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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과 학교의 역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3/19 [10:57]
이규원의 명당 풍수

소수서원과 학교의 역사

이규원의 명당 풍수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3/19 [10:57]
 
막 피려는 연꽃이 꽃 순을 여는 절경에 명승혈지라
 
▲ 사액서원은 순흥 문화유적권의 대표 건물로 죽계천이 반원형으로 감아도는 절경에 위치하고, 서원의 중심 건물인 영정각 앞마당은 타원으로 감도는 원훈이 있으니, 상서로운 기운인 태극훈이다.     © 매일종교신문

세상의 온갖 설움 중 가장 큰 설움은 ‘못 배운 설움’이라 했다. 헐벗고 굶주리며 집 없는 설움이야 능히 극복하여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지만, 배움의 길이란 때가 있는 것이어서 실기失機를 해버리면 ‘평생의 한’으로 남아지는 연유에서다. 그래서 선조들은 인생길 가운데 학문 연마를 으뜸으로 여겼고 자식교육에 온갖 정열을 다 쏟았다. 이런 전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대물림이어서 좁은 국토, 자원빈국의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서게 뒷받침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역사는 유구하다. 기록에 전하는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설치된 태학太學이다. 이해는 마침 중국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화상이 고구려 사신으로 입국하면서 불교를 처음 전파한 때와 일치한다. 중국과 계속된 전쟁·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국가체제 정비에 힘쓸 때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발전의 동력이나 국력 배양이 인재양성에서 비롯됐음은 자명한 일이다. 당시 태학에서는 귀족 집 자제들을 입학시켜 유교 경전과 문학, 무예 등을 가르쳤고, 지방에서는 경당Ξ堂이란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해 운영토록 했다. 고구려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어 건국 초부터 이미 한자를 사용해 왔고 일찍이 불교를 공인해 대륙문화를 꽃피웠다.

태학이 신라시대에는 국학國學으로 명칭을 바꿔 교육 기능을 수행하며 국가 동량棟梁들을 양성해 냈다.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역시 태학, 국학의 명맥을 이은 국립 교육기관으로 성종 11년(992) 당·송 제도를 도입해 설립한 종합대학이다.


오늘날의 성균관이란 명칭은 고려 말에 와서야 등장한다. 1356년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따라 국자감으로 환원되었다가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1362)되면서부터다. 이후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인재양성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유학교육기관의 대명사가 되었다. 태학이라는 명칭과 함께 반궁泮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수선지지首善之地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는 조선 초 태조 7년(1398) 현 위치인 숭교방崇敎坊에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에 국권을 상실당한 뒤 한때는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어 문묘의 제향기능만 담당키도 했다. 현대 대학 직제로의 설립은 1946년 전국 유림대회 결의에 따른 것으로 1953년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학부의 기원은 중국 주周(기원전 1046~771)나라 때 천자天子의 도읍에 설립했던 벽옹퇳雍과 제후諸侯의 도읍에 세웠던 반궁泮宮제도에서 비롯된다. 제후국은 천자국을 섬기는 속국으로 중원대륙이 통일되기 전에는 전쟁을 일삼느라 편한 날이 없었다.

조선시대 지역교육을 담당하는 지방 대학은 서원이었다. 당시 교육에도 현재와 비슷한 학제가 있어 문중이나 집안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소규모 글방은 초방草房이라 불렀다. 서당書堂은 현재의 중·고교와 같은 수준으로 몇 개 마을에 한 개씩 있으면서 훈장의 수준도 꽤 높았다. 지방 최고 학부 격인 서원은 사림의 출연으로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의 자치운영 기능까지 겸했다.


서원에서는 학문연구와 함께 선현 제향을 봉행하여 당시 향촌 사림들의 수행처로도 큰 몫을 했다. 조선 초기부터 늘어난 서원들은 각 지역에 인물 배출의 산실이 되었고, 이들이 주로 관직에 진출하며 지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서원 출신 세력들이 조직화하면서 당쟁에 빠져들고 급기야는 목숨을 건 대결구도로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이 가운데 사액서원이라 함은 조정에서 임금이 현판을 써서 내리는 곳으로 운영비의 일부 내지는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게 된다. 운영의 주체가 나라이므로 사회적 신인도가 크게 상승되어 배출되는 원생들의 장래도 보장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번지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제55호)이다.


