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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52시간’ 근무제와 ‘돈 없는 저녁’의 딜레마

양형모 | 기사입력 2018/06/28 [07:22]
워라밸’(Work & Life Balance)도 중요하지만...

‘週52시간’ 근무제와 ‘돈 없는 저녁’의 딜레마

워라밸’(Work & Life Balance)도 중요하지만...

양형모 | 입력 : 2018/06/28 [07:22]

정부가 6월20일 ‘주(週)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사실상 6개월 뒤로 미룬 것은 현장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제도의 연착륙을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고위 당·정·청(黨政靑)협의를 통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한 것은 일자리 창출 등에 대한 재계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다.

당·정·청은 7월1일부터 시행되는 근무시간 단축(주당 최장 52시간)과 관련해 6개월간 처벌 유예 및 계도 기간을 두기로 했다. 이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첫 3개월간 처벌을 유예하고 이후 적발 시 3개월간 계도하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이낙연 국무총리,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등은 6월20일 국회에서 고위 당·정·청 협의회를 열고 근로시간 단축을 비롯한 민생현안을 논의했다.

앞서 경총은 6월18일 고용노동부에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의 제도적·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며 “연말까지는 단속과 처벌 대신 계도기간을 부여해 달라”고 건의한 바 있다. 당·정·청 협의에서는 ‘6개월 계도기간’에 대해 참석자 간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수석대변인은 협의 뒤 브리핑에서 “행정지도 감독은 처벌보다는 계도 중심으로 하고 금년 말까지 6개월간 계도기간·처벌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돈 없는 저녁’은 행복하지 않다  

정부가 주 52시간 근무제(근로시간 단축)를 추진한 배경에는 ‘저녁 있는 삶’이 있다. 근로자들을 잦은 야근·특근 등에서 해방시켜 저녁 시간을 돌려주겠다는 ‘선한’ 취지를 놓고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줄어드는 근로시간을 때우기 위해 기업들이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는 기대도 담겼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고 했던가. 현장 분위기는 정부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다. 기업들은 신규 채용보다는 생산성 향상과 공장 자동화, 업무의 외주화 (外注化)쪽에 집중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기업 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 탓에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아서다. 일부 중소기업은 최저임금 인상에 근로시간 단축까지 겹쳐 생존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토로한다. 300인 미만 기업(50~299인)은 2020년 1월부터 주 52시간제가 적용되는 만큼 시간이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대기업 협력사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납품처의 근로시간과 작업 일정에 맞춰야 해서다. 임금이 깎이게 된 이들은 청와대 게시판에 ‘누구를 위한 주 52시간인가’라는 글을 올리고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뛰는 대기업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의 경우 1~3년 걸리는 휴대폰과 TV 신제품 개발 주기를 3~6개월 늘리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그만큼 글로벌 ‘속도경쟁’에서 뒤처질 게 뻔하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S9 소프트웨어 개발자 1000여명은 제품 출시(2018년 3월)를 앞두고 지난해 11월부터 4개월간 일요일만 빼고 매일 밤 12시까지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애플이 아이폰이라는 혁신 제품을 들고 나왔을 때, 빠른 추격으로 대항마 위치에 오른 기업은 삼성뿐이다. 타이밍을 놓쳤다면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노키아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어디 그 뿐인가. 건설사들 사이에선 해외 수주 급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해외 플랜트 공사 등에서 한국 기업 특유의 강점인 공사기간 단축이 사라지면 수주 경쟁력을 잃을 것”(H사 K부회장)이라는 지적이다.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벌어지는 난맥상을 보면, 결과를 바꾸는 ‘사소한’ 변수를 일컫는 의미로서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고용부가 얼마 전 내놓은 주 52시간제 가이드라인(노동시간 단축 가이드)은 행정해석과 판례를 모아 놓은 수준이어서 “도움이 안 된다”는 게 기업들의 불만이다. ‘노사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는 분쟁의 불씨만 키울 소지가 다분하다. 근로시간 적용의 예외인 특례업종을 한꺼번에 26개에서 5개(육상·수상·항공운송·운송 관련 서비스·보건업)로 줄일 때부터 ‘예고된 혼란’이었다.

‘휴식이 있는 삶’이나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Work & Life Balance)도 중요하지만 고용은 늘지 않고 근로자의 실질소득이 줄어들며,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저하된다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돈 없이 ‘쉬는’ 사람보다는 여유시간을 즐기면서 ‘노는’ 사람이 많아져야 행복하지 않을까. 
양형모(경영학 박사·애원복지재단이사 ·본지 고문·hm18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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