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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⑳영혼과 부활

김병윤 | 기사입력 2022/03/25 [08:07]
부활의 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황당한 주장

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⑳영혼과 부활

부활의 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황당한 주장

김병윤 | 입력 : 2022/03/25 [08:07]

영혼:

 

플라톤 학파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이라는 고귀한 실체의 일부를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영혼은 출생하기 전부터 존재하였고 영적 세계의 일부분이다. 지금 영혼은 물체를 구성하는 육체에 갇혀 있지만 궁극적으로 육체를 떠나 신성과 재결합하게 되어 있다. 영혼은 영원불멸이다. 영혼을 통해 인간은 보다 위대한 삶에 합류하게 되어 있다.”1)

 

구약성경에서 생령(soul)은 마음(단독으로 나올 경우), 또는 성품(heart와 같이 나올 경우), 또는 생명이나 인간을 일컫는 의미로 쓰입니다. 숨은 혼령(ghost)이나 정령(정신, spirit)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세계로 돌아가는 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 구분되는 정신활동 또는 생명력이나 기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유대교의 영도 타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와 연결된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의 중요한 경전인 조하르에서는 네페쉬는 사람이 죽고 나서도 길게는 1년 동안 죽은 육신 곁에 머물고, 루아흐는 사람이 이승에서 저지른 죄를 정화하기 위해 연옥으로, 그리고 네샤마는 천당으로 가서 권좌[여호와]와 합해지는 최상의 축복을 누린다. 차야나 예치다는 고귀하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천당으로 간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이 이승의 삶과 별개로 떨어지지 않고, 죽은 자와 산 자의 영혼 간의 긴밀한 연결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2) 유대교와 똑같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들이 영혼이라고 정의하는 존재는 우리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포함한다.”3)

 

천주교도 그리스 철학자들과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99년에 천당과 지옥은 실체를 갖는 장소가 아니라 신과 교감(하거나 또는 하지 않을 수 있는)하는 영의 상태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곳에서 우리가 접하는 천당이나 행복은 구름 속에 존재하는 실체적 장소나 추상적 관념이 아니고, 삼위일체와 생동감 있게 사적 관계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4)

 

유대교와 천주교에서는 사후에 저승으로 가는 것은 실체인 육체가 아니고, 영적 존재인 영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정신은 육체와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며, 육체가 사라지면 정신도 따라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후에 육체와 정신이 사라지고 남은 순수 영혼에는 아무런 육체적 또는 정신적 요소가 없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육체가 배제된 생각하는 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고라는 것은 육체적 자극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육체라는 매개체가 배제된 상태에서 사고하는 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진정한 철학자들은 죽은 후에 우리는 육체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함을 찾고 다른 순수한 영혼들과 벗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처에 존재하는 분명한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것은 바로 진리의 빛이다5)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인 세베스(Cebes)영과 관련하여서는 사람들이 의심하기 쉽다; 사람들은 영이 육체를 떠나면 갈 장소가 없고 죽어서 육체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시점에 연기나 공기와 같이 분출되어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바뀌듯이 바로 파괴되고 소멸된다6)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영은 그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에서 왔듯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오거나 돌아가는 무의 상태는 완전한 무가 아니라 무유[無有, Nosome(Nothing but Something의 합성어)], 이것은 신과 같은 속성을 갖습니다. 무유란 빅뱅이 일어난 시점의 상태를 의미하며, 원자가 깨져 있어 단지 진동의 속성만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원자의 구조에서 양성자 이하 단위의 상태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무유에서 원자가 나오고 결국 만물이 나옵니다.

 

바울은 영이 모든 것을 살피며, 심지어 하느님의 깊은 경륜(내면)’까지 살핀다고 주장한다(고린도전서 2:10). 바울은 영이 인간의 심층적 차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층적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깜짝 놀라게 만드는 개념이다. 즉 하느님의 영과 똑 같은 영이 우리 속에도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이 영()이 모든 생명의 중심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생각의 결론으로서, 우리 인간의 몸이 그 거룩한 영의 성전이라고 주장했다(고린도전서 6:19).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루살렘의 물리적 성전은 초자연적이며 외부적인 하느님(여호와)에게 지상의 거처(居處), 말하자면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바울은 하느님을 위한 새로운 거처가 하늘 저편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내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7)

 

고린도전서 3:16에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며 모든 생명체에 성령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무생명체이고 인공구조물인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체에 고루 존재하고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신이 지구와 생명체를 창조하였다면 이승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는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그 상태에서 다음의 삶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배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무유(無有)에서 생성되었고, 결국 무유로 수렴될 뿐입니다. ‘죽음은 죽은 존재가 상태가 변화하여 다른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일 뿐, 모든 존재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추론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일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저승에서 육체를 가진 채로 존재한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지 혼백의 상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하지만 육체가 없이 혼백의 상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에서의 기억 이외에는 더 이상의 새로운 생각이나 기억이 생성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불합리한 주장이에요.

