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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 작가-기행 산문Ⅲ '나가사키의 검은 눈물'

박현선 | 기사입력 2024/01/28 [09:04]

박현선 작가-기행 산문Ⅲ '나가사키의 검은 눈물'

박현선 | 입력 : 2024/01/28 [09:04]

▲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세워진 조각상  © CRS NEWS


아무리 슬프고 힘든 일을 경험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의 강도가 처음보다 약해지기 마련이다
. 그래서 세월이 약이란 말도 있다. 그런데 만약 고통스러운 기억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 있고 매일 그 아픈 기억을 처음처럼 생생하게 느끼고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한평생 살아오면서 어떤 일은 아파서 지워버리고 싶고 또 어떤 일은 부끄러워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 왼편에 서 있는 나오키 토미나가의 조형물은 어머니가 팔, 다리가 축 늘어진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밑에 ‘1945. 8. 9 11:02’ 라고 씌어진 또렷한 숫자는 그날의 원자폭탄 참상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머니요, 그 품에 안겨서 세상을 바라보며 자라게 된다. 슬픈 일이 있을 때도 나보다 더 슬퍼해 줄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 간의 극진한 정이 천륜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적군을 죽이고 싸워야 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군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군인은 정신과 치료를 받은 군인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도 신기해서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는 어머니라는 절대의 신이 있었기에 싸우다 전쟁터에서 숨을 거둘 때에도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위안 받았다고 한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서 있는 아기를 잃은 어머니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지상에서 살아 숨 쉬는 어머니로서 자식을 잃은 그 심정은 실로 처연하고 애잔할 것이다.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살 저미던 처절한 시간대, 자식에 대한 모성은 눈물로 얼룩진 피 토하는 심정이 되었다.

원자폭탄 찌꺼기는 하늘에서 검은 비가 되어 쏟아졌고 세상은 한순간에 유황불 지옥이 되었다. 품속에서 죽어가는 아기에게 아가야! 좌절하지 말고 어서 깨어나거라어머니는 애끓는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 나가사키 평화공원 북쪽 언덕위에 세워진 평화기념상  © CRS NEWS

 

공원 북쪽 끝에는 길이 약 10 m 높이의 평화기념상이 설치되어 있다. 나가사키 출신의 조각가 키타무라 세이보의 작품이다.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쪽 손은 핵무기의 위험을 알리고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온한 평화를 바라는 모습이다. 온화한 얼굴은 신의 은총을 지그시 감은 눈은 희생자 명복을 비는 모습이다. 접힌 오른쪽 다리는 명상 즉 고요함을 세운 왼쪽 다리는 구원 미래를 의미한다. 동상 앞에 설치된 검은 대리석에는 원자폭탄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원 내 안내판에는 ’194589일 오전 112, 이곳으로부터 500 m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공습 당시의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 사망자는 73,884 명 부상자는 74,909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명에는 따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중 2만여 명이 일본으로 징용되어 강제노동을 당했던 한국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는 공원에서 약 120 m 떨어진 곳에 숨기듯 작게 마련되어 있다.

 

▲ 폭심지 부근에서 발견된 녹아내린 기와. 바위처럼 굳어버린 황토  © CRS NEWS

 

경상남도 합천에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원폭자 중 원인 모를 장애가 있는 자녀도 상당히 있다고 한다. 원폭자인 아버지는 일본에 강제 징용을 당해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부근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앞을 못 볼 정도로 빛이 번쩍하면서 펑 하는 온 세상 뒤집히는 소리가 났고 온천지가 캄캄해졌다고 한다. 폭발로 인한 섭씨 4천 도의 열기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고 건물의 흔적도 사라지며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30 분이 지난 후엔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목마름이 극에 달해있던 때라 사람들은 먹어 선 안 될 검은 비를 받아먹었다. 이후 살아난 사람들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머리카락이 빠지고 코와 입에서 피가 났고 심한 사람은 백혈병이나 암에 시달려야 했다. 원폭자인 아버지는 그 후 시력을 잃었고 피부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원자폭탄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두 아들에게 남겨진 짐은 가혹했다. 형은 성인이 되면서부터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동생은 한쪽 폐를 절단해야 하는 수술을 받았다.

 

당시 조선인 피폭자가 많았던 것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 부상자 구호나 사체처리 등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작업하는 것은 방사선에 노출되므로 피폭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이 긴급 진료소에 치료를 받으러 가면 조선인에게 줄 약은 없소문전박대로 차단해 사망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치료해주지 않아 길거리에 방치되었다가 죽으면 까마귀 떼가 날아들어 시신을 쪼아 먹었다. ‘시체까지 차별당한 조선인’, 너무나 처참한 생지옥 모습이다.

 

▲ 고열로 변형된 벼루. 용해물이 부착된 칠보 꽃병, 술병등  © CRS NEWS

 

우리는 왜 일본의 탐욕과 비인간성으로 얼룩진 기나긴 식민지 시대를 거쳐 숨도 돌이킬 수 없이 인간의 허망한 야망으로 인한 전쟁을 겪어야 하는가. 일본은 1910년 다년간 노리던 조선을 침략했으며 우리에게 천고에 씻지 못할 망국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참으로 무기력하게 그들을 지켜봐야 했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야 했다.

 

그때 그 장소에서 만행을 저지르던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금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데도 오늘날 현실을 볼 때 자기반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슬픈 역사는 또다시 반복 된다그들은 인류의 물질적 풍요는 얻었겠지만 정작 그보다 더 귀한 인간의 마음, 인간의 얼굴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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