소수서원은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朱世鵬(1495~1554)이 고려 말 유학자이자 이곳 순흥 출신인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의 제사를 위해 사당을 세운 데서 비롯된다. 다음 해 백운동서원을 설립해 안축, 안보를 배향하고, 1633년에는 신재가 추가 배향되면서 사설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문중이나 국가의 발전이 걸출한 인물에 의해 이루어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바 없다. 명종 5년(1550) 영남의 거유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소수서원의 면모는 일신된다. 조정에 올린 퇴계의 건의로 사액현판과 함께 사서, 오경, 성리대전까지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최초의 사액서원이 탄생하면서 전국 각 곳에서 사액서원을 설립하려는 주청이 잇따랐고 국립 지방교육기관 운영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 소수서원은 순흥 문화유적권의 대표 건물로 죽계천이 반원형으로 감아도는 절경에 위치해 있습니다. 옛 선비들이 서원 자리를 잡을 때는 풍수지리에 치중하기보다는 한적하고 경관 좋은 곳을 택했음을 알 수 있어요. 이곳도 마찬가지여서 접근성이 뛰어나고 앞산이 가려 잡념을 가질 수 없는 곳입니다.”

벽계풍수학회 벽계 조수창 회장과 회원들은 이틀째 강행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습 열기를 더해 간다. 서원 입구에 돌출형으로 솟아 있는 신령한 거북 모양의 영귀봉靈龜峰에서 벽계의 산세 설명이 이어진다.


“소백산 비로봉 조종산祖宗山 아래 건해(북에서 서로 37.5도)룡에서 해(북에서 서로 30도)룡으로 내려와 계좌(북에서 동으로 15도)정향(남에서 서로 15도)으로 자리 잡았으니 정남향에 가깝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농사짓던 전답으로 여겨지며 수해를 막기 위해 물길을 활용한 지혜가 놀랍습니다.”

벽계의 내룡맥 설명에 경기도 이천에서 현지 합류한 회원들이 “넓은 경내에 여러 동의 건물이 있을 때는 어느 곳을 중심 삼아 봐야 하느냐”고 묻는다. 소수서원 안에는 지락재, 강학당, 직방재, 학구재, 영정각, 전사청, 일신재 등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이 빼곡하다.

“신재 선생이 서원을 건립하며 맨 먼저 회헌 선생 영정을 영정각에 모셨어요. 당연히 여기가 중심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찰에서는 대웅전을, 학교에서는 본관 건물을 봐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경복궁에서도 근정전이 중심각閣이잖습니까.”

영정각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신新 유교의 비조인 회헌 영정(국보 제111호)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신재 영정(보물 제717호) 등이 봉안되어 있다.
비가 내려 마사토가 드러난 앞마당에 타원으로 감도는 원훈이 있어 물으니 틀림없는 태극훈이란다. 옛 선비들이 필수과목으로 공부했던 풍수지리의 안목이 여지없이 적중된 것이다.
음택에서는 혈토穴土를 찾아야 하고, 양택은 형세 위주로 봐야 한다는 벽계의 이론에 나경으로 찾는 비법을 물었다.

“지반정침은 지기地氣의 흐름을 재면서 남북으로 침을 맞춰 용의 방향을 잽니다. 그러나 인반중침은 북극성에 기준을 두어 사격砂格을 재도록 되어 있어요. 이때 해의 방향을 천반봉침으로 환산해 물의 흐름을 측정하면 정혈이 잡힙니다. 바로 영정각 정문과 해시계 방향이 지반, 인반, 천반침을 합치해 배정한 지점입니다.”

이후 소수서원에서는 퇴계의 제자들도 함께 공부하면서 조선 중·후기를 아우르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영주시는 죽계천 너머에 소수박물관을 건립해 이 지역 문화 보전에 전력하며 선비촌을 꾸며 체험장도 마련해 놓고 있다. 바로 옆에는 저자거리를 복원해 풍기인삼을 비롯한 특산품을 판매하고 있다.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금성대군을 이곳에 유배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순흥은 도호부가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금성대군이 두 번째 복위운동을 도모하자 사사시켜버리고 도호부를 폐지해버렸습니다. 순흥 안씨의 관향貫鄕이기도 한 이곳이 그때부터 변해버린 것입니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로 안평대군과 함께 단종 편에 섰다가 형인 세조에게 참화를 당한 충절의 인물이다.

소수박물관에서 서원의 양기陽基 터를 조감해 보니 마치 막 피어나려는 연꽃 한 송이가 꽃 순을 열려는 형국이다. 연화부수형 양백(태백, 소백)지간의 명승혈지다.

“우리 땅은 도처가 명당이어서 인물이 많이 나온 복 받은 대지입니다. 특히 경북 내륙지방은 용진처龍盡處(용맥이 다하여 물길을 만나는 곳)가 많아 곳곳이 명혈입니다.”
이래서 팔도기질 중 경상도를 일러 태산준령泰山峻領이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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