 

육체를 떠난 정신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정신은 육체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의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배제한 혼백이나 정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런 상태의 존재가 접촉을 통해 상호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은 인식의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 번 양보하여 혼백이 사후세계로 가서 존재한다면, 한 시점의 기억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의 실효성은 떨어집니다.

 

부활:

 

육체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들어가 있다가,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승에 펼쳐지면서 죽은 자들을 불러내 그 세상에서 함께 할 사람들을 심판을 통해 골라낸다는 허무맹랑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일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화장을 반대하고 매장을 권장합니다.

 

부활의 개념을 교리로 정립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조우하는 경험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과 더불어, 자신이 본 천상에서 부활한 예수의 모습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입니다.

 

부활이 가능하다 해도, 만약 부활이 이루어진 후 지구나 또는 다른 어떤 곳에 있을 천당이나 지옥에 가서 그 많은 인간들이 살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존재가 이후 살아가게 될 천당이나 지옥에서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육체를 의미합니다.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매장된 사람과 화장된 사람의 육체를 어떻게 원래의 상태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할 것입니다. 죽은 상태의 육체와 정신으로 되돌려 놓아야 그 사람이 그동안 지내온 모든 과정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존재가 전생에서 죽은 나이의 모습으로 부활해야 할 겁니다. 이럴 경우 만약 치매에 걸려 죽은 사람이 있어서 육체를 돌려주면서 정신을 죽기 직전의 상태로 놓아둔다면 처참한 몰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천당이나 지옥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는 아주 늙은 상태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사후세계의 노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육체를 어린 상태나 젊은 상태로 부활시킨다면, 그 나이 이후에 저지른 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육체는 젊은 상태로 돌려주면서 정신은 죽음 직전의 상태로 둔다면 이 또한 모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그나마 천당이 따로 있다고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미국 국토의 1/2에 불과한 그렇게 좁은 곳이 아니라, 지구보다는 훨씬 면적이 넓은 곳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크더라도 이 지구에서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져 이곳에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이 몰려가서 살게 됩니다. 지금도 비좁아 문제가 많은 지구에 수백 세대에 걸쳐 존재했던 사람들이 동 시점에 같은 장소에 모여 살게 된다면 편히 앉을 자리나 나올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원전 5만 년부터 기원후 2017년까지 약 1,080억 명의 인간이 태어났고 현재 75억 명이 살아 있다. 현재 지구상의 인구를 제외하면, 1,000억 명 정도가 죽었으며, 죽은 자와 산 자의 비율은 14.4:1이다.” 8)당장 죽어 저승에 간다면,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의 13배에 달하는 인간이 그곳에 몰려 있을 것입니다. 이들과 부대끼며 살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넓은 공간이 있다고 해도 이 많은 사람과 사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편할 것입니다.

 

부활과 관련하여 언제 그날이 올 것인가에 대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지자를 자칭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신도들을 현혹하여 대비하였지만, 전부 사기로 판명이 났습니다. 부활의 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황당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부활하는데 동물이나 식물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기근과 기아가 난무하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 뻔합니다. 또한, 부활된 자들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세상에도 목회자와 신도의 구분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 절대자와 그 주위를 맴도는 천사들이 이들보다 더 가공할 수준의 권위와 권리를 주장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승에서 서로 양보하고 사랑을 베풀며 이승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자고 했던 부처나 예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주장하는 영생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어도 산다거나 살아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존재의 본질의 속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인 영이나 원자일 수도 있고 무유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라고 말하면서, 이런 개념을 확실히 이해한다면 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를 깨우치면 죽어서도 살아 있고, 살아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진리를 전달하였습니다. 

출처:

1) The Jesus Puzzle, Earl Doherty, Canadian Humanist Publications, 1999: 33

2) The Talmud, A. Parry, Alpha Books, 2004: 261, 내용 편집역주

3) Euthyphro, Apology, Crito, Phaedo, Plato, Prometheus Books, Amherst, NY, 1988: 76-78

4) Heavens on Earth, Michael Shermer, Henry Holt and Company, 2018: 57

5) Euthyphro, Apology, Crito, Phaedo, Plato, Prometheus Books, Amherst, NY, 1988: 80

6) Euthyphro, Apology, Crito, Phaedo, Plato, Prometheus Books, Amherst, NY, 1988: 83

7)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143

8) Heavens on Earth, Michael Shermer, Henry Holt and Company, 2018: 1 

 

필자 김병윤195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퍼듀대학교 MBA 과정을 졸업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전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마케팅업무를 담당했으며,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제화 및 외국어 교육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가천대학교, 신구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분교 및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시간강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레스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삼성신화 아직 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정아에게 보내는 서른 장의 편지, ()과 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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