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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⑳ 현대 한국불교 남인도 불교와 관련 있어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5/16 [09:16]
보리달마대사는 왜 중국에 왔나, 부처 보다 더 유명한 선불교 초조(初祖)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⑳ 현대 한국불교 남인도 불교와 관련 있어

보리달마대사는 왜 중국에 왔나, 부처 보다 더 유명한 선불교 초조(初祖)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5/16 [09:16]

보리달마대사는 왜 중국에 왔나, 부처 보다 더 유명한 선불교 초조(初祖

 

보리달마는 누구인가. 한국불교에서 달마대사는 한 때 부처님보다도 더 유명했다. 남방 불교가 뜨면서 보리달마대사에 대한 존경도와 유명세는 점점 가라앉고 있다. 사실 20여년전만해도 달마대사가 우리 불자들의 뇌리에는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달마대사의 위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 중국 명나라 때인 1484년에 제작된 사암(沙巖)좌상인 보리달마(菩提達磨)

 

보리달마는 남인도 출신으로 절반이 전설적인 인물이다. 출신이 불명확한 고승이 이처럼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은 어쩌면 선불교(禪佛敎)의 본질과도 통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달마대사는 기원후 56 세기의 남인도 출신으로 중국에 와서 인도의 정통 명상법인 선()을 전수해 주고 다시 인도로 돌아간 것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고승이다. 남인도 불교가 한창 전성을 이루던 때의 승려로서 다른 유명한 인도 승려들에 비해서 확실한 승보(僧譜)나 전기(傳記)가 없이 중국에 와서 인도 불교의 정통선(正統禪)을 전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달마대사의 이름은 다르마(Dharma)인데, 이것은 불교의 핵심 진리인 법()이라는 산스크리트어이다. 달마대사는 정작 출신지인 남인도에서 보다도 중국에서 자료가 더 많다. 달마대사와 관련된 장소는 단연 소림사이다. 그는 불교의 정통선을 중국에 전수해주었을 뿐 아니라. 소림쿵후(少林功夫)를 창안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리달마대사에 관하여 남인도, 중국선불교 조사(祖師), 소림사와 소림쿵후로 대별하여 고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키워드를 갖고 보리달마 대사에 대하여 추적을 해보자.

 

왜 보리달마 대사를 추적해야 하는가. 그가 왜 어떻게 무엇을 중국에 인도 불교의 정통선을 전해주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며, 지금도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달마대사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남인도 불교에 대해서는 이미 전회에서 소개했지만, 달마대사에 대한 인도 측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픽션도, 넌픽션도 아닌 반전설적인 이야기에 의존해서 그것도 중국 측 자료에 의해서 추정할 따름이다.

 

사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부터 그렇게 유명한 고승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인도 출신 승려로서 그것도 명상을 주로 하는 수행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는 불교학을 다 마스터한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본질이 명상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에 인도 불교의 정통선인 댜나(dhyāna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자나jhāna)를 수행의 정통 명상법으로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당시에 중국은 중앙아시아나 서역 오아시스 나라(타림분지)와 인도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이 다소 애매했던 것 같다.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막연하게 서역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지리적 개념으로 서역은 지금의 신강성 일대와 중앙아시아 지역이 된다. 사실 보리달마는 중국에 올 때 해로를 통해서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서는 서역에서 온 승려로 알려져 있으며, 귀로(歸路)도 파미르고원을 지나갔다고 한다.

▲ 동아시아(중국) 승려에게 불교를 가르치고 있는 파란 눈의 중앙아시아 승려, 9〜10세기에 그려진 투르판 화염산 근처의 베제클리크 천불동의 프레스코화.    

 

달마대사가 중앙아시아인지 페르시아인지 인도인지 정확한 지역을 모르고 막연하게 서역 승려란 정도의 언급인데, 당대 중국에서는 외국 승려는 거의가 서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렇게 서역 승려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서역 승려는 중앙아시아 특히 페르시아계 승려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중국에서 벽안호(碧眼胡) 즉 파란 눈의 야만인이라고 했는데, 달마도에 나타난 그림을 보면 짙은 수염에 얼굴이 검게 나오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계통의 얼굴이다. 그런데 또 어떤 그림은 페르시아(이란)인처럼 그려지기도 하다.

 

보리달마가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였다면, 그는 분명 인도에서 한 조각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실제 인도 타밀나두의 칸치푸람에 가보면 보리달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중국측 자료에 의하여 극히 소수의 불교연구가나 중국역사 연구가에 의하여 희미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중국에서 향지국으로 번역한 나라는 팔라바국인데 275년부터 897년까지 남인도 지역을 지배했던 고전기 인도의 왕국이다. 팔라바국은 마헨드라바르만 1세와 나라심하바르만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강국이 되었으며, 9세기 초까지 텔랑가나와 타밀나두의 북쪽 지역을 약 600년간 지배하였다.

