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㉒달마대사는 소림 동굴에서 9년간 면벽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5/30 [06:41]
소림무술 72절기 창시하고 《역근경》 편찬, 최초 문헌 양현지의 《낙양가람기》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㉒달마대사는 소림 동굴에서 9년간 면벽

소림무술 72절기 창시하고 《역근경》 편찬, 최초 문헌 양현지의 《낙양가람기》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5/30 [06:41]

소림무술 72절기 창시하고 역근경편찬, 최초 문헌 양현지의 낙양가람기》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 땅에 이르자, 모든 것이 생소했다. 풍토도 새로웠고 중국불교도 인도 불교와는 매우 다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감을 느끼고 중국불교를 바로 잡기에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달마대사가 중국 땅에 발을 디딜 때는 적어도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지가 5백년정도 되었지만, 부처님의 정법이 제대로 전해졌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달마의 눈으로 본 중국 불교는 어딘지 좀 서툴러 보였고, 불교의 본질인 명상법보다는 너무 사변적인 교리연구나 기복형 불교가 전부인 듯 했다.

▲ 소림 무술 승려들이 소림 쿵푸 72절기 가운데 한 동작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이래서 달마대사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북위 숭산 소림사로 향했다. 숭산(嵩山)은 중국 오악(五岳) 가운데 중악(中岳)에 해당되는 산이다. 숭산의 옛 이름은 외방(外方), 숭고(嵩高)라 하였는데 덩펑시(登封市) 서북면(西北面)에 위치하고 있다. 숭산은 서쪽의 소실산(少室山)과 동쪽의 태실산(太室山)으로 구분되며, 모두 72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태실산은 해발 1491.7m의 준겁봉(峻极峰), 소실산은 해발 1,512m의 연천봉이 주봉이다. 북쪽으로는 황하(黃河)와 낙수(洛水)를 끼고 남쪽으로는 영수(潁水)와 기산(箕山)에 닿으며, 동쪽으로는 중국 다섯 왕조의 도읍지였던 변량(汴梁), 서쪽으로는 아홉 왕조의 도읍지였던 뤄양(洛陽)이 있어, ‘판락양경, 기내명산(汴洛兩京, 畿內名山)’이라 불린다.

 

숭산은 중국 도교(道教)의 성지이자 소림사(小林寺)가 위치한 불교의 발상지이며, 또한 중국 신유교(新儒教)의 탄생지이기도하다. 소림사는 숭산 서쪽인 소실산에 위치하고 있다. 숭산은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매우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고대로부터 30여 명의 황제와 150여 명의 저명한 문인들이 몸소 숭산에 올랐으며, 또한 신선(神仙)이 모여 산다는 신령한 땅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명승고적이 많이 퍼져 있으며, 오악의 하나로 꼽힌다. 시경(詩經)에는 숭산을 가리켜 노래한 숭고유악 준급우천(嵩高惟岳峻极于天_’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요순시대에는 방산(方山), (), () 왕조 시대에는 숭고, 서주 때는 악산(岳山)으로 불렸다. 기원전 770년 주 평왕(平王)이 낙읍(뤄양)으로 옮긴 뒤, 이 산이 가운데 있으며 왼쪽에 대(), 오른쪽에 화()가 있어 천지의 중심이 된다. 중악숭산(中嶽嵩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가 처음으로 이곳에 중악묘(中嶽廟)를 지었는데, 이는 중국 고대 건축군의 하나이다. 한 무제가 태실산에 봉선(封禪)을 위해 올랐을 때 산에서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태실산을 만세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훗날 시경에 있는 숭산을 노래한 구절에 따라 숭산이라 고쳤다. 무측천이 숭산에서 봉선을 하면서 중악을 신악(神嶽)이라 부르기도 했다. 북송 이후 중악 숭산이라는 이름으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 숭산에 있는 중국 4대 서원 가운데 하나인 숭양서원. 

  

태실산(太室山)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숭양서원(嵩阳书院)은 중국 고대 4대 서원의 하나로 꼽히며, 법왕사(法王寺)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사원 건축의 하나다. 숭산은 72개에 달하는 봉우리마다 하나씩 절이 있는데, 북위의 효문제가 495년에 천축의 승려 발타를 위해 지어주었다는 절로써 소림무술로 유명한 소림사도 그 중 하나이며, 여러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달마대사가 머물렀다는 숭산 소림사는 중국보다도 한국불교에 영향을 끼친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달마대사에 대한 자료가 인도에는 전무 하다시피하고 중국에는 있는데, 대체로 지금까지 달마대사에 대한 현존하는 이야기는 두 개가 있다. 대강 요약한다면 달마대사는 서역에서 왔으며 페르시아인이라고 했고, 남인도의 왕의 셋째 아들이라고도 묘사되었다. 나중의 문헌은 이런 소스에 더 첨가하여 브라만 왕의 후손이며 보다 구체적인 사항이 추가되는데, 브라만 혈통이 강조되고 있다.

