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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왕과 인도 승려와의 대화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11/06 [08:43]
간다라 불교의 상징, 파키스탄의 유산

그리스 왕과 인도 승려와의 대화

간다라 불교의 상징, 파키스탄의 유산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11/06 [08:43]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45)

 

간다라 불교를 우리는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찾을 수 있다. 파키스탄의 불교는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 아소카 치하에서 뿌리를 내렸다. 만세라와 샤바즈 가르히의 바위에 새겨진 아소카의 주요 암석 칙령은 황제의 다르마 또는 정의로운 법의 측면을 기록하는 카로스티 문자로 기록되었다.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남아시아에서 해독된 글의 가장 초기 증거 중 일부를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사항은 인도-그리스 왕 메난더(Menander)의 불교로의 개종이다. 그는 오늘날 시알코트(Sialkot)인 사갈라(Sagala)에서 수도사(비구) 나가세나(Nāgasena)와 대화한 후,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밀린다 팡하(Milinda Panha)에 입증된 대로 밀린다 왕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추정하게 된다.

 

▲ 간다르의 서 있는 부처님(기원후 1∼2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 분지)  © CRS NEWS

 

일부 학자들은 오늘날 불교의 종파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대승불교가 간다라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 지역에서 촉진되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지역에서 그리스-불교 예술과 조각이 번성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대승불교사상 형성에 헬레니즘이 다소 영향을 미쳤음도 부인할 수가 없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 간다라 문자로 알려진 카로스티 문자.  © CRS NEWS

 

간다라에서 불교는 6세기까지 번성했으나 알촌 훈족의 침입 이후 종교가 쇠퇴하기 시작했고, 14세기 말까지 인도 아 대륙의 무슬림 정복 이후 불교는 거의 사라졌다.

 

▲ 알촌 훈족의 킹길라 왕의 초상화(440∼490).  © CRS NEWS

 

2012년에 파키스탄 국립 데이터베이스 및 등록 기관은 현재 파키스탄의 불교 인구가 소수이며 국가 신분증을 소지한 성인 가운데 1,492명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전체 불교도 인구는 수천 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2017년 기준 불교도라고 내 세우는 수는 1,884명으로 발표되었으며, 대부분 신드주와 펀자브주에 집중되어 있다. 한때는 주민의 90%가 불교를 신봉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극소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종교도 생물과 같다고나 해야 할 것 같다. 

 

▲ 이슬마바드의 고속도로.  © CRS NEWS

 

▲ 대만 카오슝 소재 불광산사.  © CRS NEWS

 

파키스탄에서 유일하게 기능하는 불교 사원은 스리랑카와 같은 국가의 불교 외교관들이 사용하는 이슬라마바드의 외교 영토에 있다. 최근에 대만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불광회(불광산)가 파키스탄 정부의 초청을 받아 행사를 조직하고, 법회를 열어 현지 토착 불교 인구를 신앙에 다시 연결했다.

 

간다라에서 불교는 상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상업 연결과 무역로를 통해 마우리아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이런 식으로 불교도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아소카의 불교 수용과 불교 전도사 후원은 스리랑카, 인도 북서부 및 중앙아시아로 불교신앙이 확장되도록 허용했다. 북서쪽 국경에 대한 마우리아의 통제는 아소카가 만세라와 샤바즈 가르히에 남긴 암석 칙령(Rock Edicts)에서 입증된다.

 

기원전 2세기에 데메트리우스 1세가 인도 아 대륙을 침공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다. 가장 유명한 인도-그리스 왕 중 한 명인 메난더(Menander)는 현재 시알코트(Sialkot)인 사갈라(Sagala)에서 승려 나가세나(Nāgasena)와 대화한 후 불교로 개종했다. 직접적인 문화 교류는 메난더(Menander)와 그리스 불교 승려 마하다르마락시타(Mahadharmaraksita)의 학생이었던 불교 승려 나가세나(Nāgasena) 사이의 토론을 자세히 설명하는 밀린다(Milinda) 왕의 토론(Milinda Pañha)이라는 대화로 설명된다. 메난더(Menander)가 사망하자, 그의 통치하에 있는 도시들은 그의 유해를 공유하는 영예를 얻었고, 그들은 역사적인 부처와 나란히 사리탑에 안치되었다. 메난더(Menander)의 인도-그리스 후계자 중 몇몇은 카로스티(Kharoṣṭhī) 문자로 "법의 추종자"를 동전에 새겼다.

 

▲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 CRS NEWS

 

▲ 인도-그리스 왕국의 주화.  © CRS NEWS

 

인도-그리스 왕들은 2세기 동안 통치하면서 동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와 인도의 언어와 상징을 결합했고, 고고학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와 인도의 사상을 혼합했다. 인도-그리스 문화의 확산은 특히 그리스-불교 예술의 영향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 인도-그리스왕국 지도.  © CRS NEWS

 

기원전 1세기에 월지 유목민이 침입하여 쿠샨 제국을 건국한 후, 쿠샨인들은 인도-그리스인의 헬레니즘 문화 요소를 받아들였다. 쿠샨 통치 기간동안 간다라 불교는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고 상당수의 불교 센터가 건설되거나 개조되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베트남 불교대학에서 열린 아시아불교평화회의 이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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