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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성지와 미리내성지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2/13 [10:32]
명당풍수●종교성지순례

솔뫼성지와 미리내성지

명당풍수●종교성지순례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2/13 [10:32]

금원수가 휘감아도니 아무나 얻지 못하는 자리라

 
▲ 당진 솔뫼성지 내의 김대건 신부 생가. 평야를 지나온 용맥에 금원수가 환포하고 있는 좋은 양택지다.     © 매일종교신문

한국사람으로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고,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한 김대건 신부. 그가 태어난 생가가 솔뫼 성지이고, 군문효수를 당해 묻힌 곳이 미리내성지이니….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오면 김 신부의 참혹한 죽음과 안타까운 묘지 사연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데….


솔뫼성지(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5)는 김대건 신부가 출생(1822)한 곳이고,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는 그가 군문효수를 당해 절명(1846)한 후 묻혀 있는 곳이다. ‘소나무 산’이란 우리말의 솔뫼에는 2백 살이 넘는 재래 적송들이 상큼한 솔바람을 일으키며, ‘은하수 골짜기’란 뜻의 미리내는 계곡이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두 곳 모두 곱디고운 우리말 땅 이름이다.


안드레아(세례명) 김 신부의 증조부(진후, 1814), 종조부(한현, 1816), 부친(제준, 1839)은 천주교를 믿는다고 차례로 처형당했다. 아흔아홉 칸의 대갓집에 살던 김해 김씨 가문이 몰락하여 폐문 지경에 이르렀고 정든 고향에 머물 수조차 없게 되었다. 7세 때 어머니 우르술라(세례명) 고씨를 따라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했다. 여기서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렇다면 당진 솔뫼 생가 터는 어떤 자리이기에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출현하게 되었을까. 하나뿐인 목숨을 22년 안에 4명을 바친 집안이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족사다.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당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한국풍수지리중앙회 거봉 김혁규 회장과 문하생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당진 성당의 여성 신자들이 합류하니 간산 순례길이 한층 활기를 띠며 즐거워졌다.


당진의 면천 두견주와 기지시 줄다리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민속문화의 큰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이곳에 와 길을 물으면 “저 너머 거짐(거의) 다 와 가유” 하는데 4킬로미터는 더 가야 한다고 한다.

“저 멀리 송림이 우거진 곳에 솔뫼성지가 보이는데 사방이 넓은 평야 지역으로 김 신부 생가 터만 봉긋이 솟아 있습니다. 축좌미향에 술건戌乾득수가 을진乙辰파로 빠졌으니 좋은 양택지일뿐더러 평야에 이런 자리가 형성되었다는 건 아주 드문 일입니다. 더구나 전방에는 금원수錦圓水가 넓은 들녘을 감싸돌고 있어요.”


펀펀한 논과 밭에도 과연 명당이 있을까. 솔뫼성지 내의 올곧은 소나무 밭을 거닐면서 일행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뒤에서 듣던 거봉이 질문으로 받아 “그것이 바로 평지풍수”라며 야외강론을 편다. 특히 끝을 알 수 없는 일망무제 평원 지역의 중국에서는 보편화된 풍수다.

밭이나 논을 뚫고 지나가는 용맥을 천전협穿田峽이라 하는데, 대개는 농사짓느라 갈아엎어 눈에 띄기 어렵다. 그러나 쟁기질과 써레질을 한다 해도 쟁기보습 들어가는 깊이가 일정하므로 반드시 높낮이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한 치만 높아도 산이요, 한 치만 낮으면 물이라 했다. 이 천수협을 과맥과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제 몫을 하는 풍수라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의 물길을 건너는 협맥을 도수협渡水峽이라 하는데 물 가운데의 석량石梁(돌줄기)으로 이어져 섬으로 치받아 오르는 용맥입니다. 강화도, 거제도, 울릉도 등 모든 섬에는 사방에서 솟아오른 도수협이 반드시 있어 이 맥을 기준으로 도서풍수가 이뤄지는 것이지요. 토맥은 물이 막아서면 멈추지만 석맥은 산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관통하는데 청암靑岩 중에도 과골過骨이면 최길이라 하여 돌 가운데 동아줄처럼 불끈 솟은 돌뼈石骨를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김 신부의 동상이 서 있는 후룡맥이 은근히 살아 있다. 아파트가 가로막아 얼핏 보아 넘기기 일쑤겠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찾아내겠다.


