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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 작가-기행 산문 ∣ "무아의 천기, 천상의 그릇"

박현선 | 기사입력 2024/01/17 [05:26]

박현선 작가-기행 산문 ∣ "무아의 천기, 천상의 그릇"

박현선 | 입력 : 2024/01/17 [05:26]

▲ 아리타 '도산신사' 도자기 작품     ©CRS NEWS

 

하늘에 닿을 듯, 까마득하게 높은 아리타에 있는 이즈미산이다. 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 탓인가 어딜 둘러보아도 도무지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뜬금없이 나타난 낯선 이의 출현에 그릇 빚기에 여념이 없던 이삼평 도공은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난다. 산신령처럼 신묘한 위엄을 갖춘 얼굴에 무명 두루마기 옷을 입고 계신다. 구경해도 괜찮겠냐고 조심스럽게 여쭤보니 눈길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즈미산 봉우리가 여러 개 없어질 정도로 많은 흙을 퍼다 그릇을 만들고 있어요!”라며 산봉우리가 깊게 패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도자기의 대활황이 벌어진 것은 일본의 정유재란 침략 때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부임하던 때부터이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본국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도자기의 아름다운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 조선에 있는 왕릉을 비롯하여 개성 근처의 수많은 고분을 파헤쳤으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속공예품이나 목공예품, 섬유나 직물, 도자기를 닥치는 대로 실어갔다. 특히 조선 기술자들을 납치해 갔는데 그중 가장 공을 들여 데려간 것이 도공 기술자들이다.

 

▲ 아리타 '도산신사' 도자기 작품   © CRS NEWS

 

사가현 서쪽의 작은 마을인 아리타 일대는 400여 년 전, 159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 때 진주성을 공격했던 일본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다스리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참여했다가 퇴각하면서 100여 명의 조선 도공을 납치해 끌고 갔는데 이 중에 충청도 금강이 고향인 이삼평 도공도 있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이삼평에게 사가현 북서부 근처에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고 도자기 만드는 일을 뒤로하고 수년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 헤맸다. 드디어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산에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흙인 고령토가 대량으로 묻힌 광산을 발견하였다.

 

이삼평 도공은 한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가마 앞에 앉아 있다. 이삼평 도공의 뿌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속세와 멀리 떨어져 딴 세상에 격리된 것 같이 아무 말 없이 홀로 백토로 자기 그릇을 빚고 있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물레 위의 흙에 취한 듯 그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저 알 수 없는 자신만의 무아에 깊숙이 빠져 물레와 함께 그러듯 돌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길 얼마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도공의 섬세한 손길로 백토 덩어리에서 하나의 그릇이 완성된다.

그릇을 만들 때는 흙과 불의 싸움이라 혼신의 정성을 다해야 해요!”

 

▲ 아리타 '도산신사' 도자기 작품   © CRS NEWS

 

살지고 끈기 있는 고령토가 이즈미산에 매장되어 있어 거의 산 하나를 통째로 백자 그릇을 빚어낼 수 있었다. 이즈미산에서 채석한 백토를 곱게 체에 걸러 흙 반죽이 된 찰흙을 물레 위에 얹는다. 흙에 혼을 불어넣어 물레질을 시작한다. 흙일지라도 혼을 불어넣을 때만이 온전한 그릇으로 태어난다. 물레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반죽이 된 흙덩이는 이삼평 도공의 손길이 닿으면서 점차 목화송이처럼 따스하고 백옥같이 맑은 살결의 그릇 형태를 이루어 간다.

도자기의 형태가 물레 위에서 만들어지게 되면 다시 그늘로 옮겨져 천천히 습기가 제거되도록 충분히 말린다. 습기가 제거되면 불필요한 흙이나 찌꺼기를 떼어내는 곱 깎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삼평 도공의 어렸을 때 기억을 말해준다.

 

조선에 계신 아버지는 캄캄한 새벽 첫닭이 울면 매일같이 묵묵히 집을 나서 산 밑 작업장으로 향하셨지요. 평생 백자 그릇을 빚으셨고 저는 그 과정을 보면서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익혔어요

 

곱 깎기를 마친 도자기는 가마로 초벌구이로 들어가고 초벌구이가 끝난 그릇에다 유약을 바른다.

우리 집은 조상 대대로 전통 가마로 도자기를 구워냈어요. 특히 가마에 불을 붙일 때는 산에서 나오는 소나무 장작만을 사용했지요. 소나무 장작을 써야 불꽃이 튀지 않고 그릇에 흠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마에 불을 지피는 가마 지피기는 긴긴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도공은 가마를 떠나지 못한다. 도공은 흙에 혼을 다하고 이제 겸허하게 불과 만나는 시간이다. 지금까지는 순전히 솜씨로 빚었다면 이제는 하늘에게 보내는 기도로 도자기를 빚어가는 시간이다. 가마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면 정성이 하늘에 닿아야 내려진다는 천상의 그릇들이 후끈거리는 열기 속에서 하나씩 그 형체를 드러낸다. 부드럽기도 하고 가냘프고 슬프기도 한 곡선의 조화, 그 위에 적당히 소박한 무늬가 스며들어 있는 백자 그릇이 빚어졌다.

 

도자기의 신이삼평 도공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때 그 시절의 만남을 각색해 보았다. 나는 생각해 본다. 도공들은 꿈을 빚는 즐거움에 살고 있다고, 그 즐거움이 바로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이라고.

혼을 담아 손끝으로 빚어낸 그릇들은 무아의 천기, 천상의 그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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