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유엔군 참전 날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8/07 [13:08]
“참전에 감사하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생각한다”

유엔군 참전 날에

“참전에 감사하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생각한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8/07 [13:08]
지난 7월 21일은 유엔군 참전 기념일 이었다. 만약 미국을 중심한 유엔군이 6.25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우리 자유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김일성의 전략은 6.25는 가장 잘 선택한 시기에 가장 유리한 장소에서 가장 잘 싸우는 전쟁이었다. 거짓말 잘하는 김일성은 3일 안에 서울을 점령하고 1개월 안에 남한을 완전히 해방을 맞이하겠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 이루어지려는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유엔군이 참전하여 승자도 패자도 없는 38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미 국방자료를 보면 6.25 전쟁 중 30만 2,483명의 군인이 파병되었고 그 중에 5만 4,246명이 전사하고 8,177명이 실종, 7,140명이 포로, 10만 3,284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미국 병사가 3만 6,574명이 사망, 영국이 1만 4,198, 뉴질랜드 1,389, 캐나다 6,146, 에티오피아 7,271, 터키 5,455, 그리스 1,263, 호주 2,282, 남아공화국 1,255, 프랑스 1,185, 태국 2,274, 필리핀 1,494, 콜롬비아 1,068, 벨기에 900, 룩셈부르크 48, 네덜란드 819명의 유엔군 용사들이 6.25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위대한 희생이었다.
영국군 참전용사 프레스턴 벨은 “나는 내 인생의 귀중한 1년을 한국에 주었어. 개인적으론 잃어버린 1년이었지만 한국인들은 내가 준 1년으로 놀랍도록 번성한 신천지를 이루었다.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든 여러분께 감사한다!’ 고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미국 ‘글렌트루먼 일병의 일기’이다.
 
엄마에게 오늘 저녁엔 몇 줄만 씁니다. 기분도 좋고 다 괜찮아요. 엄마도 여전하시길 바래요. 여긴 엄청나게 더워요 얼마나 더 있어야할지 모르겠네요. 아빠는 행복한 생일 맞으셨나요? 야채가 먹고 싶어요. 통조림 야전 식량은 너무 똑같아서요.“
-변함없는 엄마의 아들. (1950년 7월 25일)
 
그 후 일주일이 지나 21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보고 싶은 엄마를 그리며 야채를 먹고 싶어 하던 부자나라의 유망한 청년이었다. 아빠의 생일날을 함께 하고 싶었던…….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한다.
 
‘그린’ 중령은 호주의 전쟁영웅으로 1950년 9월 말에 참전하여 정주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그해 11월에 31살의 꽃다운 나이에 숨졌다. 그는 6.25전쟁에서 연천전투와 박천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고 그에 앞서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 아프리카와 그리스 등지에서 공을 세워 호주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로 유엔군 전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 매일종교신문

그린 중령의 유해는 부산 UN기념 공원에 안장돼 있다. 그를 우리나라는 전쟁 영웅으로 추서했다. 그의 아내 그린 여사는 결혼 7년 만인 27세에 남편을 잃었다. 당시 3살이던 외동딸을 홀로 키우며 평생을 남편을 그리며 참전 용사를 기리는 자수와 남편의 전기를 쓰는 등 남편이 잊히지 않도록 여러 활동을 해왔다.
 
특히 1993년 출판된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 is still charlie)는 남편이 남긴 편지와 기록 참전용사와 나눈 인터뷰와 사료 등을 13년간 꼼꼼히 조사한 끝에 출간한 책으로 호주 문학계에서 지금 논픽션분야 명작으로 꼽힌다.
 
그린 여사는 ‘한국은 전쟁이후 급속한 발전을 이뤘고 놀라운 문화와 불굴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남편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겸허히 말한다. 그린 여사는 남편 옆에 마지막 잠들고 싶다고 유언한다.
 
유엔군 5만 4,246명의 사망, 8,177명의 실종 , 10만의 포로들, 그들의 희생 앞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오늘도 강원도 원주 고향의 뒷산에 태극기를 걸고 6.25 유해발굴로 땀 흘리는 우리 국군의 손길이 계속되고 있다. 이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자유대한 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엔군 참전에 감사하고 몇 가지 불가사의한 기적을 생각한다. 어떻게 6.25 전쟁을 일으킨 소련이 UN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파병 동의 안에 서명할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이 한얼의 섭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김일성이 50년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만약 육칠십년 대에 남침을 했다면 남한은 꼼짝없이 공산화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이었을 텐데……. 왜냐하면 당시는 미군이 월남전에 전력을 소비할 때이기에 한국에 미군이나 유엔군을 보낼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또한 미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희생이 커갈 무렵 당시 워커장군은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군대를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을 때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하므로 결국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한울 섭리에 놀라울 뿐이다.
 
이때가 되면 반복되는 감사와 보본(報本)으로 기도한다.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