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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종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2/31 [16:12]
화평서신

돈과 종교

화평서신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2/31 [16:12]
 
▶ 종교헌금이 종종 법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기업체 등에 압력을 넣어 시주를 한 것이 ‘뇌물죄’로 적용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주를 주선한 사람은 물론 단순한 시주금으로 받은 스님까지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재산헌납으로 비롯된 가정파괴 등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신성해야 할 ‘신앙의 문제’가 세속의 돈 문제로 얼룩지고 세속의 심판을 받는다는 게 모순될 뿐만 아니라 종교언론을 담당하는 종교인으로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종교계에는 비일비재합니다.


▶ 종교와 돈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인 것 같으면서도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입니다. ‘창조주 신의 뜻’은 이 세상의 부와 영광보다 더 소중한 ‘정성과 마음’에 있지만 그 ‘뜻’을 펼치기 위해선 성전건축, 조직의 운영과 관리 등을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되도록 많은 헌금을 걷어 더 크게 뜻을 펼칠 수도 있고, 사회봉사와 운영을 위한 기본적인 자금으로 순수하게 ‘창조주 신의 뜻’을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각각 나름의 사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네가 그르다, 내가 옳다’ 등 극단의 주장은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앙은 ‘창조주 신과 나와의 관계’로 각자의 분수와 양심에 따르는 것이지 아전인수식 판단이나 법정의 재판 등으로 평가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앙이 세속의 판단과 재판에 의해 시비를 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세속을 심판해야 할 위치에 있는 종교가 거꾸로 세속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기 위해선 종교지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종교지도자는 ‘창조주 신의 뜻’을 전하는 중보자(仲保者)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종교의 틀에 가두어 로봇이나 허수아비로 만들지 말고, 창조주 신의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선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단은 개인을 위하고, 개인은 교단을 위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만 할 뿐 개인의 신앙과 행복은 등한시하고 있는 게 종교계의 현실입니다. 사람은 어렵고 고통스러울수록 창조주 신을 찾고 의지하려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합니다. 그를 통해 위안을 받으려고 하는데 교단은 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교단의 입장과 이익, 편리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누구는 가난한데도 불구하고 이만한 헌금을 내서 복을 받게 됐다’는 등의 간증과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헌금문제로 다른 교인에 대한 소외감, 혹은 부담감을 느끼고 종교를 멀리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약정금을 써냈다가 이를 감당하지 못해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을 하나하나 배려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 재산을 헌납한 교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다시 관리하라’며 돌려 준 목사가 있습니다. 그 교인은 그 후 사업을 번성시켜 더 많은 헌금을 냈다고 합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시주금액을 기록했다가 시주자가 형편이 어려워지면 다시 돌려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좋은 본보기라 하겠습니다.


창조주 신은 ‘재물’보다 ‘마음과 정성’을 중히 여기십니다. 사람을 보실 때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한 것이 없습니다. 높은 건물, 호화스런 치장을 보지 아니 하시고 마음을 보시고 찾아오십니다. 종교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인에게 이성적으로 이러한 근본정신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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