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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캔디의 죽음에 대한 단상

이옥용 | 기사입력 2016/06/13 [07:51]
“내가 캔디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캔디가 나를 사랑하고 갔다”

반려견 캔디의 죽음에 대한 단상

“내가 캔디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캔디가 나를 사랑하고 갔다”

이옥용 | 입력 : 2016/06/13 [07:51]
모든 생명체는 삶의 에너지가 제로가 되면 늦가을 낙엽 떨어지듯 죽음을 맞는다. 자연의 섭리는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생명의 시작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면, 그 생명의 마침인 죽음 또한 인간이 간여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뭇사람, 동물, 식물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말도 있지만, 법정 스님은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고 당부했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지만,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제로 이혼하는 부부도 생겨나고 있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연을 진정한 인연으로 여기는 것이다. 즐거움을 위해 사육하는 동물이 아닌 반려자(친구)로,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의식이 향상되고 있다는 증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귀천 없어 

나의 반려견 캔디가 얼마 전 죽었다. 14세로 사람 나이로 치면 80세 고령이다. 캔디는 죽기 며칠 동안 밥을 전혀 먹지 않았다. 평소 침을 질질 흘리던 소시지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동네 동물병원에서는 동물종합병원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편안히 죽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캔디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집으로 데려와서 목욕을 시키고 캔디 집 주위를 깨끗이 청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파리가 몰려들었다. 약을 뿌리고 파리채로 잡아도 불가항력이었다. 인터넷에서 그 원인을 검색해 봤다. “파리는 몇 십리에서도 죽음의 냄새를 맡고 몰려온다. 사체를 먹고 사체에 알을 낳기 위해서다.”
 
캔디는 죽음을 맞기 직전 힘이 다 했지만, 숨은 편안했다. 얼굴도 평온했다. 모든 것을 해탈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내가 말을 걸면 무거운 머리를 쳐들고는 답례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다. 마치 조용히 잠이 든 것 같았다. 14년 동안 나의 가족과, 회사 직원들과, 회사를 드나들던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던 캔디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내가 좀 더 캔디를 사랑해 주지 못한 죄책감이 들며, 문득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생각났다.
 
카톡이 왔다.
“며느리 : 캔디가 우리랑 함께 해서 행복했을까요?
큰 딸 : 밖에서 고생했지 뭐.
작은 딸 : 불쌍하다가 다 ㅠㅠ.”
 
눈을 감은 캔디의 모습을 보는 순간 흐름(순환)을 막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를 해롭게 하는 것이 흐름을 막는 것이다. 나 외의 사람들과 동물, 식물은 모두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나의 생명이 그들로 인해 살아가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분별과 차별은 흐름을 막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는 말은 일순 그럴 듯하다. 그러나 지구에는 인간만 살지 않는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만물의 생살여탈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조물주가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랑으로 보살펴 그 생명체의 습성대로 살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지, ‘인간 멋대로 주무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인간과 자연만물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다른 생명체를 좋게 해 주는 것이 곧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이 된다.
 
자기의식 지녀야 자신
 
사람만 보면 도망치는 동물들. 심지어 동식물은 인간의 독기까지 느낀다고 한다. 어느 산골 촌부의 이야기다. 그는 ‘어린 송이버섯을 발견하고는 다음에 채취해야겠다고 눈독을 들이고 다음에 가보면 시들시들해 있더라.’고 들려줬다. 왜, 같은 인간과 동식물이 인간을 기피하는 걸까. 인간 마음속에 자리 잡은 무서운 욕심 때문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과 자연과 더불어 살 자격이 없다. 자연은 우리의 양심처럼 순수하다. 양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인간과 자연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아마도 사람의 의식이 막힌 것을 뚫어주는 역할이 선이고, 종교일 것이다. 자기의식 없이 종교의 가르침대로 따라하면 흐름을 막는 것이 된다. 자기중심, 자기종교중심이 되면 길이 막히고, 흐르지 않아(서로 통하지 않아) 오염되고, 지옥이 된다. 막히면 죽는다. 쌓이면 흐름을 방해한다.
 
내 종교가 최고다, 내가 구세주다고 주장하며, 자기 종교와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선은 자기를 주장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나면 벽이 되고, 우리가 된다. 벽과 우리에 갇히면 죽는다. 자기의식이 있는 사람은 갇히지 않는다. 분별력이 있어야만 알 수 있다. 공부란, 자기의식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의식이 수반된 공부가 필요하다.
 
남이 가르쳐주고 손에 쥐어주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자기의식 없이 예수, 부처 의식만 가지고 공부하면 결국 자기를 우리에 가두는 것이 된다. 종교의 가르침은 개개인의 의식을 높여주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아닐까. 자기의식이 없으면 흐름을 가로막아 뭇사람은 물론 자연에게까지 악영향을 줘서 죄를 짓게 되고, 그 죗값을 받게 된다. 교육, 종교, 철학, 사회의 가르침이 이러한 기초를 세우지 못하므로 사람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공중에 떠 있는, 바람개비 같은 모습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캔디의 죽음을 보며 나 자신은 물론 사람, 종교, 자연의 섭리에까지 연상된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내가 캔디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캔디가 나를 사랑하고 갔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종교신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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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유천하 2016/07/22 [12:44]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반려견을 통해서 큰 사랑을 체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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