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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성 칼럼●윤동주 선생 서거 70주년 추모

조규성 | 기사입력 2015/02/17 [17:20]
희망의 시로 잠자고 있는 민족정신을 깨닫게 한 민족적 저항 시인

조규성 칼럼●윤동주 선생 서거 70주년 추모

희망의 시로 잠자고 있는 민족정신을 깨닫게 한 민족적 저항 시인

조규성 | 입력 : 2015/02/17 [17:20]

▲ 서거 70주년을 맞은 윤동주 시인은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유학하던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
  
오늘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영혼을 일깨우는 희망의 시로 잠자고 있는 민족정신을 깨닫게 한 민족적 저항 시인 윤동주 선생의 서거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1917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난 윤동주 선생은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유학하던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 선생은 도시샤대에서 유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다음해 3월 31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후쿠오카(福岡) 교도소에서 1945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비극적으로 옥사한 지도 어언 70년. 서거 70주기를 앞두고 국내외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선생에 대한 조명 작업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다. 윤동주의 유품과 원고를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지난 5일부터 후쿠오카, 교토, 도쿄 등 3개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처럼 지난해부터 국내외적으로 윤동주 선생 서거 70주년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어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 민족의식을 지닌 윤동주 시인이 신사 참배를 거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윤동주 시인은 1936년 3월 평양 신궁에서 학교 여학생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노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단봉牡丹峯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 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저작 : 1936년 03월 24일)    

그는 당시 장면을 묘사하며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異國)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라는 구절을 자기 시 한쪽에 남겨 놨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일제 세뇌교육으로 어린 여학생들이 일본어를 쓰고 있는 가슴 아픔 현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빼앗긴 조국을 보면서 그는 민족적 저항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미국과 국내에서도 문화행사가 잇따른다.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재미한인 청년 밴드 '눈 오는 지도'(snowing map)는 미국과 국내에서 서거 70주년 기념 공연을 연다. 공연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보스턴한인교회에서 시작하며 뉴욕(16일)과 로스앤젤레스(22일)를 거쳐 서울(27일)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연세대학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2000년 11월 27일 윤동주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다. 윤동주 기념 사업회는 윤동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실시함과 더불어 한국인의 문학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도 계속적으로 이루어 나가고 있다. 윤동주 시 문학상, 윤동주 기념강좌 및 시 암송대회, 윤동주 기념관의 유지 관리, 윤동주 기념사업 기금 모금 및 관리, 기타 각종 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해 나가고 있다.    

연세대는 2013년 캠퍼스 내의 핀슨홀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개편하고 ‘윤동주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설립목적은 시인 윤동주가 1938년 봄부터 1941년 겨울까지 삶을 아파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한 삶의 터전이었으며, 그 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도 세워져 있다. 윤동주가 떠난 지 반백년이 넘어 지났지만, 그 시대가 주는 절망 속에서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자리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나라사랑이 그의 저항의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삶의 궤적이요, 지표였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연세대학교는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사랑 정신을 되새기어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 시문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는 오늘 신촌캠퍼스 루스채플에서 추모식과 시·산문 창작대회 시상식, 추모 공연을 진행한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 선생은 많은 시작을 하였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저작 : 1941년 05월 31일, 1941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수록>    

