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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육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 중 ‘윤회의 주체’

정영부 | 기사입력 2023/08/24 [09:44]

‘영혼육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 중 ‘윤회의 주체’

정영부 | 입력 : 2023/08/24 [09:44]

 

▲ 본지에 연재 중인 「영혼학 그 표준이론」이 ‘지식과감성 출판사’에서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이번 129회에는 다음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11영혼육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윤회의 주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윤회의 주체

 

윤회담론의 주제는 많고 많지만 우선 윤회의 주체와 그 성격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검토한다. 윤회 주체(主體)의 문제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종교인 힌두와 힌두에서 기원한 불교에서 주로 문제된다.1)

 

불교의 윤회 주체

 

다른 윤회사상에서는 자아또는 자아라고 생각되는 마음이 죽어서 없어지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이 윤회의 기본이다. 그러나 불교는 힌두의 창조주인 브라만과 아()인 아트만을 부인한 마당에 윤회론 마저 버리면 종교가 아닌 사상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자 윤회론은 교리로 삼았다. 그러나 아()를 부정하면 누가 또는 무엇이 윤회하는가? 불교는 교조(敎祖)의 무기(無記)와 방편적 교리로 인해 성립 초기부터 심각한 모순에 빠졌다. 윤회론과 무아론은 논리상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어 어느 한쪽이 모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가 교리 간의 모순을 인정할 수는 없는 법이니 당연히 불교는 그에 대한 해명논리로 과거 이천오백 년 동안 비상(非常)한 아이디어를 수없이 짜내 왔다. 도그마의 특성상 새로운 교리는 헌 교리를 위하여 만들어지는 법이다. 교리끼리 충돌하면 또 다른 교리가 그 틈을 메꾼다. 윤회론과 무아론 간의 모순을 방어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틈을 보이면 그 틈을 메꾸려는 다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고 그 논리가 허점을 보이면 또 다른 논리를 낳아 마침내 스스로도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무아와 윤회 간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불교 측에서 제공하는 저 유명한 장작불의 비유를 보자.

 

1) 장작불의 비유

 

부처님은 장작불을 예로 들어 정신과 육체의 연기(緣起) 관계를 통해 무상(無常)을 설하셨다. ()의 요지는 색으로 된 어느 생()의 육체는 장작과 같고 수상행식에 기인한 분별심으로서의 정신은 그 장작이 탐으로써 생겨나는 장작불과 같다. 그런데 장작불은 하나의 장작이라도 매시매초(每時每秒) 연료가 다르니 그에 연한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때마다 다르다. 그러니 장작불이 다른 장작으로 옮겨붙으면 그 장작불이 어찌 이전 장작의 불과 같겠느냐. 따라서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緣起)의 법 아래에 있다.”이다.2)

이 장작불의 비유는 기원전 2세기의 나가세나에 의하여 등잔불의 비유3)와 시()의 비유4)로 변형되었고 이를 기화로 후학들은 장작불의 비유를 장작이 다 타면 불도 꺼지고 분별심도 자의식도 따라서 없어진다.”라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으로 곡해하였다.

부처님의 장작불의 비유는 추측건대 다음과 같은 장작의 비유가 결집 때 아난다(Ananda) 존자의 착각으로 와전된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한다.

 

2) 장작의 비유

 

태초에 기()가 있었다. 기에서 흙과 바람과 물과 불이 나왔다. ()으로부터 생명의 씨앗 한 톨이 나와 거기에 떨어졌다. 새싹이 돋았고 싹은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 큰 나무가 되었다. 어느 날 나무는 베어져서 장작이 되었다. 장작에는 불이 붙었고 불길은 활활 타올라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되자 불은 꺼졌고 장작의 일부는 재로 변했다. 다음 참이 되자 장작에는 다시 불이 붙었다. 장작은 또 밥을 지었다. 그러나 장작은 전에 지었던 밥을 지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전보다 열심히 타올라 더 맛있는 밥을 지었을 뿐이다. 밥이 다 되자 불은 다시 꺼졌다. 그만큼 재도 더 늘었다. 장작은 다시 다음 밥 지을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장작은 수백 번 밥을 지었다. 그러나 장작은 불이 붙으면 여전히 전에 밥을 지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밥 짓는 기술이 늘어갈 뿐이다. 숯이 늘어 불도 잘 붙는다. 재도 많아져 불씨를 간직하기도 한다. 이윽고 장작은 다 타버리고 모두 재로 변하였다. 어느 날 재는 바람에 불려 높고 넓게 퍼져 나갔다. 마치 영이 된 것처럼. 장작은 이제 안다. 그가 지었던 숱한 밥들을. 그리고 그때 그 화염 하나하나도 모두 기억한다. 이제 재는 온 천지 다른 새싹들의 거름이 된다.

