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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34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7/13 [08:07]
어느 성자·성인이라 한들 ‘삶’의 ‘기준’은 없다

통찰! 天問天答 134

어느 성자·성인이라 한들 ‘삶’의 ‘기준’은 없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7/13 [08:07]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어느 성자·성인이라 한들 ‘삶’의 ‘기준’은 없다 
 
질문294: 진경님은 ‘무엇’을 알았으며, ‘무엇’이 되었으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그렇다할지라도 ‘무엇’을 하고는 있을 겁니다.    

누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질문295: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만을 해결하고 나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사람들은 문제의 실마리, 즉 해결을 해 보려고 합니다. 죽고 나서야 어느 누가 문제를 인식할 수가 있으며, 어느 누가 여한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잘 되어야 한다,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한다, 행복해야만 한다, 이루어야 한다, 라는 생각만 하지 않아도, ‘지금 여기서’ 어떤 문제를 인식할 수가 있으며, 어떤 여한이 있겠습니까?     

질문: 성자와 성인들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노자의 ‘삶’이 다르고, 석가모니의 ‘삶’이 다르고, 예수의 ‘삶’이 다르고, 마호멧의 ‘삶’이 다르고, 크리슈나의 ‘삶’이 다르며, 어느 성자와 어느 성인이라 한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겠습니까? ‘삶’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 석가모니로부터 불가(佛家)의 모든 것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오늘날 다양한 나라에서,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종교의식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불가 가르침의 핵심은 ‘나’, 즉 ‘내 마음먹기이다.’입니다. 일 체 유 심 조!     

질문: 불가에서는 최고의 이상향으로 열반(涅槃)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고승들의 ‘죽음’을 열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죽어서 열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실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단지 사람의 무지가 그려내는 상상과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뇌’를 해결하는 최고의 경지라는 것 또한 없습니다. 단지 그냥 번뇌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와 망상을 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내가 한다.’, 즉 ‘자각’, 즉 ‘스스로’를 아는 것이 참다운 열반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질문: 그렇다 할지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번뇌하고 망상할 수가 있기 때문에, ‘죽어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겨우 하나의 육체와 연관 지어서, 오욕칠정으로 이어지는 번뇌와 망상을 해결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번뇌와 망상이 단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할 뿐인데, 어떻게 ‘깨달음’과 ‘열반’에 영향을 줄 수가 있으며, 만약에 영향을 받을 수가 있다면 어떤 ‘깨달음’과 어떤 ‘열반’을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는다고 여기고 있는 이상은 무지의 연장선이며,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번뇌와 망상을 해결해야만 깨달음에 다가 갈수가 있으며, 열반(니르바나)에 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진경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그까짓 번뇌와 망상은 잠만 자도 해결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바로 이해하고 바로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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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산 2017/07/13 [11:30] 수정 | 삭제
  • 과학의 오류와 종교의 모순을 바로잡으면서 우주를 새롭게 해석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출간됐다. 그런데 과학자와 신학자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저명인사들에게 이 책에 대한 의견을 청구했으나 모두 침묵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선생님의 글은 제가 그 가치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진솔한 답장을 보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가 밝혀졌다. 이 책에 반론하면 5천만 원의 상금을 준다고 책표지에 공시했으나 반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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