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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보탑 영험도량 계룡산 신흥암과 사찰풍수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2/05 [10:03]
이규원의 명당탐방

천진보탑 영험도량 계룡산 신흥암과 사찰풍수

이규원의 명당탐방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2/05 [10:03]
 
물을 따라가다 보면 머무는 곳,
명당이 아니면 짓지도 않으니



절터는 명당이 아니면 고르지도, 짓지도 않는다고 했다. 물을 따라가다 보면 머무는 곳이 ‘절간’이라 했으니, 바로 신흥암 자리를 두고 이른 말. 이곳에 와서는 감히 풍수를 운위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데, 사방이 모두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천애절벽에 무슨 조화로 신흥암 자리만 분지로 가라앉으며 절터가 만들어 졌을까.

 
▲ 고구려 아도화상이 진신사리를 찾아내 가람을 일으킨 신흥암.     © 매일종교신문

우리 한반도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건 서기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인데, 그 이전에 창건된 절이 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47-1번지. 계룡산 심산유곡 첩첩산중에 자리한 신흥암新興庵이라는 절이다.

이 깊고 깊은 산중에 황진경黃軫經 스님이 은거하고 있어 새벽길을 달려갔다. 조계종 총무원장, 종회의장,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뒤 어느 날 갑자기 세속에서 모습을 감춰 수많은 운수납자들이 그의 안부를 궁금해 오던 터다. “그동안 남루해진 ‘육신의 옷’이 거추장스러워 옷을 벗으러 이곳에 왔노라”면서 반기는데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며 콧등이 시큰해졌다. 비구승은 홀몸이어서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몇 번의 생사 고비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80년대 한국불교의 수장으로 온갖 영욕과 만고풍상을 다 겪은 진경 스님. 사찰풍수의 대가로 숱한 고위관리들과 재벌들이 동행을 원했지만 응하지 않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일필휘지는 ‘해동명필’로 소문나 누구나 소장하려고 한다. 나와는 20여 년 전 애송이 종교담당 기자 시절 인연이 되어 불교의 정점진수 교리와 난마같이 얽히고설킨 문중 인맥을 가르마 타듯 설파해 준 사연私緣이 있다. 중국풍수 원서를 건네주며 핵심요목을 일일이 전수해 준 은사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절터는 명당이 아니면 고르지도, 짓지도 않는다고 했다. 물을 따라가다 보면 머무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절간’이라고도 했다. 바로 신흥암 자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곳에 와서는 감히 풍수를 운위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것 같다. 산신각에 올라 복원불사가 한창 진행 중인 도량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이 모두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천애절벽인데, 무슨 조화로 신흥암 자리만 분지로 가라앉으며 절터를 만들어 놓았을까. 더없이 기이하고 신묘한 일이다. 그러나 신흥암은 이보다 더 놀랄 만한 역사와 신비한 영험이 숨겨져 있는 비보秘寶도량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맨 처음 도래하기는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화상이 고구려 사신으로 입국(372)하면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는 아도화상이 불법佛法을 홍포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위魏나라 사신 아굴마와 고도령(고구려 여인) 사이에서 태어나 5세에 입산한 승려다. 아도가 전국을 주유하다 계룡산에 들러 바위 속에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발견하고 천진보탑天眞寶塔이라 명명했는데 바로 신흥암 자리다. 자연이 조성해 놓은 천연 바위탑으로 국가에서는 문화재자료 제68호로 지정했다.

 
▲ 천진보탑. 자연이 조성해 놓은 천연 바위탑으로 국가에서는 문화재자료 제68호로 지정했다.     © 매일종교신문

천진보탑의 유래와 불가사의를 알고 나면 불법의 진수가 어디까지인지 끝없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한 후 인도의 아소카 왕은 쿠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에서 8말 4되(인도 도량형)의 진신사리를 발견했다. 이를 시방十方 세계로 나누면서 북방을 담당한 비사문천왕을 계룡산에 보내 봉안토록 한 것이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의 일로 아도화상이 진신사리를 찾아내 가람을 일으키니 오늘의 신흥암이다.

무릇 종교에는 과학적으로 설명 안 되는 기적과 신비가 있다. 성모마리아상이 눈물을 흘리고, 천 년 된 동불상에서 ‘우담바라’ 꽃이 피는가 하면, 십자가의 치유은사 이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89년 한국을 방문하여 대구에서 성회를 가질 적엔 멀쩡하던 하늘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휘감아돌아 가톨릭 신자들과 국민들을 감동시킨 적이 있다. 나도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취재진 중의 한 사람이다.