 

이 비유가 원래 부처님께서 하신 장작불의 비유다. 또는 하시고 싶었던 비유이거나 하셔야 했을 비유다. 이처럼 명쾌한 사실을 두고 브라만과 아트만을 부인하여 새로운 를 세우려는 부처님의 일순간의 욕심5)은 부처님이 의도하시지 않았을 무아(無我)의 덫을 후생들에게 물려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후생들이 이 덫에 걸려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겪고 있다.

 

표준이론은 부처님의 이러한 주장의 본심(本心)은 일원(一元)의 불성이 개체성(separateness)과 그로 인한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흐려져서 개체성이 탐진치(貪瞋癡) 번뇌의 원인이 되자 그 폐해를 불식(拂拭)시키고자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하시려는 데 있었다고 본다. 즉 표준이론에서 부처님의 무아는 마음은 몸이 죽더라도 흩어지지 않고 연속하여 다시 태어나지만 그 연속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중의 연속으로,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르듯 전생의 마음과 내생의 마음은 같지 않다는 의미의 무상아(無常我)”인 것이다.6)

 

힌두교의 윤회 주체

 

그러면 불교 윤회사상에 기반을 제공한 힌두교의 윤회사상에서 나타나는 윤회의 주체 부분을 살펴보자. 우파니샤드와 힌두 육파철학의 하나인 베단타 철학에 따르면 환생하는 실체는 아트만인데 아트만은 비인격적 자아로서 생시에 개인적 속성(개성)은 없다. 아트만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기반을 구성하지만, 환상의 삶인 이승에서 생산된 모든 데이터는 모두 프라크리티의 것으로 아트만에는 기록될 수도 영향을 줄 수도 없고, 다만 이승에서 이룬 영적 진보와 퇴보만 카르마로(불교라면 제8식인 아뢰야식에) 남는다. 환생할 때 아트만은 전생에서 자신의 행동의 결과인 카르마를 재장착한 미묘한 몸(sukshma sharira)을 입고 무명(avidya)과 업(karma)과 윤회(samsara)의 마야세계인 이승으로 다시 뛰어든다. 이를 멈추기 위해서 아트만은 전생에서 물려받은 업을 경험으로 전화(轉化)하여 이로써 금생을 닦고 또 닦아 무명을 부수고 환상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힌두의 생각이 불교에서 아트만을 아뢰야로 변경시킨 채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렇게 보면 불교에 무아윤회 모순의 단초를 제공한 범인은 힌두의 베단타다.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와 결합으로 물질원리가 전개되어 아함카라가 생기고, 더 나아가 마나스와 붓디로 이어지는 혼의 발생과정까지는 알아냈음에도 그 진화과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혼을 겨우 아트만에게 경험을 제공하고 사라지는 업 정도로 파악하였으니 이는 진화에 대한 지혜가 부재한 때문이긴 하나 인류 영성사(靈性史) 입장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는 매일같이 머리에 하늘을 이고도 지동의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날 때까지 천동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로 버텨온 과학사(科學史)와 같다.

 

신지학과 일부 뉴에이지의 윤회주체

 

힌두의 베단타에 기반을 둔 신지학도 힌두교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견해가 비슷하다. 즉 환생하는 것은 감정적 본성과 정신적인 본성, 축적된 지식과 사고 그리고 개성과 인격 이 모든 것의 주체인 자아나 마음 또는 혼이 아니라 이 위에 있는 무형의 본질(아트만)이 환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무형의 본질이 환생의 과정을 시작할 때, 그것은 오래된 정신적, 감정적, 활기찬 업장을 끌어들여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다.