일본에서도 시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를 포함해 10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시민단체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설치하는 모임'이 윤동주 시인 기일인 오늘 16일 후쿠오카시에서 발족한다. 니시오카 교수 등은 1994년부터 윤동주 시 낭독회를 매달 후쿠오카시에서 열고, 매년 기일인 2월16일을 전후해 윤동주 시인이 숨진 형무소 터 근처의 공원에서 추도식을 진행해왔다. 또한 윤동주 시인의 기일을 앞두고 그가 생전에 수학했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일본 교토(京都)시의 도시샤대에서는 2월 14일 오후 '도시샤코리안동창회'와 '윤동주를 그리워하는 모임'이 중심이 돼 윤동주 70주기·시비(詩碑) 건립 20주년 기업 행사가 열렸다. 행사에는 도시샤대 관계자, 시민, 이현주 주 후쿠오카 한국총영사 등이 약 300명이 참석해 이달 2월 16일로 서거 70년을 맞는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고 도시샤대 교정에 '서시'를 새긴 비석이 건립된 지 20년이 된 것을 기념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 시인의 70주기를 맞아 그의 유품 및 유고를 일본 3개 도시에서 순회하며 전시하는 ‘시인 윤동주 70주기 기념 후쿠오카, 교토, 도쿄 순회전시회’가 열린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일본에서 전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되는 곳은 모두 윤동주의 삶과 연관된 곳이다. 오야 미노루(大谷實) 도시샤 총장은 "한국과 일본의 틀을 넘은 우정과 협력에 의해 윤동주의 비(碑)가 이렇게 도시샤대 구내에 설치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 번 다시 불행한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며 "그의 명복을 빌고 시에 담은 그의 순수한 기도와 생각이 세계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주기를 염원한다"고 밝혔다.     

한편 도시샤 대학의 우리나라 출신 졸업생이 주축이 된 모임인 '코리아클럽'은 윤동주의 시비가 설치될 수 있도록 학교 당국의 허가를 받는 데 힘을 모았고 1995년 2월 마침내 시비가 세워졌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立敎)의 모임',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등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되새기는 활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저작 : 1941년 11월 20일, 1941 연희전문 문과 졸업문집 의 서시, 1941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수록>    

생전에 시집은 내지 못한 윤동주가 어떻게 시인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을까.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지 3주기였던 1948년 2월 16일 그의 유고시집이 첫 발간된 것이 '시인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첫 단추가 됐다.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고인의 70주기(2월 16일)를 앞둔 8일 일본 규슈(九州)대학에서 '백부 윤동주, 그리고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고인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지도록 국경을 넘어 노력한 이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인 정병욱(1922-1982)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시집을 내려고 하다 시대 상황상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필로 3권의 시 묶음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1권은 자신이 지니고 다른 1권은 은사 이양하에게, 나머지 1권은 나중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에게 줬다. 윤동주가 보관한 1권과 이양하에게 전한 1권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정병욱이 받은 1권이 윤동주의 작품 세계를 전하는 소중한 자료가 됐다. 정병욱은 1943년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윤동주의 시 묶음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신과 윤동주가 독립 후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 연희전문학교의 선생들을 찾아가 시집 발간을 의논하라고 당부한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시집을 넣은 항아리를 마루를 뜯고 땅에 감춰뒀다가 아들이 돌아온 후 건넸으며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1948년 빛을 봤다.     

이때부터 윤동주는 시인으로서 점차 알려졌고 정병욱이 대학입시 국어 과목 문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제한 것을 계기로 청소년에게 윤동주가 더욱 알려지게 됐다. 윤동주의 시는 1970년대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됐다. 정병욱의 여동생인 정덕희는 윤동주의 동생인 윤일주(1985년 작고, 윤인석 교수의 부친)와 결혼했다. 정병욱은 이를 계기로 윤동주의 육필 시집을 윤일주 부부에게 돌려줬고 윤동주의 작품 세계와 삶을 알리려는 노력이 더욱 확산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저작 : 1938년 05월 10일, 1941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수록>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문인들도 윤동주 탄신 97주년 행사를 열었다. 이들은 윤동주 시인의 민족정신을 기리고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한편 그 업적을 후대에 알리고 승계할 목적으로 사단법인 ‘용정윤동주연구회’도 만들었다. 이 연구회는 앞으로도 민족의 시성을 기리고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일에 앞장서며, 문화총서 '룡두레' 제1편을 출간할 예정이다. 3월에는 윤동주의 혼이 서린 '영국더기'에 사무실을 내고, 5월에는 윤동주를 위한 청소년 인물 전기를 펴낸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 지린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중학교에 윤동주(尹東柱·1917~1945) 시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서울의 북악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걷다 보면, 서울 성곽을 따라 조성된 청운공원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타난다. 언덕 입구에는 작은 박스형태의 하얀색 1층 건물이 있다. 건물 벽면에는 시인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적혀 있는 ‘윤동주 문학관’이다.     