자연이 빚어 놓은 신흥암의 바위사리탑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광放光 하여 한밤중에도 계룡산을 환하게 밝힌다. 천진보탑의 놀라운 방광 장면은 6·25전쟁 직후 당시 계룡산에 주둔하던 한 미군병사 카메라에 잡혀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수년 전 어둠이 내리던 저녁에도 방광을 시작하여 산불이 난 줄 알고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이런 산속에서 진경 스님은 마음을 내려놓은 채放下着 생각조차 던져버렸다고 했다. 보행이 자유롭지 않은 스님과 천진보탑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니 모든 산봉우리들이 사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읍揖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곳이 바로 오룡쟁주五龍爭珠의 도처到處 혈입수지穴入首地입니다. 무심코 앞산만 바라봐도 흠결이 없는 혈장穴場으로 서 있는 곳마다 명당이지요. 이런 산중 법당에서는 앉아만 있어도 운기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등 뒤의 삼불봉, 좌측의 미타봉, 우측의 수정봉, 앞쪽의 관음봉 모두가 예부터 불린 이름들이다. 그래도 좌향은 알아야 되겠기에 슬그머니 나경을 꺼내니 “확인하는 습관이 여전하시군요” 한다. 복원 중인 대웅전은 임좌병향이고, 나한전은 유좌묘향이다. 이 중 나한전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천진보탑을 직접 바라볼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되어 있어 철야정진 기도법회가 끊이지 않고 있다.

풍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맨 먼저 사찰에 뿌리를 내리고 다른 한 갈래는 세속으로 흘러가 양대 산맥을 이루는데, 그중의 진수가 사찰풍수다. 고려나 조선조를 통한 풍수의 정통은 스님들로 명맥이 이어지며 세속풍수는 권력, 금권과 야합하면서 설화 쪽으로 치우치고 만다. 신라 도선 국사 이후 풍수가 성행한 지 천 년 세월이 넘었는데 아직도 명당이 남아 있을까 싶어 물었다.

“있고말고요. 명당인 줄 알고 써도 아닌 법이고 모르고 써도 명당인 법입니다. 조선 왕조 때도 겨우 28개 성씨만 28개 명당에 묘를 쓰고 벼슬을 한 것 아닙니까. 풍수이론에만 너무 치우치지 말고 간산으로 자리를 찾아 재혈만 잘 하면 가운의 형세가 달라지지요.”

자기 생각을 버리고 과분한 욕심을 억눌렀을 때 호법신장護法神將은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군왕지지’를 찾는다 해서 누구나 그 자리의 임자가 되는 것도 아니란다. 넓은 들판의 빈집도 주인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산봉우리, 계곡마다 주인이 없겠느냐면서 호법신장의 도움 없이는 반드시 인간적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일갈이다.

12살 적 절에 공부하러 갔다가 입산길이 되어 동진출가童眞出家하게 되었다는 스님에게 “80을 바라보는 노스님도 혹여 부모 생각이 날 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취재수첩에 ‘無父無君不如禽獸무부무군불여금수’라고 친필로 적어 준다. 아버지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면 금수만도 못하다는 말이다. 진경 스님은 놀랍게도 자신의 부친 묘도 수차례 이장했다고 했다. 명혈인 줄 알고 모시면 가혈이었고, 그렇게 속기를 여러 차례였다고. 자기 아버지 유골을 아홉 번이나 지고 다니며 명당을 찾아 묘를 쓴 조선 중기의 대풍수 남사고(1509~1571)가 떠올라 “이제는 누구에게나 내보일 수 있는 자리냐”고 하니 “그 후로는 집안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전국을 주유 간산하다 보면 안타까운 집자리와 절터가 적지 않아 시름 또한 깊어질 때가 있어요. 비어 있는 ‘큰 자리’에 당도해서는 우리나라의 국운이 아직도 창창함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예부터 명당 임자는 따로 있고 욕심을 버려야 땅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탐관오리나 남을 해코지한 자는 설령 명당엘 들어간다 해도 조상 음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르게 잘 살아야 합니다.”

진경 스님은 총무원장 시절 백두대간으로 연결된 산맥과 정맥들을 헬기로 돌아보며 전율했다고 한다. 전국 산하가 살아 꿈틀대는 생룡이었고 그때 하늘에서 내려다본 계룡산은 말 그대로 장엄무쌍이었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우측으로 홱 틀면서 속리산에서 소용돌이친 후 낙맥으로 우뚝 선 영산靈山이 바로 계룡산입니다. 그중에서도 신흥암 자리는 연화반개형으로 연꽃이 만개하기 직전의 읍국揖局 산세라 명당지혈이지요.”

오후에는 부산의 오학사 신도 80여 명이 신흥암에 참배를 왔다. 마곡사(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말사인 갑사甲寺 입구에 내려서도 1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는 산중험로를 단숨에 왔다고 했다. 80이 넘어 보이는 노보살이 스님한테 묻는다.

“큰스님께 한 말씀 여쭙고자 왔습니다. 사람이 나고 죽는 이승은 뭐고 저승은 무엇인지요.”

스님은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전생의 일이 궁금하거든)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죽은 후 다음 생의 일이 궁금하거든)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행위를 돌아보라)”라고 화답했다.

산사에 어둠이 깃들 때까지 들은 불법진리와 사찰풍수의 깊은 통찰, 다비에 얽힌 장법葬法 내용들을 어찌 한 지면에 풀어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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