 

신지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뉴에이지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불교의 장작불이나 등잔불의 비유를 게임의 비유로 개선하여 혼의 불멸성을 부인하는 데 사용한다. 즉 혼(자아)을 영 또는 우주의식이 세상을 체험하기 위한 허구(虛構)적 수단으로 본다. 그들은 자아를 게임 속의 캐릭터로 보고 윤회를 다른 게임의 다른 캐릭터로 옮겨 가는 것에 비유한다. 게임 속의 캐릭터에게 윤회란 없다. 베단타의 아함카라나 나가세나의 등잔불처럼 세상을 비추어 게이머에게 세상의 경치를 보여주는 체험을 안긴 뒤 사라지는 허상이다.7)

 

인도철학의 혼에 대한 무지로 인한 폐해

 

진화(進化)의 이치가 알려지지 않은 고대 힌두사회에 아트만과 간의 역학관계로 이해되는 인간창조론이 등장하고 그 후속작으로 혼에 대한 부실한 인식을 특징으로 하는 영혼론이 인도철학의 주류가 되었다. 한편 브라만 사회를 개혁하려는 부처님의 의지로 인해 가뜩이나 부실한 혼론(魂論)에 아트만까지 부인하는 교리가 불교에 채용되는 통에 오늘날까지 무아론과 환상론이 면면(綿綿)하고 생생(生生)한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이는 또한 훗날 힌두를 벤치마킹한 신지학이 진화를 주장하면서도 영지주의적 모나드를 등장시켜 아트만의 배역을 맡기고 윤회의 주역을 담당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신지학의 혼은 동물의 각혼에서 그 진화를 멈추고 신의 단편인 모나드에게 물질계 체험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이로 인해 신은 체험에 굶주린 불완전한 존재로 끌어내려져 처형되었고 신이 세운 엄연한 진화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부실은 뉴에이지에 이르러 신은 사라지고 우주의식만 남았으며 우주는 혼도 없고 영도 없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세계가 되었다.8)

 

표준이론에서의 체험

 

표준이론에서 체험의 문제는 개별성과 개체성의 문제일 뿐이다. 윤회과정에서의 체험은 개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서 윤회하는 혼은 환생을 거듭하며 그 수준이 고양될수록 점차 개체성(separateness)을 잃는다. 그러나 혼의 개별성(individuality)은 오히려 커진다.9)개별성은 오히려 나날이 커지고 성장한다. 혼의 개별성(개성)은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나 하느님과는 전혀 다른 아들을 얻기 위함이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궁극의 목적이다. 합일 또한 개별성을 완성하여 금의환향하는 것으로서의 합일이지 길 잃은 아이가 부모에게 돌아가는 합일이나 죄를 짓고 귀양살이 하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리면 한양으로 돌아가는 벼슬아치의 귀향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왜 자식을 잃어버리시겠고 왜 이승의 임금처럼 신하를 귀양살이 보내시겠는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는 자신의 일부인 생명에너지를 저 험한 세상으로 내보내시고 밤낮으로 갖은 방법으로 그 성장을 후원하신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신다.

 

반복의 의미

 

윤회 자체가 반복의 의미를 보여준다. 윤회는 지구가 자전(自轉)하듯 돈 데를 또 돈다. 그러나 지구는 자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공전(公轉)도 한다. 그러니 사실은 지구가 같은 자리를 또 도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일 년이 지나 공전을 다 이루었다고 다시 같은 자리에 오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 태양계는 은하계를 중심으로 또 다른 공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하계는 은하군과 은하단 그리고 초은하단으로 더 큰 무리를 지어 서로 무슨 운동인지를 계속하고 있다. 자전은 공전을 위한 운동이요 공전은 더 큰 공전으로 이어진다. 윤회는 반복이지만 이러한 반복이다. 다른 삶의 반복이며 다른 시대의 반복이다. 동시에 영혼은 그러한 반복을 창조하는 주인공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반복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반복이다. 자전의 오늘을 보내고 긴 잠을 잔 뒤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오면 아이는 어제와 다름없는 얼굴로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일 년이 지나서 다시 봄이 찾아오면 아이는 키가 부쩍 자라있지 않은가. 저녁의 늙은이는 다음 날 아침 아이로 다시 태어나 또 세수하고 이빨 닦고 학교에 가지만 일 년 후에는 키도 자라고 한 학년 진급하는 것이다. 환생의 자전이 모여 생혼지구가 각혼지구가 되고 각혼지구가 지혼지구가 되며 마침내 영의 지구가 된다. 그리고 태양계가 은하를 돌 듯 이제 영의 삶이 시작된다.

 

▲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경계를 나타낸 육도윤회도.

 

<註釋>

1) 표준이론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수차 거론하였다. 그런데도 이처럼 또다시 문제 삼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윤회사상이 윤회의 종교라고 불리는 불교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믿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서부터이고 불교신자들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신자 아닌 사람들도 윤회를 믿지 않거나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1. 중아함경(中阿含經, Madhyamāgama)에 실려 있는 다제경(嗏帝經)에서 부처님께서 하신 비유다.

