 세오녀’전설어린 포항서 출생한 어부의 아들

단군사상으로 후천결실 시대 열다 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 1

'연오랑 세오녀’전설어린 포항서 출생한 어부의 아들

편집국 | 입력 : 2013/06/20 [15:08]
 
 
단군사상으로 후천결실 시대 열다 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 1 






'연오랑 세오녀’전설어린 포항서 출생한 어부의 아들








예부터 우리나라는 많은 정신적 지도자들이 나타나 새 시대를 열었다. 원효, 최제우, 강일순, 박중빈, 유영모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호가호식을 경계했고, 오직 고단한 민초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애쓰다 갔다. 당대에 이들은 도인(道人)이란 칭호를 들었을 법하다. 우리 곁에 바람처럼 왔다가 빛도 없이 사라진 도인도 있다. 백산(白山) 손중환(孫重煥, 1949~2005)도 그런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았으나 30대 초반 하늘의 계시를 받고 단군사상과 천지 이치에 눈을 뜨면서 그 시절 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기치료로 살려냈고, 사람들을 본성대로 살게 하는 교육 이념 전파에 생애를 바쳤다. 특히 그는 가식 없는 삶으로 세상의 위선을 통렬히 날려버렸다. 본지는 ‘대한민국 도인 탐구’ 첫 시리즈로 민초들의 아픈 삶을 보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손중환의 삶과 사상을 발굴해 몇 차례 나눠 조명한다. <편집자주>








<1>성장시절


손중환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발산2리(일명 여사리) 186번지에서 손선동과 김기순의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중환으로 되어 있으나, 어린 시절에는 영환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조 손순의 31세에서 분파한 양성공파 19대손이다. 손중환이 출생한 동해면은 우리나라 지도에서 보면 호랑이 꼬리 안쪽 부분으로 그 앞으로 영일만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또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로 유명하다. 1285년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기록한 이 설화는 동해에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바닷가에 나갔다가 불연듯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고, 아내도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역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일본 고대왕국 건설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아버지 손선동은 위로는 형님과 누님 2명, 쌍둥이 동생이 있었으나, 모두 세상을 떠났다. 형과 동생들의 중간에 끼여 있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남태평양 서쪽 섬나라 파푸아뉴기니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던 아버지는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이듬해 1월 가까스로 탈출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본래 아버지가 살던 동해면 입암2리(일명 선바우)는 밀양 손씨의 집성촌이다. 어촌이어서 일본인들이 어장을 많이 운영해 그리 살기가 어려운 편은 아니었으나 일본이 물러간 뒤 국내사정이 전체적으로 나빴다. 특히 어촌은 농촌과는 달리 농사량이 적었다. 농사일을 하던 아버지는 작은 식량으로 많은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해 생활이 늘 궁핍했다. 이를 본 손중환의 외할아버지가 사위를 외가인 발산2리로 불러들여 어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몸도 약하고 어업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고기 잡는 기술을 배웠다. 어부가 된 아버지는 외삼촌의 배를 타며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중환을 낳자 “세상을 위해 큰 놈을 낳았으니 손자를 잘 키우라”고 신신 당부했다. 외할아버지는 동학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도학을 공부한다며 외지를 많이 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과 두루 교류하다가 1957년경 숨을 놓았다.


아버지는 손중환을 낳기 전 태몽을 꾸었다. 꿈 속에서 사람 키보다 더 큰 지네가 자신의 등허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이 제당(祭堂) 밑에 있는데다 특유의 성실함 때문에 동네 제사나 마을 굿이 열리면 제주 역할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는 불심(佛心)이 깊어 가족을 위해 집에서 20리나 떨어진 절에 찾아가 기도를 하곤 했다.






외할아버지, “큰 놈 낳았으니 손자 잘 키워라” 당부


가난으로 초등학교만 마쳤으나, 한문에 깊이 매료돼




 
손중환의 어머니는 현명하고 영민했으며, 피부가 유난히 곱고 깨끗했다. 어머니를 닮아 하얗고 귀공자 타입의 손중환과 형제들은 동네 아이들 틈에 있으면 금방 표시가 났다. 손중환은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공차기, 제기차기, 자치기, 구슬치기 등 모든 놀이에 능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스케이트와 팽이 등을 직접 만들어 동생들에게 나누어 줬다. 동생들은 겨울철 형이 만들어준 스케이트를 타고 논바닥을 지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손중환은 그림도 잘 그렸다. 한번은 호랑이 그림을 그렸는데, 사촌 여동생이 보고 무섭다며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손중환은 학교 공부는 썩 잘 하지 못했다. 그것은 머리가 나빠서라기 보다는 장남으로서 생계를 돌봐야 했기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어촌에서는 봄부터 초가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바다에서 그물도 놓고 전복도 잡아야 해 쉴 틈이 없다. 가을과 겨울철에는 땔나무를 구하러 다녀야 한다. 손중환은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하러 다니는 날이 많았다. 고기를 잡아다 팔고, 때론 땔감도 내다 팔아야 했기에 책은 도통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필체는 아주 좋았다. 시작(詩作)이나 노랫말 짓기 등 문학에도 소질이 엿보였으나, 이마저도 제대로 개발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손중환은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동네에서 더러 진학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손중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당시 농어촌 계몽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라 시골 오지까지 찾아온 대학생들에게 영어와 한자를 배울 수 있었다. 대학생들은 손중환의 동생 영환에게도 알파벳을 가르쳤다. 이때 손중환은 한자 공부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손중환은 하늘의 계시를 장문의 한자로 빽빽이 받게 쓰게 되는데, 그 시절에 배양했다고 볼 수 있다.


손중환은 생업에 전념하다 어느덧 성년이 되었다. 그는 1968년 신체검사를 하고 이듬해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안동 36사단 신병교육대에 입대하여 3년간 군대생활을 하였다. 손중환의 거침 없는 말솜씨와 패기 있는 면모는 군대에서 잘 나타난다. 논산훈련소에서 자대생활을 하면서 웅변대회에 나가 몇 차례나 상을 탔던 것이다.


1971년 말 손중환은 전역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군대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어업이 생업임에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돈을 알뜰하게 모았다. 저축금 일부는 일찍이 외가를 떠나 경북 영덕군 강구면에 터를 잡고 쌀장사를 하는 동생(손중환의 막내 외삼촌)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외삼촌은 어머니가 유일하게 아들의 장래 문제를 의논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손중환이 어업에 뜻이 없음을 알고 외삼촌과 의논 끝에 손중환을 외삼촌에게 보낼 것을 결심한다. 무엇보다 외삼촌이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외삼촌은 손중환 뿐 아니라, 누님네 가족이 동해면에서 계속 어업에 종사해봐야 큰 비전이 없으니 강구로 이사를 오도록 집요하게 종용하였다.


드디어 1972년 1월 말경이었다. 손중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를 따라 온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됐다. 포항에서 영덕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100리에 불과하지만, 손중환에게는 일대 사건이었다. 강구에서 벌어질 새로운 생활은 향후 손중환이 겪게 될 산전수전의 시발점이었다. <정성수 논설위원>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