 

인도 타밀나두 주의 칸치푸람에 수도를 두었던 팔라바국은 예술의 다양한 발전과 힌두교의 흥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그로 인해 인도아리아 문화를 남부에 전파하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인도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팔라바의 군주들은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불교 보다는 힌두교에 더 신앙심을 부여했다. 수도인 칸치푸람의 대학을 중심으로 산스크리트 문학 등의 학문 또한 유행하였다. 이처럼 팔라바국은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 등의 힌두 문화가 남인도 지역에 전파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힌두교의 전파에 힘쓰고 계속해서 학문을 보호함으로써 팔라바 왕국의 수도인 칸치푸람은 남인도 학문의 중심지인 동시에 힌두교의 7대 종교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힌두교가 강세라고는 하지만, 불교학 연구도 만만치 않게 성행했으며 다수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담론하고 있는 보리달마가 이 지역 출신인 것은 확실할지 모르지만 왕자라는 것은 비약이 아닐까 하며, 중국에서 달마대사를 미화하여 어느 정도 가공을 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어떤 분들은 달마대사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거의가 꾸며진 허구라는 것이다.

▲ 보리달마대사의 고향인 남인도 팔라바 왕국(노란색, 6세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보리달마는 팔라바 왕국의 당대 타밀 왕의 셋째 왕자로서 칸치푸람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티베트와 남아시아 전통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남인도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보리달마를 페르시아인으로 여기고 있다. 종합해보면 보리달마는 남인도의 드라비다인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달마대사가 왕자 출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불교 명상을 정통으로 하는 수행자였음은 분명하고 남인도 출신 상좌부파 비구였음이 확연해 보인다. 그가 중국에서 벌인 행적을 보면 상좌부파 출신 비구였음이 파악되는데, 이것은 그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나타나고 있다. 보리달마대사가 남인도에서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 광동성 광주에 상륙, 소림사로 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가기 전의 남인도 칸치푸람의 불교는 상좌부 불교가 주류였고, 실론과 밀접했다. 또한 칸치푸람의 불교는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는데 특히 버마와 태국의 몬족에게 전해졌다. 지금의 버마나 태국 불교 이전에 몬족들에게 상좌부 불교를 전했다. 몬족은 미얀마의 민족으로 대부분 몬주, 바고 구, 이라와디 삼각주와 타이-미얀마 경계를 따라서 살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초기부터 거주하던 민족의 하나인 몬족은 미얀마와 타이에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였다. 몬 문화는 버마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부의 몬족은 일찍이 오래전에 시암(태국)사회에 흡수되었고 서부의 미얀마의 몬족은 마찬가지로 동화(同化)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몬족과 몬어 사용자는 100만 명 정도이다.

 

몬족은 기원전 1500년경에 동남아시아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는데, 현재의 동남아시아의 소수민족으로서는 최초라 생각되고 있다. 기원전 300년쯤에 수완나품 왕국을 건국했고, 기원전 200년쯤에는 아소카 왕이 보낸 불교 전도자에 의해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몬족은 그 이전부터 해로에 의한 불교와 접촉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몬족은 그 후에도 1000년경까지 동남아시아에서 번영했고, 몬 문자 등을 개발해 선주(先住)의 문명 민족으로서 동남아시아에 군림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너무나 초라한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동남아 불교나 중국불교는 남인도 칸치푸람의 불교와는 전연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리달마대사의 중국행을 추적해야 한다. 이런 불교적 배경에서 보디 다르마는 중국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보여 진다.

▲ 남인도에서 온 고승 보리달마대사와 명상에 대한 문답을 나눈 것으로 전해지는 양나라 무제(464〜549).  

 

이미 이때는 중국 남인도와 실론 간에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우리는 중국 동진의 법현 법사가 인도구법을 마치고 실론까지 가서 범본 율장(화지부)을 구해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중국으로 귀환한 것을 기억한다. 중국 광동성 지역에 가면 비단 보디 다르마 선종 초조(初祖)만이 아닌 남인도와 실론에서 많은 삼장비구들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에 이미 불교가 이 지역에 전해진 것으로 중국 불교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광주시의 광효사(光孝寺)는 범어학(산스크리트어)을 익히는 어학원이 있었다. 대개 해로로 인도에 가는 인도 구법승들은 이곳 광주시 광효사나 나부산에서 산스크리트어를 1년 정도 익히고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 가서 2년 내지 3년 정도 어학과 인도철학의 기초 중급 과정을 마스터하고 인도의 날란다사원대학에서 심화과정을 이수했다. 달마대사가 이곳 광주에 발을 디딘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마도 추측건대 달마대사는 경율론(經律論) 삼장에 능통한 고승이었지만, 그는 정학(定學=명상)에 더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보디 다르마가 중국에 온 연대가 확실하지 않아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5세기에서 6세기 사이로 본다면 중국에는 전송((前宋)이라고 알려진 유송(刘宋朝420479)이 있었고, 다음은 남북조 시대 양조(梁朝502587)가 있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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