2.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 지어진다. 불이 장작으로 인하면 장작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나무 조각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그때는 섶불이라고 불린다.”

3. 불가에서는 보통 이 설법을 연료가 없다면 불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육체가 소진되면 우리의 정신도 사라진다.”라는 무아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연료에 따라 불도 다르다. 지금 불타는 연료는 좀 전에 불타던 연료가 아니니 불은 시시각각 다르고 매생마다 다르다. () 또한 이와 같아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緣起)의 법 아래 있다.”라는 뜻이 참이다. 장작불의 비유는 無常한 아 즉 無常我에 대한 비유일 뿐 無我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비유이며 상관이 있더라도 부처님은 육체가 꺼지면 두뇌의 전기작용인 자아도 끝장난다는 현대판 유물론적 뇌의학을 혜안으로 선각(先覺)하여 주장한 것이 아니니 장작불의 비유를 무상아가 아닌 무아 또는 유물(唯物)로 몰아감은 교조(敎祖)를 죽이는 자해행위다.

4. 오늘날 수많은 승려들이 先覺을 자처하고 이러한 자해행위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은 禪房에 앉아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진정 유물론과 무신론의 최첨단에 선 뇌의학자들의 에 동감하는가?(미주 161 ‘생각에 대한 생각들 중 記憶還生부분 참조)

5. 부처님이 숙명통으로 친히 돌아본 547번의 전생은 다 무엇인가. 연등부처님이 선혜동자에게 내린 수기(受記)는 또 무엇인가? 섶불인 선혜동자에게 이번에 한 번 더 장작불로 태어났다 꺼지면 불 신세를 영영 면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단 말인가? 이는 부처님을 팔아 狐假虎威하려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승려들의 대를 이은 허튼 말재간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과학교인들과 같은 부류들이다. 그들이 진실로 고승이었다면 숙명통을 얻어 전생을 보았겠고 그렇다면 그런 언설을 퍼뜨리지 못하였으리라.

6. 무아에 대한 이러한 자가당착의 해석들은 내부를 분열시키고 믿음을 깨뜨렸으며 윤회를 부인하는 외도(外道)들에게 거봐라하는 구실을 주었다.

 

3) 등잔불의 비유

 

1. 그리스왕 밀린다와 학승 나가세나 사이의 대화를 적은 밀린다팡하에서 나가세나는 윤회에 대하여 밀린다 왕에게 ‘A라는 등잔의 불을 B라는 등잔에 옮겨 붙일 때 A의 불과 B의 불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B의 불이 A로부터 옮겨 온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B의 불은 B의 연료를 연소시키면서 타는 것이기 때문에 A의 불과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육체와 정신 등 인간의 모든 구성요소는 용해되어 불꽃으로 변하며 그 불꽃은 다른 육체를 태우는 불꽃으로 이어질 뿐이다. 정신()도 육체와 하나 다를 바 없이 타서 없어지고 만다는 비유이다. 말로 하나 비유로 하나 알고 보면 그 말이 그 말이지만 비유로 하니 무슨 심오(深奧)라도 숨은 듯하다. 그러나 나가세나의 등잔불의 비유는 비유의 해석과 아울러 비유대상 자체마저 부적절한 下級비유다.

 

2. 먼저 부처님의 장작불에 대한 제자들의 해석에 잘못이 있다. 장작불의 비유의 본뜻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연료가 없다면 불도 존재할 수 없으니 육체가 소진되면 우리의 (정신)도 사라진다.”라는 것이 아니라 또한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緣起)의 법 아래에 있는 무상(無常)한 존재다.”라는 뜻이다.

 

