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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문명과 불교문화 융합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10/16 [09:40]
그리스 예술 전파, 보살상과 불상 조각

간다라 문명과 불교문화 융합

그리스 예술 전파, 보살상과 불상 조각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10/16 [09:40]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42)

 

간다라 문명은 기원전 1천 년 중반부터 기원후 2천 년 초까지 현재의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했다. 그 기간동안 여러 주요 세력이 이 지역을 통치했지만, 그들은 모두 불교와 알렉산더의 인도 침공 이후, 이 지역에서 발전한 인도 그리스 예술 전통의 채택은 불교문화 예술 발전에 전기가 됐다. 

 

▲ 간다라의 보살상 조각.  © CRS NEWS

 

간다라는 아케메네스 왕 사이러스 대왕(기원전 550530)의 치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역사적 자료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렇지만, 간다라는 중국 출신 인도 구법승 현장 삼장의 인도 순례 때까지 지리적으로 자세히 기술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 삼장(602664)7세기의 인물이다. 그는 간다라 문명의 말기에 이 지역을 방문했다. 즉 문명이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쇠퇴하던 시기에 이 지역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장 삼장은 이 지역과 다양한 도시 및 유적지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는데, 이는 현대까지 살아남은 최초의 기록이며 실제로 현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이 간다라에서 출토된 것임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간다라의 지도.  © CRS NEWS

 

간다라(Gandhara)는 주로 인더스강 서쪽에 위치하고 북쪽은 힌두쿠시 산맥으로 둘러싸인 동서로 100km, 남북으로 70km에 달하는 삼각형의 땅이었다고 추측된다. 간다라 고유의 범위에는 실제로 페샤와르 계곡, 스와트(Swat), 디르(Dir), 부네르(Buner), 바자우르(Bajaur) 언덕이 포함되었으며, 모두 파키스탄 북부 경계 내에 있다.

 

그렇지만 대() 간다라(또는 간다라의 문화적, 정치적 헤게모니가 지배했던 지역)의 경계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계곡과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포트와르 고원까지 확장되었다. 실제로 특정 기간 동안 그 영향력은 훨씬 더 오래된 모헨조다로 유적 위에 세워진 스투파와 불교 도시의 유적이 여전히 눈에 보이는 신드까지 퍼졌다. 간다라의 잘 알려진 도시로는 탁샤실라(탁실라), 푸루샤푸라(페샤와르), 푸쉬칼라바티(마르단)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유적이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 담마라지카 스투파.  © CRS NEWS

 

간다라의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이론은 그 이름을 향기를 의미하는 Qand(Gand) 단어와 ''을 의미하는 Har와 관련된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간다라는 '향기의 땅'이다.

 

지리적으로 뒷받침되는 또 다른 이론은 Qand(Gand)라는 단어가 '우물' 또는 '물 웅덩이'를 의미하는 Kun에서 진화했다. 실제로 Gand라는 단어는 물과 관련된 다른 많은 지명과 함께 나타난다. ab(물 웅덩이) Gand-Dheri(물 언덕). Tashkand(돌담으로 둘러싸인 웅덩이)Yarkand도 연관된 이름이므로 이 땅이 '호수의 땅'으로 알려졌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는 오늘날에도 페샤와르 계곡이 특히 장마철에 배수가 잘 되어 오늘날 농작물과 들판으로 뒤덮인 습지에 호수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덕분에 더욱 뒷받침되는 추론이다. 

 

▲ 불교사원 유적.  © CRS NEWS

 

간다라의 정치사를 보면 여러 주요 고대 세력의 통치를 거쳤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600~400년경),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 (326-324 BCE), 북인도의 마우리아 제국(BC 324-185), 박트리아의 인도-그리스인 (250-190 BCE), 동유럽의 스키타이인(기원전 2세기경~기원전 1세기),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1세기경~기원후 1세기), 중앙아시아의 쿠샨(서기 1세기~5세기경), 중앙아시아의 백훈족 (기원후 5세기경), 인도 북부의 힌두 샤히(서기 9세기~10세기경)에 이어 이슬람 정복이 이어졌고, 이때 우리는 인도 역사의 중세 시대에 이르렀다.

 

간다라는 잠시 아케메네스 제국의 일부였지만, 아케메네스 점령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대신 아케메네스 왕조의 속국으로 알려졌고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환대를 베풀었고 알렉산더 대왕은 결국 이곳을 정복했다. 간다라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헤게모니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327년까지 지속되었다.

 

알렉산더는 간다라를 건너 펀자브로 들어갔다고 하며, 탁실라의 통치자인 라자 옴비로부터 그의 적, 라자 포루스에 맞서 동맹을 제안받았다. 이것은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정점에 달했는데, 이 전투는 인도에서 알렉산더가 거둔 승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이곳에 머문 기간이 짧았으며 결국 인더스 강을 거쳐 남쪽으로 모험을 떠나 서쪽으로 건너 게드로시아(발루치스탄)를 거쳐 페르시아로 들어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인 칼라시 부족의 축제.  © CRS NEWS

 

알렉산더는 그가 정복한 모든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그리스 인구를 남겼고, 간다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인, 군인 및 기타 추종자들은 현지인과 결혼하고 혼합하여 그리스 문명에 완전히 통합하도록 권장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6월에 죽자, 그의 점령 그리스군은 필사적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을 남겨두고 점차 그리스인보다 인도인이 되어갔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베트남 호치민 시 베트남 불교대학을 방문했다. 이 불교대학은 5천여 명의 남녀 승려들이 공부하고 있는 베트남 제일의 불교대학이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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