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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 작가-기행 산문Ⅴ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

박현선 | 기사입력 2024/02/20 [04:17]

박현선 작가-기행 산문Ⅴ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

박현선 | 입력 : 2024/02/20 [04:17]

▲ 규슈대학 의학 역사관에 전시된 의학 기구 ©CRS NEWS


파란 눈에 갈색 머리를 한 미군 병사가 풀빛 작업복을 입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선다
. 키가 크고, 붉은 수수깡처럼 야위었다.

의자에 앉으시오! 옷을 벗고 숨을 깊이 들이 쉬세요.”

건강 검진하는 겁니까?”

, 그럼요, 안심하시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었고, 1945년 초여름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일본 도시는 폐허로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과 인성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밤낮으로 계속 되는 공습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19455월에서 6월 사이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본토를 공격하다가 구마모토(能本)에서 추락 후, 미국폭격기 B-29 탑승원 여덟 명이 산 채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다.

 

규슈대학 병리학 연구소 앞으로 군인 트럭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트럭 위에는 풀빛 작업복을 입은 미군 병사들이 눈이 가려진 채 모여 앉아 있었다. 트럭이 제2외과 입구 앞에 멈추자 권총을 찬 일본 병사의 명령에 따라 미군 포로들은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갔다.

 

규슈 대학 의대 교수들은 포로로 잡힌 여덟 명을 대상으로 의학 실험을 계획 하고 있었다. 실험의 목적은 폐를 잘라내면 인간은 몇 시간이나 살 수 있을지, 혈액 대신 식염수를 인체에 얼마나 주입할 수 있는지, 주로 인간은 혈액이 얼마나 소실되면 죽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해부에 참여한 의료진은 열두 명으로 그 중 두 명은 간호사이다. 전쟁이라는 큰 흐름에 휩쓸려 의사들은 인체실험에 손을 댔다. 개중에는 실험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실험은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무슨 소릴, 당신, 그러다 처벌 받는다고! 이런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반대였다. 하지만 국가에 반기를 든 저항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 의학의 발전을 위해, 전쟁을 위해, 일본을 위해 의사들은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고 생체실험에 참가해야 했다.

 

여덟 명의 포로들은 수십 회나 일본 도시를 폭격 했다고 자백했다. 무차별 폭격을 한 무리는 국제법 위반으로 전시(戰時) 중에는 특별 중범죄인적용을 받게 했다. 일본 군부는 정보 가치가 있는 기장만 도쿄로 보내고 이하는 적당히 조치하라고 명령했다. 의사들은 포로로 총살당하면 강에 뼛가루로 뿌려지겠지만 생체실험을 받다 죽으면 의학발전에 공헌하는 거니까. 같은 병을 앓는 많은 환자를 구하는 길이 열린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독약을 뿌려놓은 듯, 냉혈인간이 되어 있었고, 당시 일본 군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거부할 수도 없었다.

 

저거, 에테르 아닌가요?”

, 맞아요! 당신을 치료하기 위해서요.”

조금만 참으시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군요.”

고향이 어딥니까?”

미국 캘리포니아인데, 좋은 곳이죠.”

가 본 적 있나요?”

………

에테르 마취가 시작되었고, 이 포로는 차츰 기분이 좋아지는 듯 보이더니 주체 못할 졸음이 쏟아지는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잠에 빠져든다. 고향인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가족을 만나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와인을 마시며 바비큐 파티를 하고, 달콤하게 잠드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그만의 늪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 규슈대학 의학 역사관의 의학 기구, 수술 장면 사진 전시물  © CRS NEWS

 

고향인 캘리포니아는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한 곳이리라. 들길 따라 마을에 들어서면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다양한 음색으로 지저귀는 산새 소리, 풀숲을 스치며 지나가는 작은 동물들이 있는 자연 속 하얀 집일 것이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들은 사계절 내내 다른 색을 띠고 있겠지. 겨울이면 설경으로 멋을 부리고 늦은 봄과 여름엔 반짝이는 녹음으로 변했다가 가을이 되면 떡갈나무 숲이 붉은 갈색을 띠면서 말이다. 마을 곳곳에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도란도란 그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기 전에는 일본을 비롯하여 그 쪽 방향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항공병에 지원해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 제대 후에는 최대한 윤택한 삶을 위해 입대를 결심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 놨다. 그곳은 죽음의 참상이 가득한 전쟁의 도시였다. 전쟁은 참으로 외롭고 진저리치도록 무서웠다. 이러한 혹독한 인생 경험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이 되길 바랐다. 전쟁 중 미국은 생포한 일본 포로를 잘 대우해 주었다. 그렇기에 일본군도 그러리라 생각하며 안심하였다. 이 병사는 건강 검진 후,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 품속 같은 미국 캘리포니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간호사가 표정 없는 얼굴로 수술대에 누워 있는 포로의 몸에 머큐로크롬을 발랐다. 약물로 굵은 목과 갈색 털이 무성한 가슴을 빨갛게 물들이자 하얀 팔이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교수인 집도의가 경례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해부의 시작을 알렸다.

포로에 대한 실험을 말씀드리면, 폐 외과에 필요한 폐 절제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폐는 얼마만큼 잘라내면 죽음에 이르는가. 이 문제는 결핵 치료와 전쟁 의학에서도 오랜 세월 숙원 실험이었기 때문에 포로의 우 폐 전부와 좌 폐의 상엽(上葉)을 잘라낼 예정입니다. 그 사이에 심장 정지 및 심장 마사지에 의한 고동재개도 시도할 겁니다.”

 

, 그럼, 시작할까요?”

해부 개시는 오후 38분입니다. 기록해 놓으세요.”

매스

거즈

8mm 촬영기기 돌아가는 소리가 메스와 가위 소리에 섞여 울렸다.

………………………………………………………

“30 25 20 15 10 ……. 숨이 멈췄습니다.”

몇 시인가요?”

“428분입니다.”

산 사람이 산 채로 죽었다. 그때 그 의료진들은 양심이 마비되었다. 가책이라는 건, 오로지 타인의 눈,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뿐이었다.

 

▲ 규슈 대학 의학 역사관의 1945년 의학 기록 일지 전시물  © CRS NEWS

 

어느 병사의 마지막 편지

그리운 어머니!

죽음의 문턱에서 어머니의 끝없고 한없는 정을 가슴에 담고, 어딘지 모를 이곳 하늘나라에 도착해 편지를 띄웁니다. 저 세상에 가면 한 마리 새가 되고 싶다는 어머니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그 당시에는 무심하게 들었어요. 오래도록 어머니의 향기를 맡으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먼저, 저 세상인 이곳에 와 있으니. 정성을 다하지 못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위해 무사귀환을 바라며 매일 혼신의 기도를 올리셨지요. 어쩌면 전사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정신이 혼미해지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해옵니다.

저는, 이제, 하늘나라에 도착해 편안히 안식에 들었습니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축복이 온 누리에 내려지길 하늘에서 염원합니다.

내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사랑하는 조국이여, 모두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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