3. 나아가 정신을 등잔불의 불꽃으로 보는 비유 자체도 부적절하다. 부처님은 연료(五蘊)이 장작불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장작불을 비유에 끌어들였지만 정작 나가세나와 후학들은 비유의 핵심을 장작에서 불꽃으로 옮겼다. 그리고 불꽃은 정신(, )이니 정신은 기름이 다하면 꺼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호도하였던 것이다. 불꽃이 왜 정신인가? 등잔불을 비유에 써먹으려면 육체는 기름이고 불꽃은 생기체라고 하여야 한다. 불설로는 수상행식의 명()이다. 정신인 제6식과 제7식 그리고 8식은 불꽃이 아니라 등잔불의 이다. 기름은 불꽃으로 타면서 세상을 비추는 빛인 정신을 만들어 온 우주에 그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등잔불이 꺼져 빛이 사라진다고 정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름이 다 타면 정신은 암흑(저승)에서 더 크고 밝은 다른 등잔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준비한다. 애초에 불기운(불끼)에 불과했던 하느님의 영화(靈火)는 불끼에서 불티로, 불티에서 불씨로, 불씨에서 불꽃으로 그리고 횃불로 봉화로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면서 빛은 점점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우주정신의 찬란한 빛 안으로 귀일한다. 태초에 빛이 있었지 장작이나 등잔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4. 또한 비유 자체도 모순이 있다. 불이 연료를 바꾸면 더 이상 그 불이 아니라면 사람이 집을 이사하면 사람도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닌가? 또 장작이 재가 되면 다른 나무의 거름이 되어 아름다웠던 장작불의 추억을 재생한다. 어찌 불꽃만 바라보는가. 우습지만 등잔불을 여러 등잔에 옮겨 붙이면 도플갱어(doppelgänger)이고 분할환생이라는 비유는 어떤가? 또한 오늘날의 자연과학으로 볼 때 불은 등잔의 기름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등잔 기름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불교가 좋아하는 자연과학에 의하면 불이란 존재(存在)가 아니라 물질이 주변의 산소와 화합하여 빛과 열에너지를 내며 다른 물질로 변화하는 현상(現像)이다. 고대에 이런 이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등잔에 불을 붙이는 행위는 물질과 산소를 화합시키는 촉매나 마중물 같은 트리거링 행위에 불과하다는 이치를 영 몰랐을 리는 없으니 장작이나 등잔은 윤회의 이치를 설명하기에 부적절하다. ()에는 그랬다고 강변할지라도 최소한 금()에 와서는 더 이상 거론할 비유가 아니다.

 

4) ()의 비유

 

1. 등잔불의 비유에 이어 나가세나는 시()의 비유를 들어 윤회의 이치를 부연 설명하고 있는데 어렸을 때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할 경우, 시가 스승으로부터 옮겨 온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전생을 기억한다고 그 기억이 전생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등잔불의 비유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등잔불의 비유는 윤회의 주체는 고정된 아가 아님은 물론 그나마 전생의 도 금생의 도 불꽃처럼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비유이고 시의 비유는 윤회하는 것은 가 아니라 무형의 가치인 이고 라 하더라도 이는 와 같은 이니 자아는 그 업인 로 기억될 뿐 를 지어낸 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보이는 비유다. 또 한편 나가세나의 시의 비유는 기억이 곧 존재라는 현대 신경의학적인 견해마저 품고 있다.

2. 그러나 이 비유 역시 시를 지은이의 의식은 저리 제치고 시가 옮겨 가는 것에 초점을 둠으로써 본질을 의도적으로 흐리는 비유이다. 사실은 이렇다. ‘시를 지은 스승은 환생하여 제자의 제자가 되어 자신이 지은 시를 다시 배우고 더 훌륭한 시를 쓰게 된다.’

 

5) 부처님의 무아론은 당시 브라만교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부조리를 혁파하려는 개혁의 의지뿐 아니라 자아의 윤회론으로 인하여 사후의 생을 위해 현생을 낭비하는 중생들을 계도하기 위하여 금생의 자아가 그대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방편적 설법으로 개발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 환생론이 배척된 명분이기도 하다.

 

6) 1. 현생의 나와 환생한 내생의 나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원불교대사전, 윤회 참조).

2.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해 주는 환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의식도 그 직전 상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과 물질은 상호작용 하지만 그중의 어떤 하나가 서로 다른 어떤 하나의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즉 직전의식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식이라는 결과가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의식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성질을 지닌다. 의식은 의식 자체의 연속적인 성질에 의해 발생하며 육체만으로는 의식이 발생할 수 없다. 육체는 의식이 발생하고 작용하기 위해 필요한 간접적인 조건일 뿐 직접적인 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 생의 의식이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환생 과정을 거쳐야 한다(달라이 라마).

3. 표준이론에서 혼은 그 물성(오온)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혼은 진화하는 존재로서 어제의 혼과 오늘의 혼이 달라져야 한다. 몸은 그곳에 있고 자아는 그때에 있다. 무아(無我)는 무상아(無常我).

 

7) youtube.com/watch?v=PenFHb-2Fqc, youtube.com/watch?v=jVRb-ZNz1SU 참조

 

8) 미주 205 ‘신지학의 영혼론참조

 

9) 미주 97 ‘개체성(separateness)과 개별성(individualit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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