▲ 실크로드의 관문인 옥문관(玉門關).  

 

여기서 서역이라는 개념은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8세기 사이의 중국 연대기에 명시된 역사적 이름으로 옥문관의 서쪽 지역을 말한다. 그렇지만 타림분지만이 아닌 중앙아시아 때로는 인도 아 대륙과 같은 중국 서부의 다른 지역을 언급하기도 해서 범위가 매우 광범위한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달마대사를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양현지(楊衒之)547년에 편찬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이다.

 

양현지는 대승경전을 한역하는 역경사로서 보리달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그 당시 서부지역에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인으로 보리달마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거친 들판을 거쳐서 중국으로 왔다. 영녕사 탑 위 기둥의 금색 원반이 태양에 반사되고 빛이 구름 표면을 비추고, 탑 위의 보석이 바람에 날리고, 메아리가 하늘 너머로 울려 퍼지는 것을 보고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외쳤다. "진실로 이것은 영적(靈的)인 일이다." "나는 150세이며 많은 나라를 다녀왔다.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멀리 있는 불계(佛界)에도 이런 영적 현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탑에 경의를 표하고 며칠 동안 손바닥을 합장한 채 기도를 올렸다.

▲ 낙양을 대표하는 용문석굴, 백마사, 모란꽃과 용문교.

 

낙양가람기는 낙양성에 있던 사찰들에 대한 기록이다. 단순히 사찰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낙양의 역사, 지리, 불교, 문학 등에 관한 기록이다. 伽藍記라고 약칭되기도 하는데, 북위의 지리학자인 역여도원의 수경주(水經注)와 쌍벽을 이루는 문헌이다.

 

낙양가람기에서는 달마대사가 인도의 명상을 전해 왔다는 것보다는 신비로운 위업을 할 수 있는 마술사로 묘사되고 있다. 무술과 밀교적인 지식을 가진 진언(眞言)을 하는 서역 승려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달마대사가 선종 초조로서 인도에서 선법(禪法)을 전해 온 것으로 묘사된 것은 한 참 후의 일로 정리된다. 달마대사에 대한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달마대사는 상당 부분이 가공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불과 수 십 년 전만해도 매우 신비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으며, 달마도도 어떤 신비적인 부적의 기운이라도 있는 듯, 많은 불자들이 소장하거나 지니기를 좋아 했다.

 

최근에 와서는 달마도에 대한 인기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고 달마도를 그리는 분도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그렇지만 달마대사와 달마도가 우리나라 불교에 영향을 줬던 강도는 매우 컸다고 하겠으며, 선방의 수좌치고 달마도에 대한 인연이 없는 분이 없지 않을까 한다. 해남에 가면 달마산이 있고, 이름 있는 큰 절에는 달마선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선원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달마대사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부처님 다음으로 유명도가 큰 조사였다고 할 것이다. 참선하면 달마대사요, 선원하면 달마선원이라고 할 정도로 달마의 위력은 대단했고, 아직도 우리불교에서는 느낌이 크다 하겠다.

 

달마대사와 더불어서 숭산 소림사 또한 매우 큰 무게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30여 년 간, 남방불교가 뜨면서 소림사와 달마대사의 위력적인 기운도 약간 빠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튼 달마대사는 우리 불교에서 차지한 비중이 막강했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순천 조계산 선암사 달마선원 전경.

 

달마대사가 활약했던 시대의 중국에서의 고승은 보디달마(382536), 보지선사(寶誌禪師,418514 또는 지공선사(誌公禪師)라고 함)였으며 승려는 아니었지만 거사로서 부대사(傅大士,497569)를 포함하여 3대사(大士)로 불렀다.

 

달마대사의 친전 구술로 쓴 소실육문집(少室六門集)과 함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있으며, 민간에 전해오는 소림무술과 관련하여 역근경(易筋經)》、《세수경(洗髓經)이 있으며소림72절기 창조자로 알려지고 있다.

▲ 달마대사의 《역근경》 동작 그림.  

 

달마대사는 이처럼 중국 불교에서보다는 한국불교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가 참선법이 강하게 자리 잡다보니 자연스럽게 달마대사 전설과 신비스러운 부분이 아직도 우리 불교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남방불교가 뜨면서 서서히 달마대사의 독점적 위력도 쇠퇴해 가는 분위기다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