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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반도에 천리교 전래와 전개①

장정태 | 기사입력 2022/02/02 [10:08]
미군정청에 의해 왜곡된 천리교, 70여년 지난 현재도 한국내 포교 어려움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반도에 천리교 전래와 전개①

미군정청에 의해 왜곡된 천리교, 70여년 지난 현재도 한국내 포교 어려움

장정태 | 입력 : 2022/02/02 [10:08]

<연재순서>

1. 미군정청에 의해 왜곡된 천리교, 70여년 지난 현재도 한국내 포교 어려움

2 메이지 정부 탄압을 받으면서 체계적으로 변화한 천리교 교리

3.한국 천리교 역사와 포교활동

 

반일감정이란 사회적인 분위기 불구.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일본계 종교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함께 이 땅에 소개된 일본종교는 그 의도와 다르게 침략의 원흉이란 오명을 받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땅을 떠났다. 순수종교 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 이들 종교단체(종단)들은 패전국의 전범으로 몰려 개인 재산은 물론 종교단체 재산이 일본으로 반출이 동결되었다. 그 승전국 미 군정이 적산 재산이란 이름으로 기독교 단체를 비롯 일부는 개인에게 매각형식으로 양도되었다. 인류역사상 종교단체와 개인 재산까지 전리품 형식으로 취한 예는 전무후무한 형태다.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76년전 독립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강요받은 불편한 기억을 하는 세대는 전 인구대비 극소수다. 그러나 민족적 정서는 일본에 대한 앙금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우리의 승전이 아닌 연합군의 승전이 가져다 준 부채의식이다.일본과 대한민국은 문화와 경제 상호의존도는 2~3위에 이르는 경제공동체 국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적 감정의 골은 깊다. 특히 종교의 교류는 상호방문 관계 이상 진전이 없다. 일본 지배 36년 한반도에는 어느 정도 신도 층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계 신도, 신종교, 불교, 기독교 계통의 신도는 외형적으로 전혀 없어 보인다.

 

한국내 천리교는 수 차례 내부 문제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1965622일 한일양국이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 이후 공소시효 만료 등 예를 들어 재산권 주장이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본계 종교들은 한국 사회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반일감정이란 사회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 한국 내 기성 종교단체를 위협하기에 이르고 있다.

▲ 정부로부터 끝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재 천리시라고 하는 하나의 종교도시를 형성하는 등 독자적인 종교활동을 해오고 있다.     

 

일본에서 창교된 신종교 천리교는 농촌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창교자 미키는 한국의 무속인들의 신내림 현상과 유사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종교지도자가 된다. 정부로부터 끝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재 천리시라고 하는 하나의 종교도시를 형성하는 등 독자적인 종교활동을 해왔다.

 

한국사회에서 천리교의 위상은 창교 초기에 일본정부에 의해 신도계에 속한 연유로 한국내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신도와 유사종교단체란 오해가 뿌리 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이후 미군정청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종교시설을 강제수용후 미군정청은 주로 개신교 시설로 변하였다. 세계 종교사, 전쟁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승전국의 조치와 함께 적산이란 이름으로 일부 시민들이 취득한다. 타종교시설에 대한 무상취득, 불법 취득에 대한 반성보다 선교의 기회가 되었다.

 

미군정청에 의해 왜곡된 천리교는 해방이후 70여년이 지난 현재에서 한국내 포교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존 1세대 신도의 자연소멸되는 분위기는 한일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전도와 함께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부흥기를 마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현상은 한국에 토착종교인 서민신앙의 성장과 일정부분 유사하다. 서민신앙이 기존신앙인 불교, 개신교, 천주교, 민족종교의 교리와 습합하면서 새로운 토양을 형성하였다. 천리교 또한 기존의 신앙과 습합하는 방식으로 전도되고 있다.

 

천리교 창교한 나카야마 미키의 일생과 포교

 

천리교를 창교한 나카야마 미키 中産ミキ,17981887)1798년 당시 일본 야마토노 구니(大和國) 야마베군 (山邊郡) 산마이덴 마을(三昧田村)(현재奈良縣天理市 三昧田町)의 마에가와(前川)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시치마사노부는 당시 평민들 중에서는 드물게 글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었고, 미키를 서당에 보내 역시 글을 깨치도록 하였다. 당시에 여자가 글을 배우도록 함은 드물었다. 종종 비교되는 인물인 오모토교조 데구치 나오(1837-1918)만 하더라도 까막눈이었다.

 

미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시기에 미키는 여자에게 주어진 일은 야무지게 잘 하지만 사람들과 얼굴 맞대며 놀기는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소녀였다고 한다. 미키네 집안은 일본 불교종파인 정토종을 대대로 믿었다. 미키는 남달리 신심이 깊어 어린 나이에도 염불을 빨리 외워 따라 하고 비구니로 출가하기를 원하였다.

