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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㉑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치란 | 기사입력 2016/07/29 [12:09]
기독교 장려 최초의 로마 황제 이름 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실크로드기행㉑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기독교 장려 최초의 로마 황제 이름 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이치란 | 입력 : 2016/07/29 [12:09]
▲ 이스탄불 시내에 있는 이집트 향신료 시장 앞에선 필자 이치란 박사    

인류역사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는 비단 터키 이스탄불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적 뒤죽박죽은 도처에서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영국의 역사가 E.H. 카의 명언에 의하면, 역사란 선택적이라고 했다. 그 수많은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된 역사만이 역사로서의 주목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터키와 이스탄불은 매우 특이한 역사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화려했던 동로마의 유산을 중앙아시아 출신의 튀르크 족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로마시대의 실크로드를 추적하면서, 우리는 현재 이 땅에서 주인 노릇하는 튀르크족의 모습과 활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동로마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긴 여행의 터널로 들어가 보자. 하지만 터널 속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진 않다.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은 중세시대 현재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의 명칭이다. 이름은 로마제국이었지만, 실제의 주민과 주변 나라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전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지역은 그리스인들의 터전이었다. 언어적으로 본다면 동로마 그리스어, 서로마 라틴어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그리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란 측면에서도 고찰해 볼 수도 있다. 기독교의 동서분열은 11세기 경에 일어났지만, 이런 싹은 이미 로마제국의 분할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청난 로마제국의 역사를 이 문외한이 설을 푼다는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이고, 솔직히 수박 겉핥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글을 쓰기 위해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 제국 쇠망사》를 통독해야 했고, 역사적 사실은 이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있기에 적은 노력으로 쉽게 접근하고 대강의 윤곽을 파악하여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교양서적으로 읽었던 책이 이처럼 유용하게 전거가 되리라곤 미처 몰랐는데, 다시 정독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결코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모든 분야에 박통(博通)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영국의 역사가로서 불후의 명작 《로마 제국 쇠망사》를 남긴 저자, 에드워드 기번.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힌 제13대 황제(53∼117CE)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 멸망이라는 무려 1200년간이 넘는 기간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이렇게 긴 시간의 역사를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닐 것이다. 기번은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부침을 거듭하며 몰락해 가기 시작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이후 역사학은 물론 경제학, 정치학,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책은 나폴레옹에게 제국의 야망을 갖게 했고 처칠이 자신이 '회고록' 을 집필하는 데는 '쇠망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바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는데 이 책에 대한 반항심이 작용했다고 한다. 이후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로마에 대한 기본 자료들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상 로마와 관련된 저작중 제1의 권위를 가진 저서로 꼽힌다고 하겠다.
 
▲ 로마제국의 제13대 황제로서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 흉상.    

그러면 동로마 제국을 건설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는 어떤 인물인가.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제국의 중기 황제로서 재위기간은 306년에서 337년까지 무려 30년간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기독교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통칭하며, 동방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聖) 또는 대(大) 콘스탄티누스로 호칭한다.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 번째 기독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그는 또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독교사에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은 313년에 반포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의해 이미 합법화되어 있었지만, 이 밀라노 칙령은 311년의 칙령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 내지는 '장려'를 의미하게 되었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탄압받는 입장에서 로마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으로 크게 격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장려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 브리타니아(영국)의 요크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
 
니케아 공의회(Concilium Nicaenum Primum)는 325년 니케아(Nicaea,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에서 열린 기독교의 공의회이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이 논의되었으며, 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채택한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가 주장한 기독교 신학)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외연이 확대되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의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동로마의 탄생은 전적으로 콘스탄티누수에 의해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4년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했고,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존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기까지는 기나긴 험로와 아슬아슬한 위기와 역사가 있었다, 그는 본래 서로마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고, 드디어는 황제로 까지 추대되었으나, 로마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변동과 내분에 의해서 분열 이전의 동로마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의도 하지 않았던 기반을 동로마지역에서 구축하게 됨으로써, 로마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아들들 또한 이 지역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그의 황제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고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 등의 중심지는 급격하게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자신의 도시로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원로원과 로마와 같은 공공건물을 지어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불렀다. 그의 사후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역사상의 이스탄불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튀르크족의 터전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역사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와 같다고나 하겠다. 남의 땅을 당당하게 자기의 땅으로 삼은지도 어언 6백여 년이 된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전, 오스만 튀르크는 그레코-로마제국의 영토를 점령했던 것이다. 유럽과 중동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튀르크의 정신을 지키는 그들에게서 뭔가 생동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특이하게 느낀 것은 홍차와 튤립이었다. 튀르크 족이 알타이산맥 어딘가에서 서진하면서 그들과 함께 온 꽃이 튤립이고, 차(茶)였는데, 지금은 흑해 산 홍차를 마신다고 했다.
 
▲ 터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어딘가에서 튤립을 가져왔고, 튤립에는 튀르크 족의 혼이 깃들어 있다.    

튀르크 족은 서쪽으로는 터키에서 동쪽으로는 중국 신장성 위구르까지 분포되어 있고, 일부는 러시아령 사하공화국에도 튀르크 족이 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고 언어가 같기에 지리상의 원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자가 신장성 카슈가르에 갔을 때, 이들은 튀르크의 전통적인 다방에서 흑해 산 홍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을 직접 경험한 바 있다.

