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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립정신(獨立精神)으로

원영진 | 기사입력 2017/02/27 [07:18]
“보수·진보 없는 오직 나라사랑의 독립정신으로”

다시 독립정신(獨立精神)으로

“보수·진보 없는 오직 나라사랑의 독립정신으로”

원영진 | 입력 : 2017/02/27 [07:18]
대한민국독립을 위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는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 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때가 음력으로 기미년(1919년 1월1일)이다.
 
그 후 일본 도쿄에서 백관수등 한국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였고 곧이어 당시 한성에서 민족대표 33인이 1919년 3월1일에 탑골 공원에서 기미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은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강력한 무장투쟁을 통해 실제적 독립운동에 순교로 몸을 던졌다. 그 중심들이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핵심적 독립전선에 희생을 다했다. 김교현, 김규식, 김좌진, 이동령, 이상룡, 이시영, 박은식, 신채호, 윤세복, 안창호 등 39명이셨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제(齊) 하라 독립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하면3천리 옥토가 자기 소유이나 일가(一家)를 회생하라.....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은 완성할지이다.“
(무오독립선언서에서)
 
손병희, 길선주, 한용운 등 33명은 종파를 넘어 주의와 사상을 넘어 오직 나라 독립이라는 한마음으로 3.1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의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를 제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 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위에 던지기 시작 하누나. 천만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다.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컫는 대종교 홍암 대종사님은
 
“아! 아프다…….한울, 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뱀이 먹고 돼지가 뛰어가니 사람 겨레의 피 고기가 번지듯 하도다.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 모래는 비바람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 ……. 내가 이제 온 천하에 형제자매들의 허물을 대신하여 한 오리 목숨을 끊어서 위로는 한얼님께 사례하며 아래로는 모든 동포에게 사례하노라”
 
라고 산언하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 하시고 황해도 구월산에서 조천(朝天)하셨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만주벌판 중원천지에서 나라 찾는 피의 절규가 오직 독립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서로의 생각은 달라도 방법은 달라도 단군한배검의 자손으로 오직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이었다. 아! 이 몸이 죽고 죽어 나라가 산다면 이슬처럼 죽겠노라…….
 
오늘 우리는 스스로 자성해야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피로써 찾은 독립이요, 광복이었다. 여기에는 이기적 자기주장이 없었다. 정치적 파벌주의도 없었다. 보수도 진보도 없었다. 오직 나라사랑 겨레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다시 독립정신으로 돌아가자.
 
이제 우리는 남북을 넘어 촛불의 희생과 태국기의 애국이 다시 찾은 역사광복(歷史光復)으로 국혼광복(國魂光復)으로 통일광복(統一光復)으로 한마음 되길 기원 드린다.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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