문학관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소재 창의문 인근에 있으며, 종로구는 2012년 7월 25일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 문학관을 개관하였다. 윤동주 시인 문학관은 총 3개 전시실로 이뤄져 있다. 제1전시관 ‘시인채’로 가니 시인 윤동주가 평소 소중히 여기던 소설·시집의 영인본과 소학교 시절부터 작고 때까지의 일생을 주요 시기별로 구분해놓은 전시관 이다. 제2전시관은 제1전시관에서 제3전시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중정 역할을 한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에 자리한 팥배나무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은유하듯 제2전시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품고 있다. 제3전시관은 사방이 막혀 있고, 기존 철제 사다리가 달렸던 상부에만 사람 한명이 내려올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다. 따로 내부 조명이 없기 때문에 그 구멍에서 빛이 쏟아진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상이 재생된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일화를 모두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유가족들의 자료 협조와 감수를 통해 마련된 공간이다. 이곳에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하게 된 이유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 이곳 인왕산을 자주 찾아 시정(詩情)을 다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 이러한 시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였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꾸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랑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저작 : 1941년 11월 05일, 1941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수록>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16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북간도에서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참회록이라는 시를 남겼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저작 : 1942년 01월 24일>    

1945년 2월 중순에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어 윤동주의 사망소식이 알려졌다. 부친 유영석과 당숙 유영춘이 시신을 인수하러 일본으로 떠난 후,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부친과 당숙은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윤동주의 생체실험에 대해서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윤동주가 주사를 맞아왔다는 것과 후쿠오카 형무소의 연도별 사망자수가 매년 2배씩 늘어났다는 것은 일본이 생체실험을 행하였다는 심증을 가지게 한다. 
   
▲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     ©

 일본인 간수는 <윤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 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무소 측에서 알려준 운명 시간이 오전 3시 36분이었다. 유해는 화장하여 고향에 모셔와 3월 6일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묻히게 된다. 장례식에서는 《문우》지에 발표되었던 「우물속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해 단오 무렵, 윤동주 묘소에 <詩人 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을 세웠다.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85년에는 그의 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고,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쉽게 씌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저작 : 1942년 06월 03일, 도쿄에서 쓴 시詩>    

윤동주 선생은 시 뿐 아니라 많은 산문도 남겼다. ‘화원에 꽃이 핀다’의 산문에 그는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슬그머니 동무들을 떠나서 단 혼자 화원에 거닐 수 있습니다. 단 혼자 꽃들과 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참말 나는 온정으로 이들을 대할 수 있고 그들은 웃음으로 나를 맞아줍니다. ……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 세상은 해를 거듭, 포성에 떠들썩하건만 극히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 동산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履霜而堅氷至)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세상은 해를 거듭, 포성에 떠들썩하건만 극히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 동산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이 말속에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몸부림치는 일본제국주의의 망상을 느끼게 한다. 또한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라는 글귀는 선생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민족적 저항시인 윤동주 선생 서거 70주년을 맞은 오늘, 독립운동가로서 글귀의 구절구절에 묻어나는 나라사랑하는 마음, 조국의 광복이 그리워 가슴 치며 써내려간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선생이 서거한 지 70주년 되는 날에 한국뿐 아니라 몇몇 일본 문학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윤동주 시비를 설치하는 모임도 발족할 예정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자기반성이다. 하루속히 군국주의와 신사 참배를 버리고 일본이 새롭게 태어나길 기대하면서, 윤동주 선생을 포함해 국가 권력에 희생된 이들에게 일본 정부가 제대로 사과의 뜻을 표명하고 배상하는 것이 그나마 책임 있는 자세이다.<조규성 국립 한경대학교 부총장·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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