현재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지만, 이스탄불은 터키의 중심부로서 터키의 상징이다. 이번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앙카라로 급거 귀국하려했지만, 여의치 않자 이스탄불로 와서 진두지휘했고 대통령 지지자들인 이스탄불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쿠데타를 좌절시켰다. 이스탄불은 1천7백만 명의 대형 도시이다. 실제로 이스탄불에 가서 도시의 생동감 넘치는 활력을 체험으로 느낀다면 터키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이스탄불은 상업도시이다. 중동에서는 가장 큰 시장을 갖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이고, 이런 시장의 모습은 실크로드 시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다.
 
동로마 시대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전성시대에는 전 세계 부의 3분의 2가 모인다고 할 정도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가 조직되었고, 국가에 의해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쳤다. 국영 공장에서 독점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은 이집트 등 지중해 국가들에 수출되고, 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몰려들었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비단길의 서측 관문이기도 하였다. 이런 동로마의 영광에 찬물을 퍼부은 것은 아랍인의 정복이었다. 이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은 잠시 침체를 면치 못했으나,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부흥해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5세(718∼775)는 741년 동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으나 아르타바스두스의 반란으로 퇴위되었다가 743년 다시 권좌에 복귀, 775년 죽을 때까지 통치했다. 이 무렵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종교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0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은 화려한 도시였고, 부를 과시했으며, 세계의 여행자들은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런 화려한 도시에 재앙을 가져온 것은 제4차 십자군이었다.
 
▲ 프랑크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장면.

제4차 십자군(1202~1204) 전쟁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촉구로 조직된 전쟁이었다.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획된 전쟁은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한 기독교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경제적 목적을 위한 전쟁으로 변질되어, 이슬람이 아닌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을 목표로 삼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 1204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 도시를 유린하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 약탈과 파괴는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을 낳았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로 파괴는 심각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라틴 제국(Imperium Romaniae)은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십자군의 제국을 말하는데, 1204년에 제4차 십자군 원정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주를 받고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다. 십자군은 1204년 플랑드르 백작인 보두앵 1세를 초대 황제로 세웠고 이후 57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배했다. 라틴 제국의 황제가 직접적으로 통치한 지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연안으로 국한 되었지만, 그리스 연안과 에게해 지역에 여러 봉국을 두었다. 아테네 공국 등의 라틴 제국의 봉국들 또한 넓은 의미에서 라틴 제국의 일부로 여겨진다. 라스카리스 황조가 세운 니카이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고 에페이로스를 무찌른 덕에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치세에 로마 제국은 짧게나마 부흥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은 당시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막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보면, 너무나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볼 때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기독교에 대해서 문외한들도 이곳이 기독교의 동서분열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면 잠시 옛 역사로 돌아가게 된다.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기독교 역사상 11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상호 파문으로 분리된 사실로서, 단일한 기독교 공동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동방 정교회의 시각과 교황과의 일치로부터 동방 정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시각차이다. 이 시각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탄불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역사의 현장이지만, 현재는 튀르크 족의 도시가 되어 있다.
 
▲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537∼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이 사이에 1204년부터 1261년 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됐다가, 1453년부터 1931년까지는 이슬람의 모스크로, 1935년에는 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라틴제국으로부터 비잔티움제국인 동로마를 되찾은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재 부흥에 전력을 다했고, 어느 정도 공을 세운 황제는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1223∼1282)로서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황제(재위기간:1261~1282)였다. 그는 1261년 라틴 제국에게 빼앗겼던 구도(舊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부흥시켰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는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 라틴제국으로부터 비잔틴제국을 되찾은 그리스인 미카엘 8세.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6년간 이어진 내전 탓에 제국은 황폐화했고 1354년에 겔리볼루에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 로마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무찔러 봉신국으로 삼았고,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지방 상당수를 정복한 이후였다.

 
오늘날 터키 땅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쿠르드 족은 인도의 북부지방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550년경 메데-페르시아 제국을 세울 정도였다. 점점 페르시아 제국화 되었고 메대 왕국 이후로 쿠르드 족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라를 세운 적이 없다. 기원전 7세기경 조로아스터교의 전신인 예지디교가 이들의 주요 종교였지만 이슬람의 침략으로 이슬람화 되었다. 메대인이라 불리던 이들도 이 때 쿠르드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자 터키는 급격하게 영토가 줄어들었고 주변은 여러 열강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때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가 일어나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쿠르드족과 함께 싸우며 이 때 세브르 조약(1920년)을 맺어 쿠르드의 독립을 보장해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독립전쟁 이후 1923년 세브르 조약을 무산시키는 로잔조약을 터키가 연합국과 체결했고 이 때 쿠르드 족의 독립은 무산되었고 쿠르드 족은 현재의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나뉘게 되어 시련을 당하고 있다. 민감한 문제이므로 이 정도에서 그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비잔틴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을 제시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만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고 한다.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가 필사적으로 해자를 방어했으나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는 역사의 기록이다.
 
▲ 하루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그랑 바자르(Grand Bazaar), 덮개가 있는 대 시장이다. 61개의 덮개 있는 상점 거리와 4천개의 가게가 있고, 연간 1억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세계 최대의 시장이다.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멸망한 2년 후인 1455년에 건립했는데, 실크로드 시대부터 기존에 있어왔던 시장을 재건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 위주의 도시에서 우랄알타이어를 쓰는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족의 도시로 변했고, 오스만 제국(1299-1922)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꿔 수도로 정하고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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