 

1810년 미키는 13세에 쇼야시키 마을의 나카야마 젠베(中山善兵衛)와 결혼하였고 결혼 11년 만에 장남 슈지 中山秀司, 18211881)를 출산하였으며 이후 17년 간 15녀를 생산하였으나 그중 13녀가 성인으로 자랐다. 18385녀가 출생하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고, 1830년에 2, 그리고 1836년에는 4녀를 잃게 된다. 1837년에는 장남(秀司)이 돌연 다리의 고통을 호소하였고, 그로 인해 산복행자(山伏行者=일종의 무녀에게 가지(加持)기도를 몇 차례 의뢰하여 행하게 된다. 가지기도란, 진언종(眞言宗) 계통에서 유래된 액을 쫓는 의식으로 서일본에서는 병을 낫기 위해 산 면에서 혹은 집에서 가지라고 불리는 (加持臺) 무녀를 통해서 신내림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가운데 18381023일부터 장남의 병을 고치기 위해 다시 가지기도를 부탁하게 되는데, 그때 무녀가 없어서 미키 자신이 가지다니(加持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미키에게 신내림이 일어나면서, 자신을 나는 으뜸인 신, 진실한 신이다. 이 집터에 인연이 있어 이번에 세계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하강했다. 미키를 신의 현신으로 삼겠다.”라고 말하면서 3일간 계속 격렬한 신내림을 보여 주게 된다. 그러자 1026일 미키의 남편이 신의 의도에 따라 미키를 신의 현신(顯身)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미키는 카미노야시로(), 즉 신의 현신으로 정해지게 된다. 신의 모습은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지상에서의 신의 모습, 즉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의 모습을 말한다. 천리교는 1026일인 이날을 입교일로 삼고 있다. 천리교단은 남편이 미키를 신령에게 바친 사건을 천리교의 시작으로 여겨 1838년을 원년(1)으로 하는 릿쿄(입교立敎)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 사진 입교일 천리교단은 남편이 미키를 신령에게 바친 사건을 천리교의 시작으로 여겨 1838년을 원년(1년)으로 하는 릿쿄(입교立敎)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1853(56), 남편 젠베에가 향년 66세 나이로 사망했다. 젠베에가 사망한 뒤, 당시 17세였던 막내딸 코칸이 신령의 명을 받아 슬픔을 참고 오사카까지 가서 "나무천리왕님."이라는 기도문을 외우며 카미나나가시(神名流)를 하며 포교했다고 한다.

 

천리교도들은 코칸이 했다는 오사카 포교를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의 천리교 신자들은 코칸이 오갔다는 행로를 표시한 지도를 들고 길을 따라가며 순례하기도 한다.

 

이같은 순례는 진언종의 시조인 공해(空海)1200년 전 시코쿠에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는 시코쿠 손례와 같이 코칸의 길을 걷는 전통을 가졌다.그리고 신의 현신으로 정해져 신의 계시를 전하게 된 미키를, 천리교에서는 교조-우두머리 사마라고 부른다. 한편 교조는 1866년부터 1880년에 걸쳐 신악가미카구라우타’(御神樂歌)]를 그리고 1869년부터 1882년에 걸쳐 친필오후데사키御筆先)]’를 집필함으로써 천리교의 가르침을 성문화하게 된 다이시기를 전후로 해서 치병을 중심으로 한 포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신자들이 급증하였고, 후에 천리교조직의 핵심이 될 강(-교회의 전신이 전국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67723일 당시 신사관령(神社管領)이던 요시가와吉川) 가문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885523일에는 신도본국부속육등神道本局部屬六等) 교회의 설치를 인가받는 등 차차 승격하게 되었으며, 189146일에 신도 본국 직할 일등 교회가 되었다 그 후 天理敎는 비약적인 발전함에 따라풍기문란의약 방해라는 측면에서 정치 권력과 기성불교 및 언론 그리고 일반 대중으로부터 탄압박해비난을 받았으며, 그것을 피하고자 정치 권력이나 사회와 영합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10년에 걸친 공인 운동, 즉 독립청원(獨立請願)운동을 전개하여 1908년 드디어 메이지 정부로부터 공인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천리교 대표자는 미키 직계자손으로 이어져서 미키를 오야사마’(교조님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후 대표자를 진주[신바시라(眞柱)]라고 부르고 있다. 1952년 종교법인으로 등록하였다. 같은해 218(음력 126) 금요일 오후 2, 나카야마 미키가 거처에서 사망했다. 향년 만 88, 세는 나이로는 90, 미키가 처음 신들린지 만482개월, 이치노모토 분소 유치장에서 풀려난 지 만 11개월째였다.


아직 교단이 법적 공인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신관 모리야 히데오(守屋秀雄)를 재주(斎主)로 삼아 6일장으로 신토식 장례식을 치른 뒤 (미키가 오중상전을 받은) 젠푸쿠사에 있는 나카야마 집안 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때 미키에게 올린 시호는 '마미치이야히로코토시리메노미코토(真道弥広言知女命)'이다.


미키는 원래 사람이 천리왕에게 받은 수명이 115세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키는 115세를 모두 채우고 사망하리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미키가 90세에 숨을 거두자 신자들은 매우 동요했다. 이부리 이조는 초대 혼세키가 되어 '미키가 신자들을 돌보고자 정해진 수명에서 25년 일찍 숨을 거두었고, 지금도 신자들을 돌본다.'는 신탁을 받았다. 이후 이부리 이조는 살아있는 동안 천리교단의 영적인 부분을 이끌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부리 이조는 미키가 기대보다 일찍 죽어 신자들이 받은 충격을 최소화하고, 신바시라가 교주가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부리 이조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없고 야망은 없으나 인망은 높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천리교단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 천리교는 미키가 죽은 뒤에도 환생하지 않고 그 혼령이 여전히 터전(천리교 본부 자리)의 교조전(敎祖殿) 건물에 머문다고 믿는다.  


천리교는 미키가 죽은 뒤에도 환생하지 않고 그 혼령이 여전히 터전(천리교 본부 자리)의 교조전(敎祖殿) 건물에 머문다고 믿는다. 미키의 죽음을 은신(隱身)이라고 표현하는데, 눈에 보이는 육신을 숨겼다는 뜻이다. 교단은 지금까지도 교조전에 조석으로 식사를 올리고 냉온방을 하며 옷을 지어 바치는 등 미키가 여전히 살아있는 듯이 대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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