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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순례 관광지로 재탄생한 제천 배론성지...유래와 4대 보물

문윤홍 대기자 | 기사입력 2022/12/28 [09:06]
원주시·횡성군 잇는 247㎞ 순례길도 각광...15개 구간 3개길 구성

천주교 성지순례 관광지로 재탄생한 제천 배론성지...유래와 4대 보물

원주시·횡성군 잇는 247㎞ 순례길도 각광...15개 구간 3개길 구성

문윤홍 대기자 | 입력 : 2022/12/28 [09:06]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신도들이 생활했던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는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 자연유산 등을 잇는 총 247의 순례길로 천주교 성지순례 관광지로 재탄생했다.

 

이 순례길은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와 강원 횡성의 풍수원 성당을 잇는 15개 구간으로 구성됐다. 15개 구간은 3개 길로 나뉜다. 1길은 풍수원 성당~월송공소~문막성당~부론면 서지마을~귀래공소~화당초교~배론성지이다. 2길은 배론성지에서 시작해 용소막성당~금대삼거리~원동성당~영산성당~풍수원 성당이다. 3길은 서지마을~술산정류장~후리사공소~원동성당을 잇는다.

 

제천시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1950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천주교 성지관광 순례길 등 배론성지 인근 인프라 조성을 추진해왔다. 또 제천시는 순례길 운영 활성화를 위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2022 종교문화여행 치유 순례 프로그램공모사업에 선정됐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총 6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해 치유 순례 프로그램 운영과 안내사 양성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창규 제천시장은 배론성지는 제천 10() 중 하나이며,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순례길이 지역경제, 관광 활성화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 충북 제천 배론성지 전경. /제천시 제공.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 배론성지

 

배론성지는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신앙을 키워나간 교우촌(敎友村)이다.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제천~원주 간의 국도 변에 위치한 배론성지는 한국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한국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나간 교우촌이다. 배론성지는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에 있다.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재한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 

 

배론성지의 유래와 걸어온 길

 

조선시대의 행정지명으로 제천현 근우면 팔송정리 도점촌으로 옹기를 굽던 곳이다. 배론에 천주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정조15)에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로 추정되는데, 탄압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교우들의 은신처가 됐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철종6)부터 1866(고종3)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론 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으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됐고 1861년 별세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인 동시에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인 남종삼의 생가가 있는 지역(산 넘어 묘재)이다. 배론성지는 1911년 경성교구에 속해 있다가 1968년 원주교구에 속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배론성지의 4대 보물

 

1. 황사영백서 토굴

 

180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 알렉시오는 8개월 동안 배론마을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베이징(北京)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소재(素材)는 명주천이고,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세필로 쓴 글자 수는 122, 113384자다.이 백서는 첫째, 인사말(1-5), 둘째, 신유박해의 진행 과정(6-32), 셋째순교자 열전(32-90), 넷째,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8), 다섯째, 관면요청과 맺음말(119-122)로 되어 있다.

 

백서가 중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편지 심부름을 맡았던 황심 토마스가 1801929일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11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사(凌遲處死) 되었고, 6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정명련)  마리아는 제주도로, 2살 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갔다. 현재 백서의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 성요셉신학당

 

성요셉 신학당은 1855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이때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1803-1866)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했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1856-1866)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1862-1866)가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두 서양인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다.

 

1866(병인박해) 32 서울에서 남종삼 요한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이 신학교를 급습하여 두 신부를 체포했는데, 3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장주기 요셉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330일 순교했는데, 사람들은 그때 흰 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성요셉신학당은 한국천주교 최초의 신학교임과 동시에,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서울대교구의 가톨릭대학교는 성요셉신학당의 역사를 따르고 있으며, 이는 전국 모든 가톨릭계 신학대학의 시작이기도 하다.

 

3.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묘

 

배론성지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의 묘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성인이고,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1801-1840) 복자이다.

 

최양업 신부는 183612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184941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최 신부는 귀국 후 116개월 동안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며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사목하는 구역도 전라도경상도충청도 5도로서 6천여 명의 신자들과 127개의 공소가 있었다.

 

1861615일 경상도 전교(傳敎)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문경에서 선종(善終)했고, 그해 11월경 베르뇌 주교에 의해 당시 신학교가 있었던 이곳에 묻히게 됐다.

▲ 천주교 성지 순례길 노선도. /제천시 제공.

 

4.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배론성지 내에 자리잡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피정시설로, 원주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기획됐다. 2018년 공사가 시작되어, 2020815일 봉헌식을 했다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누구나 기도하고, 누구나 기도를 배우는 기도의 집의 역할을 하기 위해 건립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는 지금도 여러 피정들과 기도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며 '기도의 집'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사제·부제 서품식, 순교자 현양대회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구행사는 모두 배론성지에서 치러진다. 비슷하게 대전교구는 김대건 신부 생가인 솔뫼성지에서 교구 행사를 많이 연다. 배론성지 내에는 원주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어, 초대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다니엘 주교를 비롯한 원주교구의 선종 사제들이 안장돼 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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