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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와 마우리아 왕조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10/23 [08:36]
인도, 그리스, 스키타이, 쿠샨, 파르티아 문화 교섭, 대승불교 형성에 기여

간다라와 마우리아 왕조

인도, 그리스, 스키타이, 쿠샨, 파르티아 문화 교섭, 대승불교 형성에 기여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10/23 [08:36]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43)

 

간다라는 한때 마우리아 왕조의 패권 아래 놓이기도 했다. 기원전 316년에 마가다의 찬드라굽타 왕(기원전 321297)은 인더스 계곡으로 진주하여 정복하고 간다라를 합병하였으며 탁실라를 새로 형성된 마우리아 제국의 지방 수도로 지정했다. 찬드라굽타에 이어 빈두사라가 계승했고, 그의 아들 아소카가 주지사가 되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 간다라의 불교사원 터.  © CRS NEWS

 

아소카는 여러 수도원을 건설하고 자신의 칙령을 아 대륙 전역에 전파함으로써 불교의 확산을 전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 하나는 탁실라에 있는 탐라 강 동쪽의 웅장한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 수도원이다. 이 사원은 사리탑으로 유명하며, 아소카가 그곳에 여러 개의 부처님 유물을 묻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스키타이인들이 펀자브를 점진적으로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10년경이었다. 이 부족은 박트리아와 같은 북부 영토를 침략하는 데 익숙했지만, 과거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들은 현재 이란의 시스탄인 드랑기아나에 정착했고 펀자브를 침공하여 인더스 계곡 남부를 통해 침투하여 결국 탁실라를 점령했다.

 

▲ 스키타이와 파르티아.  © CRS NEWS

 

기원후에는 스키타이에 이어 파르티아인들이 이주하여 간다라와 펀자브의 그리스 왕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탁실라에 살았던 파르티아 지도자인 곤도파레스는 사도 도마(Thomas)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이 도시가 이미 수많은 종교적 신앙을 품고 있었고 거의 2000년 전에 이제 막 시작된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완전히 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라는 추론이다.

 

쿠샨족은 1세기경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간다라로 이주한 부족이다. 부족은 페샤와르를 권력의 중심지로 선택하고 나중에 동쪽으로 인도의 중심부까지 확장하여 쿠샨 제국을 세웠으며, 이 제국은 서기 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서기 80년에 쿠샨은 스키토-파르티아로부터 간다라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탁실라의 주요 도시는 다시 다른 유적지에 재건되었으며 새로운 이름인 시르수흐(Sirsukh)가 주어졌다. 그것은 길이 5km, 두께 6m의 벽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 기지와 비슷했다. 이제 이곳은 불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맞이했다. 쿠샨 시대는 간다라 예술, 건축, 문화의 정점이며 이 지역 역사에서 황금시대로 간주된다. 

 

▲ 카니슈카 대왕 시의 쿠샨제국.  © CRS NEWS

 

▲ 쿠샨족의 귀족과 승려가 행하는 불위에서 의식.  © CRS NEWS

 

그리스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도 탁실라 도시를 방문하여 그 크기를 아시리아의 니네베와 비교했다. 쿠샨 통치 말미에는 간다라 지역을 장악한 일련의 단명 왕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지속적으로 약탈, 침략을 당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혼란에 빠졌다. 사산 왕조, 키다리테스(작은 쿠샨), 그리고 마침내 쿠샨 통치가 쇠퇴한 후, 백훈족의 빠른 통치 연속으로 인해 일상적인 종교, 무역, 사회 활동이 중단되었다. 서기 241년경, 이 지역의 통치자들은 샤푸르 1세의 왕권 아래 있던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에 의해 패배했고 간다라는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북서쪽의 압력으로 인해 사산 왕조는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할 수 없었고, 키다리테스(작은 쿠샨)로 알려지게 된 쿠샨 왕조의 후손들에게 넘어갔다.

 

▲ 조로아스터교의 잔디알 사원.  © CRS NEWS

 

키다리테스는 백훈족, 즉 에프탈라이트가 이 지역을 침공한 5세기 중반까지 쿠샨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가며 이 지역을 유지했다. 이때쯤 불교와 간다라 문화가 이미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은 물리적 파괴를 가져왔고, 훈족이 힌두교의 시바신앙을 채택함으로써 불교의 중요성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백훈족의 침략 동안 이 지역의 종교적 성격은 점차 힌두교 쪽으로 바뀌었고 불교는 사산 왕조에 대항하여 힌두 굽타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백훈족에 의해 정치적으로 편리하다고 간주되어 불교를 기피했다. 수 세기 동안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였던 종교적 성격의 변화는 간다라 지역의 성격을 더욱 쇠퇴하게 만들었다.

 

▲ 백훈족의 군대.  © CRS NEWS

 

사산 왕조에 대항하여 굽타 제국과 백훈족의 동맹은 또한 불교 문화가 결국에는 북부 통로를 통해 중국과 그 너머로 전파될 정도로 불교 문화를 정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후 힌두교가 이 지역을 장악했고 불교도들은 이곳에서 멀어졌다. 남은 몇 세기 동안 서쪽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침략, 특히 무슬림의 정복을 목격했으며, 그로 인해 기존 문화의 소수 잔재는 결국 모호해졌다. 따라서 중요한 오래된 도시와 예배 장소는 1800년대 중반 영국 식민지 탐험가에 의해 재발견될 때까지 향후 1500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졌다.

 

▲ 백훈족의 지배계급.  © CRS NEWS

 

간다라에는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한 통치자가 있었지만,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러한 통치 변화 동안 문화적 전통의 통일성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토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 퍼져 있었지만 마투라와 간다라와 같은 지역의 문화적 경계는 잘 정의되어 있으며 수많은 고고학 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아시아불교평화회의가 개최된 베트남 불교대학을 방문, 1천여 명의 남녀 승려 학생들과 기념촬영.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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