복원된 생가가 옛집 좌향 그대로인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서북쪽에서 들어온 물길이 남동(동에서 15도)쪽으로 빠지며 보이질 않는다. 밖에서는 평지 같아 보이던 피정의 집과 김 신부기념관에도 2~3미터의 얕은 구릉으로 표고가 다르다. 안산과 조산이 멀어 조응이야 빠르다 할 수 없겠지만 사신사도 길격으로 저 멀리서 옹위하고 있다. 평야지대 들판에서도 음택지와 양택지를 골라 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현장이다.


▲ 미리내성지 안에 조성된 103인의 성인위를 봉안한 기념성당.     © 매일종교신문
솔뫼성지를 떠나 안성 미리내성지로 향하는 국도에 먹장구름과 황사바람이 막아선다. 4월 초순인데도 올 봄 날씨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봄볕엔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 했는데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려 가고 있다.


“이곳 미리내에 오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김 신부의 참혹한 죽음과 안타까운 묘지 사연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됩니다. 사람이 당하는 불행 앞에 네 종교 내 신자가 무엇일 것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숨이 막혀 올 따름입니다.”


생소한 문물이나 종교가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정착하려면 습합 과정에서 충돌과 고통은 수반되기 마련이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는 데도 이차돈의 순교가 뒤따랐다. 병자호란(1637) 후 중국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도 천주학 등 서양문물을 도입해 왔다. 아직도 규명 안 된 그의 독살설은 너무 앞서 갔던 서학과 무관치 않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당시는 군신 간의 상하관계 지배윤리로 왕조체제가 유지되던 절대왕권시대다. 이런 상황에 천주학은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임금과 백성이 평등하다는 논리였으니 먹혀들었을 리 없다. 천주교 신자 이벽이 지은(1779) ‘천주가사’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삼강오륜을 지켜 가는 중에도 천주공경이 으뜸이다”는 내용이 있다.


문제는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을해박해(1815), 기해박해(1839)로 이어지는 천주교 탄압이 권력유지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정 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고 천주교를 배척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반면 시파는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는 자세였으며 세자의 죽음을 반대했다.


이 같은 살얼음판 정국에서 김 안드레아는 1845년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정조 시대에 이미 1만 명을 넘어선 천주교 신자는 왕실까지 파고들어 뿌리내리는 등 가히 위협적이었다. 그는 이미 내려진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전교를 위한 비밀 항로 개설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군문효수. 고종 31년(1894) 폐지되기는 했지만 큰 죄를 범한 죄인의 목을 벤 후 장대에 묶어 매달아 군중들을 경계시켰던 사형법이다. 효수를 당한 죄인은 시신조차 수습 못 하게 군졸들이 파수를 지켰다. 김대건 신부는 여섯 번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 교우들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긴 후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 이후 김 신부는 철종 8년(1857) 교황청에서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福者品에 오른 후 1984년 4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위에 올랐다.


김 신부가 죽은 지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 1829~1921)은 시신을 몰래 파내 등에 지고 야음을 틈 탄 1주일의 강행군 끝에 고향 선산인 안성의 이곳에 안장하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미리내성지는 조성되며 이후 빈첸시오는 자기 선산을 복자기념지로 기증했다. 1928년 세워진 경당 앞에 대리석으로 조영된 김 신부 묘 가슴 부위는 손때가 새카맣게 묻어 있다. 찾는 교우들마다 눈물 흘리며 그 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앞·뒷산이 목木체형으로 후룡맥이 대담하게 살아 내려왔습니다. 경황이 없다고 함부로 쓴 묏자리가 아닙니다. 신좌을향에 해亥득수, 오午파구니 이만한 자리도 아무나 얻지 못합니다.”


거봉의 산국山局 설명이다. 특히 북현무가 병풍 치듯 안온하게 둘러싸여 따사롭기 그지없다. 경당 옆에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의 묘가 나란히 있다. 경당 우측 아래에는 한국가톨릭의 103위 성인을 봉안한 거대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함부로 범접 못 할 위용과 함께 후면의 하전下殿이 장관입니다. 하전은 장군이 대궐을 지키는 형국이어서 음택이나 양택에서 최고로 꼽는 산세인데다가 뒤를 돌아보니 미리내성지를 에워싼 동서남북이 흠결 없이 환포되었습니다.”


5백만 가톨릭 신자들의 영성귀의처인 솔뫼와 미리내성지가 그냥 있어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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